메-슈사마 찬가 · 성언 (2020년 12월 20일 생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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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72회 작성일 21-09-17 20:29본문
메-슈사마 찬가 · 성언
(2020년12월20일 생탄제)
찬가
사람의눈에 비-춰-지-지 않-을-뿐 나아가는신업은 정말로빠르도다
어떠한일도 일진월보하-는 세상일지니 낡은가르침으로 구원될수있으랴
대-신업의 깊-은-계획은 한이없으니 그저마음그대로 맡겨올릴지어다
성언
「재차(再次) 베르그송에 대하여」
나는 이전에, 프랑스의 유명한 근대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씨에 대하여 쓴 일이 있으나, 이번에 재차 써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붓을 든 것이다. 그것은, 흔히 나에게 여러 가지 일을 묻는다든지, 또 내가 이야기를 할 경우, 그 의미를 간단히 이해하는 사람은 매우 적고, 사항에 따라서는 실로 간단하며 알 수 있을 듯하지만, 좀처럼 알지 못한다. 묻는 사람은 상당한 교양이 있으면서 수궁하지 않으므로, 나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정확하게 열거하면 겨우 알게 된다. 그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베르그송의 철학이다.
어찌하여, 간단한 일을 그렇게도 알지 못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베르그송의 소위 찰나의 나가 되지 않기 때문이며, 물론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설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물정(物情)을 알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사실을 듣는다든가, 전설이나 기성 학문을 주입하게 된다든가 하기 때문에, 제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에는, 그것이 막대기와 같은 것이 되어 마음속에 만들어진다. 때문에 막대기 이외의 설을 들어도, 그 막대기가 방해를 해서 상념 속에 그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때문에 상념 속이 비어 있으면 고통도 없이 들어가므로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백지가 되라고 하는 말을 하는데, 실로 말 그대로다. 그렇지만 막대기 같은 것에 생각이 미치는 자는 거의 없는 모양이다. 때문에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지금부터라도 찰나의 나로 될 일이다. 찰나의 나란, 사물을 보거나 듣거나 하는 때, 순간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전혀 막대기가 방해를 할 틈이 없는, 마치 어린아이같이 한다. 흔히 어린아이가 어른의 말을 듣고 되받아하는 말에 감탄하는 일이 흔히 있으나, 전혀 막대기의 방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그는 또, 직관의 철학이라고도 말하였다. 이 의미도, 왜곡하지 말로 똑바로 사물을 보라, 그것이 바르게 보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며, 찰나의 나에 부수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의 철학에는, 만물유전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도 제법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만유 일체는 일순의 정체(停滯)도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며, 예를 들면 작년과 금년과는 모두가 어딘가 달라져 있다. 세계도 사회도 마찬가지이며, 자기 자신의 상념도 환경도 그러하다. 아니 어제의 나와 5분 전의 나와는 반드시 달라져 있는 곳이 있다. 그렇다면 옛날부터 말하는 한 치 앞은 어두움이라고 하는 말도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무엇이든지 일 초의 정지도 없이 유전(流轉)하고 멈추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이치를 인간에게 적용할 때에, 이러한 일이 될 것이다. 어떤 일에 부딪쳤을 때에, 작년에 본 방식이나 사고방식도, 지금의 그것과 달라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크게 본다면 종전 전과 종전 후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지 않는가. 얼마 되지 않는 사이에 경이적으로 달라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몇 백 년 전에 하던 식이나, 몇 십 년 전의 사고방식이, 조상 대대로부터 막대기와 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현재를 파악할 수가 없다. 이것을 칭하여 봉건적이라든가, 낡은 머리라든가 하는 것일 것이다. 결국 일체가 유전하고 있는데, 자기만은 흙탕물처럼 정체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외면당하거나, 불행한 운명으로 되는 것이다.
(1951년7월18일 영광(榮光)1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