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람이 되어라」마사아끼사마 성언 2024년 5월 1일 월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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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23회 작성일 24-07-02 16:25본문
5월 월례제 마사아끼사마 성언
2024년 5월 1일
「새로운 사람이 되어라」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비도 오는데 황금연휴 중에, 교주님 아래로 참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셨습니다. 성지라든가 미술관의 보물 같은 것이 있지요. 또 여러 활동도 있습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이라고 할까요, 신도이지요. 명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이자 신도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으며, 또 성지라고 해도 사람이 없으면 그런 장소의 유지 관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종단에서는 그런 사람 모두, 신도 여러분 모두를 통합한 상징이 교주님이다(「교칙」제5조 제2항)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배독한 성경(「히브리서 제3장 및 제4장)에도 있었듯이 우리가 믿는 것은「살아계신 신」이며, 그 살아계신 신께서는 사람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렇다는 것은 명주님께서 남겨주신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이른바 성지라든가 미술관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 일부는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알 수 없게 되어, 「사람보다 물질이 더 중요하다」라고 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들이 한 선택이라는 것이 실은 명주님께서 남기신 가장 소중한 것을 업신여겼던 터무니없는 일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도 모르고 교주님을 쫓아내고, 성지다, 미술관이다, 훌륭하다 하는 그런 모습은 허무합니다. 허무해.
하지만 여러분은 다릅니다. 명주님께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 그것은 즉 교주님이라는 것으로 집약됩니다만, 여러분은 그 교주님 아래서 일어나 주시고, 그리고 이 새로운 활동을 추진해 주시고, 또 교주님 아래에서의 신업을 귀중한 헌금으로 받쳐 주고 계십니다.
저는 그 여러분의 신앙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명주님께서도 여러분과 같은 신도를 남기신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실 것이라고 오늘을 맞이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기에 여러분께 그 감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지난 달「예수부활제 및 춘계대제」에서 저는 몇 가지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명주님의「미륵의 세상에는 전 인류가 채식가가 된다」는 뜻의 성언은 이전부터 어쨌든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수년 전, 그것을 다시 마주쳤을 때 받은 충격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명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라는 충격.
그 명주님의 마음, 성언을 받았을 때 저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크게 비춰져서 드러났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왜 명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실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륵의 세상이라고 하면 조금 막연하지만 미륵의 세상에는 이렇게 된다 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장래적으로는 그렇게 됩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주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70년 정도 전에, 장래적으로 인류는 모두 채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명주님 마음을 느끼고, 왜 명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명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세상에도 그런 증표가 있지 않을까 라고, 이상하지만 이미 그런 세상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듯 명주님 마음을 구하는 중에, 전해드린 다큐멘터리나 정보 등을 여러 가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는, 지난 대제에서 전해드린『영양학의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인데, 거기에는 명주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육식은 피를 탁하게 한다」라든가 그런 것에 대해 서양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명주님께서 채식이나 육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여러 가지 거기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어른도 아이도 즐겁게(즐겁다고 하면 이상하지만)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꼭 봐 주셨으면 하는데, 이것이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회원이 아니면 볼 수 없기는 합니다. (일동웃음)
지난 대제에서는 또『Dominion(도미니언-통치권)』이라는 다큐멘터리도 말씀드렸습니다. 도미니언.
이것은 육식업계에 관한 다큐멘터리인데 육식이 될 동물들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를 그린 다큐멘터리입니다. 이것은 유튜브에 있어서 누구나 볼 수 있으니, 이것도 꼭 봐 주셨으면 합니다.
단, 조금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은 도살장 등의 영상이여서 그 잔인성에 상당한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린 자녀나 청소년들은 조심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는 그야말로 사람에 따라서는 눈을 돌리게 하는 영상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동물을 죽이는 것이니까요. 동물의 울부짖는 모습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또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그다지 그려지지 않았지만, 도살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대단한 위험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죽기 직전의 동물에게 차인다든가, 도살하는 도구에 의해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목이 잘린다든가, 팔이 잘린다든가 하는 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가혹한 직장인 것 같습니다.
이렇듯, 이 다큐멘터리는 언뜻 보면 눈을 돌리고 싶은 영상입니다만, 제가 생각한 것은, 만약 이것에 눈을 돌린다면 저는 위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이것은 제 이야기입니다. 제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 다 볼 수 없는 분들도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뭔가 채식 이야기를 하게 되면, 채식을 선택하고 있는 사람은「채식주의자」가 됩니다만, 지금까지의 저는 죽인 동물의 고기를 먹겠다는 선택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육식주의자」였던 것입니다.
