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슈사마와 마사아끼사마 ~메-슈사마의 마음을 받아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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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21회 작성일 23-11-13 14:58본문
쿄-슈사마와 마사아끼사마 ~메-슈사마의 마음을 받아서~ 25
「메-슈사마께서는 말씀하신다
「인간의 사랑은 작다, 아니, 악이다」라고」
《메-슈사마》
신의 사랑은 절대애(絶對愛)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작지만 신의 사랑은 크다. 인간의 사랑 중에서 자기만 좋으면 좋다고 하는 것은 이기애(利己愛)이며 가장 작은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조금 커지면 부부, 자식 등 가족애가 되며, 조금 더 커지면 일족일당에 대한 사랑이 되지만, 보통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정도이며 더욱 넓어지면 타인을 위해 생각하고, 그 다음은 자신의 계급만을 생각한다. 공산주의자가 하층 계급만을 좋게 하려고 해서 중, 상층 계급을 공격하는 것은 이것이며, 역시 한정된 사랑입니다. 다음은 한 나라의 사랑이며 전쟁범죄자는 그것입니다. 그들은 일본만 잘 되면 중국인, 조선인(한국인)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전쟁 중의 충군도 마찬가지로 한정된 사랑입니다. 신의 사랑은 인류 전부, 인류만이 아니라 짐승이나 벌레까지 좋게 해주려고 한다.
(1948년 12월 18일 「강화말씀」)
《쿄-슈사마》
사랑은 모든 것의 근원인 주신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않을까요?
주신께서는 우리 인류를 사랑해 주시고, 그 사랑은 만물, 여러 원소, 산천초목 모든 것에 충만해 있습니다.
명주님의 인류 구제,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신업, 그리고 수많은 가르침은 진리의 구현임과 동시에, 주신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주신의 사랑의 목적이란, 그 취지란 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주신의 사랑의 목적, 취지는 우리 인간을 주신 자신의 진정한 자식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주신께서는 자신의 분령을 무수히 준비하신 것이 아닐까요?
때문에 주신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스며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6월 15일·16일 「지상천국제」)
「사랑」이라고 해도 보통 인간끼리 주고받는 사랑이라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요.
세상에서는 사랑이 있다거나 사랑을 받고 싶다거나 말합니다만, 그것은 신의 사랑의 편린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 우리의 것처럼 해주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인간끼리의 사랑은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증오처럼 되거나, 방금 말한 것처럼 쓸데없는 참견과 같은 것으로 인간의 사정이 자꾸 들어가게 되어 버리지요.
이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고 싶지만 이 사람에게는 절대로 주지 않겠다 라는 것과 같은 그런 일도 있기도 합니다. 상대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만족하지 않는 상황처럼, 애써 사랑을 베풀고 있는데도 아무 보답도 없다고 불평을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인간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사랑」이라는 것을 그저 둔 채로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의 사랑의 깊이라고 할까요, 그것을 알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2013년 2월 21일 「면회(이사)」)
《마사아끼사마》
그래서 우리는 신의 사랑, 신의 사랑이라고 합니다만, 그 신의 사랑이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면 배려를 베풀다 라든지 그 정도 일밖에 상상할 수 없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자신의 것처럼 해 온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감사해야 한다, 이런 것을 해야 한다 라고 하며 마치 자신이 사랑이나 감사나 여러 가지 일을 하는 힘이 있는 것처럼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나 감사는 사실은 신만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하자면 신의 것,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오늘날까지 도둑질해 온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부터는 신의 힘으로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시 「아, 지금까지 마치 자신의 힘으로 남을 사랑하거나 남을 옆에서 떠받쳐 주거나 감사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신이시여,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죄송한 마음이 싹틀지 어떨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회개의 마음이 우리의 결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그것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래, 사랑이나 감사는 신의 것이었구나. 그것은 알겠다. 그럼 사랑이나 감사는 신께서 주신 것이니까 그것을 소중히 써 가자. 더욱 감사를 철저히 하고 남을 사랑하자」 라는 방향으로 가 버리면 결국 지금까지와 똑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가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감사를 철저히 해 주길 바란다」거나「인간적인 사랑을 나누어 주길 바란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메시지는 「회개하길 바란다」「용서를 받아들이길 바란다」「그리고 진정한 의미로 나의 자식이 되길 바란다」 라는 것이 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둑질을 해왔지만 그런 너희들의 모습을 용서하겠다, 라고 신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그 용서야말로 신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도둑질을 하고 신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집에서 탈출한 것입니다.
「감사」도 「사랑」도 전부 가지고 신께서 계시는 집에서 탈출하고, 그렇게 마치 독립한 것처럼 착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남을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은 실은 나의 집에 있던 것이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가지고 돌아오라」 고 말씀하고 계신다. 「감사와 사랑을 돌려 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중략)
「용서한다」「용서할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 신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을 사랑합시다 라든지 감사합시다 라는 것에 힘쓰려고 생각하거나, 그것을 부족하나마 어떻게든 해 나가자고 생각하고 있으면 용서는 거기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노력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거기에는 분명「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감사」는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신의 용서, 신의 사랑은 없다.
신의 사랑은 용서이므로 그것을 「남을 옆에서 떠받쳐 주도록」라든지 「뭐든지 감사할 수 있도록」라고 노력해 온 자신을, 역시 과감히「나는 신의 사랑을 도둑질하고 있었습니다. 신의 감사도 도둑질하고 있었습니다」라고 인정하고, 「명주님과 함께인 메시아의 존명으로 신의 용서를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신의 많은 사랑과 은혜로 자기 자신이 가득 채워집니다, 왜냐면 용서가 신의 사랑이니까요. 자신의 신께 도둑질하고 있는 모습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 안에 신의 사랑이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그래서 이제 어떻게든, 어떻게 해서든 메시아라는 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명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름이니까요.
처음에는 관음이었지만 관음에서 “광명여래로서 나타나 응신미륵으로 화하시고 메시아가 되시어”, 옛날 명주님 시대의 선언찬사입니다만, 그렇게 해서 신의 혼에 지어진 이름을 명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적인 존재의 이름을.
그래서 메시아라는 것은 명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름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명주님과 함께인 메시아의 존명으로 낡은 저를 신께 바치겠습니다」「사랑도 감사도 모두 바치겠습니다」, 이제 그것 밖에 없습니다.
「돌려드려도 되지만 앞으로 신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을 하면 될까」라는 그런 것을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그렇게 제멋대로 사랑이나 감사를 써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죄송합니다. 바치겠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결론인 것입니다. 그것만이 결론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신의 쪽에서「이제 너를 용서했다」라고, 「맞아들이겠다」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런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
(2017년 6월 23일「전국청년담당자와의 간담회」)
『글로리』 No.28, 2022/5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