제가「육고기가 먹고 싶다」는 것으로 인해, 이 다큐멘터리에 그려져 있는 것 같은 상황을 동물에게 억지로 강요해 온 것이며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눈을 돌린다면 저는 가당치도 않은 위선자이며, 이 현실은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단, 이것은 제 삶의 방식인 것으로, 실제로 보시고 이것은 볼 수 없겠다 하며 안 보시는 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명주님의「미륵의 세상은 채식」이라는 것에 관해 여러 가지를 알아가는 중에 제가 위선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흔히 지구 온난화, 환경 문제라고 하는 것에 관해 배기가스 배출이 없는 전기 자동차가 좋지 않을까 라는 등의 그런 것이 있지요.
하지만 제가 배운 것은, 지구 온난화에 관해서는 자주 교통기관이 내놓고 있는 온실가스가 거론되어 비판받곤 하는데, 실은 전 세계의 교통기관 모두(자동차나 비행기 등) 그것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축산업 쪽이 온실가스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저는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단순하게 전기 자동차가 계속 늘어나는 것은 지구환경에 좋다든가 하면서, 평범하게 육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저는 터무니없는 위선자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에서 이러한 정보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찾아보면 찾을 수 있는데, 그것 말고 평소에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영국입니다. 영국 같은 곳은, 육식은 지구 온난화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이것은 지구 환경, 인류의 미래에 좋지 않다는 것에 대해 모두의 의식이 매우 높습니다.
약 3년 전인 2021년, 영국의 전국적인 조사에서 5세부터 16세 아이들에게「당신은 비건주의자입니까?」「장래 비건주의자가 되고 싶습니까?」라고 질문했더니, 5분의 1이, 지금 현재 이미 비건주의자이거나 장래에는 비건주의자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3분의 1은 지금 현재 채식주의자이거나 장래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영국의 전국적인 조사입니다. 이 정보는 제가 조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이른바 큰 신문사에서 나오는 신문에 보도된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채식주의자라는 것은, 비건주의자는 동물성은 전혀 섭취하지 않지만, 채식주의자는 계란과 치즈는 섭취한다는 것이 아마 이 조사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지만 달걀과 치즈는 먹습니다. 이런 채식주의자는, 이미 영국에서는 세 명 중에 한 명의 자녀들이 이미 그렇거나,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하고 있습니다. 모든 동물성을 섭취하지 않는 비건은 5분의 1이므로 20%. 전 영국 국민의 자녀들의 20%는 지금 현재 비건이거나 장래에 비건이 되고 싶어 한다는 조사 결과입니다.
또 영국의 어느 큰 대학에서는 학식(学食)를 전부 비건식으로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학생 자치회가 투표해서 이것이 통과했습니다. 이것은 작은 대학이 아닙니다. 학생이 2만명 정도 있고, 게다가 세계의 백 몇십개 나라에서 유학생도 오는 큰 대학에서 그런 선거처럼 투표가 행하여져, 그것이 가볍게 과반을 넘겨 통과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대학에 가면 학식은 비건식뿐이겠지요. 그러니까 조금씩 바꾸어 가면서 내년 2025년에 100% 비건식으로 해가는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런 일은 어느 특정 대학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의 다른 모든 대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을 투표하여 그것이 통과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는, 육식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서는, 국민의 의식으로서는 주로 환경 문제입니다. 환경문제 및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건강이라고 하면「자신을 위해서」하는 것처럼 이기적인 것이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서양인의 이념으로서는 그런 이기적인 이유보다도, 역시 대의(大儀)를 위해 육식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말씀드린 대학에서는, 그 대학의 식당에 가면 내년부터는 전부 비건식입니다. 육고기, 생선, 계란, 유제품은 일절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지요. 게다가 2만명 정도의 학생이 있고, 백삼, 사십개국에서 유학생이 오는 그런 대학에서, 학식이 전부 그러한 비건식이 됩니다.
그래서 영국의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투표나 결정이 점차 이루어지고 있어, 학식의 절반 이상은 비건이거나 학식에서 육고기, 생선, 유제품, 계란 사용을 50% 삭감한다든지, 그러한 투표나 결정이 점차 이루어져, 이제 수십 학교에도 가면 학식의 절반 이상은 비건이나 아니면 절반 이상은 절대 육고기, 생선, 유제품, 계란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입니다. 지구나 인류의 미래에 관해 젊은 사람들의 의식이 매우 높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직 윗세대 분들이 계시지만, 지금 대학에 다니고 있는 분들이 어른이 되면, 세상은 이제 점점 그런 세상이 되어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흐름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도 마찬가지이며, 미국도 당연히 그런 흐름으로 되어 갈 것입니다. 환경문제 같은 것이 계기가 되어 차츰 그렇게 되어갑니다. 물론 지금 당장 이런 모든 나라가 바뀐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하지만 미래에는 확실히 그렇게 되어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비건식만 하는 대학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런 예를 들어서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냐면「미륵의 세상은 채식」이라는 것은, 이것은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단 제가 하는 말에 대해서 여러분이 여러 생각을 하시는 것은 아직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명주님 신도이며, 장래적으로 인류는 모두 채식을 한다는 것은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도 그런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 일본인의 실태는 어떨까요? 영국은 이미 그렇게 되었고, 유럽도 변하고 있으며, 미국도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본인은 뭔가 미국의 속국 같은 느낌으로, 지구의 문제나 인류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되어 있지 않나요? 하지만 명주님께서는「세계인이 되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물론「세계인이 되어라」입니다.
오늘 배독한「새로운 사람이 되어라」의 성언에도 구인형(旧人形)은 안 된다, 오히려 구인형(旧人形)의 반대가 되도록 마음을 써야만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즉 우리는 점점 더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일본의 현상이 명주님께 정말로 죄송합니다.
「미륵의 세상은 채식」라고 말씀하신 명주님께서 계신 그 일본이, 이제 완전히 서양에 지고 있지 않습니까? 분합니다, 저는 분합니다. (일동웃음).
그래서 젊은 사람은 만약 가능하다면, 만약 그러한 기회나 상황이나 여러 환경이 허락한다면, 꼭 영국이나 유럽 등에 가셔서, 그러한 새로운 세계의 흐름을 느끼고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비건식이(명주님의「미륵의 세상은 채식」이라는 것이)도대체 얼마나 세계의 정말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되어 가고 있는지에 대해, 느끼고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국 등에 가서, 여러 비건 레스토랑이나 지금 말한 대학의 학교 식당에도 가 보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이미 얼마나 변했는지 느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곳에 가서「저는 비건입니다」라고 하면 좋을 것 같네요. 「Iʼm a vegan」이라 말하고 와 주십시오.
「일본에서 비건식을 먹으로 왔습니다」라고, 그렇게 말하고 와 주십시오. 저도 젊었으면(일동웃음). 지금은 아이들도 있어서 쉽게 갈 수 없네요.
제가 10여 년 전에 영국에 살 때는 이런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 10년으로 꽤 바뀐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할까요, 뭔가 그런 움직임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제가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아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일지도(일동웃음), 영국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적어도 이 변화의 속도는 대단하며, 그리고 이 움직임,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습니다.
저는 만약 명주님께서 지금 시대에 살아계셨다면 분명 당연하다는 듯이「나는 비건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명주님의 식에 대한 말씀의 내용을 생각하면, 지금은 분명 채식을 하고 계실 것이며, 그리고「영국에서는 이미 이렇다」「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다」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시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아, 그렇습니까? 명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명주님께서는 90세가 되면 채식을 시작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0세가 되면 나는 조식(粗食:변변치 않은 음식)의 채식을 한다, 먹는 양을 적게 하는 것으로 인해 나는 젊어진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이미 서양의 영양관(현재 일본인이 믿고 있는 영양관)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영양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신체가 그 영양을 만들려고 하여 내장기관이 강해지고 결과적으로 신체가 젊어진다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서양의 쪽의 사고방식은 단백질을 이 정도, 지방분은 이 정도 라고 하며, 그것을 가능한 한 잘 섭취하면 좋다고 하는 사고방식. 하지만 명주님의 영양관은 이 서양의 영양관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90세에 채식을 시작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만약 명주님께서 살아계셨다면 1955년, 72세에 승천하셨으니까, 그리고 나서 플러스 18을 하면 1973. 그렇지만 생일도 고려하면 1972년 12월 23일, 이 때에 90세가 되셔서, 그때부터 명주님께서는 채식을 개시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만약 명주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신다면 채식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명주님을 생각하면 그다지 그런 이미지를 안 갖지 않나요?
하지만 실제적인 문제는 1972년 12월 23일부터 채식을 하시는 명주님께서 우리의 교조입니다. 이 분(마사아끼님, 신전 옆의 신영을 가리키심). 이 분이라고 하면 뭔가 이상합니다만,(일동웃음) 명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명주님께는 장래의 인류에 대한 비전이라는 것이 있기에, 메시아교 신도는 그 비전에서 뒤떨어지는 듯한 걸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짜로 서양에 지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기도, 식, 음악」이라는 구체적인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있는 분은 꼭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좋으니, 밭에서 채소를 재배하여 수확물을 본인도 드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채식을 실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명주님께서는 그런 것이 장래 인류가 걸어가야 할 삶의 방식이라고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퇴직하고 시간이 있다든가, 그야말로 퇴직한 전종자 분들은(일동웃음) 꼭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전종을 퇴직한 후 나는 이것으로 살아 가겠다 하며, 꼭 해 주셨으면 합니다. 모두 함께 협력하고, 그리고 잘 아는 사람에게 배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통해서 명주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마음에 나날이 쓰임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채식 실천이 도저히 어렵다는 사람은, 그럼 일주일에 하루부터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은 미륵 세상의 주민이 되는 날, 명주님 마음에 100% 보답하는 날」이라고 정하고, 일주일에 하루라도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일주일에 한번 하게 되었다면, 그 후, 주 2회 하면 2배입니다. 2배. 명주님 마음에 두 배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주 3회 하면 3배. 365일 하면 365배입니다.(일동웃음)
이렇듯, 명주님께서 설정하신 미륵의 세상 주민이라는 기준에 뛰어들어 살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명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명주님께서 기뻐하시면 명주님 신도인 우리에게는 즐거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니, 나는 명주님 신도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명주님 신도인 우리는 명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이야기를 바꾸겠습니다.
명주님께서는 조레이었지요. 조레이. 조레이를 계속 진행하시고, 마지막에는 상념이다, 기도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최만년, 조레이는 두 번째 문제이고 앞으로는 상념의 세계이다,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하라는 것에 대해서 명주님 승천 후, 현 교주님께서 자세히 말씀해 주셔서, 여러분이 상념의 실천이라든가, 맡긴다든가 하는 것으로 불리는 것처럼, 자신이나 자신 주위의 여러 상황 등을 통해 마음에 생겨나는 것에 대해, 그 마음을 신께 바치자,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신앙실천이다, 그러니까 기도하자, 맡기자 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가 지금 가르침 받고 있는 이 마음에 대해서, 저는 이것은 단지 자신 마음 안에서 약간 신과 교류하는 작은 것이 아니라, 저는 이것은 삶의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의 혁명.
무슨 의미냐면 예를 들면 지금까지의 우리는, 남의 이야기나 가십, 이런 것을 좋아했지요. 지금까지 라기 보다 지금도 좋아하지요(일동웃음). 친구와 만나서「저 사람은 저렇대」「그래?」라든가(일동웃음).「OO씨 차 한잔 합시다」「나 오늘, OO씨와 차 한잔 하러 간다」라고 하고, 거기서 커피 한 잔 하면서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 몇시간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지요(일동웃음). 「저 사람이 이래서」「아니, 그 사람은 이렇대」「어? 그래?」같은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당연하게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르침 받고 있는 것은, 이「사람의 문제」라는 것은 실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의 문제는 실은 당신 자신의 문제, 우리 자신의 문제이지 않은가 라고, 그렇게 가르침 받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빚을 져서 이렇다」라는 이야기가 있었을 때, 그것은 언뜻 남의 일 같지만, 실은 남의 일이 아니라 당신 자신,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누구로부터 용서받았는지를 타인을 통해 신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 남의 모습 이전에 그런 타인의 모습을 보고 뭔가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이 있지요. 우월감에 빠지거나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는 그런 자신의 모습.
우리가 가르침 받고 있는 것은 그런 미흡한 자신의 모습도 통째로 신께 바치라는,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는 실은 지금까지처럼 가십거리 취급하듯 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좋았지요, 그것을 그냥 즐기고 있었으니까요(일동웃음). 뭐 그저 즐기고만 있었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남 이야기하며 뭔가 자신이 이 지구상에서 조금은 나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나는 뭔가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었던 그 삶의 방식은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타인의 고생이나 실패, 여러 문제, 그런 모든 것은 나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맡기라고 해도 결국 이것은 삶의 방식의 혁명입니다.
저는 친구들과 차를 마시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의 여러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신께 연결한다는 중요한 역할도 있으니까요. 「신의 귀로서 써 주십시오」하며 친구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필요한 것이 있으면 전하겠으니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신께 말씀드리고, 그 자리에서 생각드는 것에 대해 상대에게 전한다든가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또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을 심판할 수도 없게 되었지요. 지금까지는 「어디에 사는 누구는 이런 일을 해서 감옥에 가야하는 것 같다」라고, 물론 그런 상황은 우리 일상에서 좀처럼 발생하지 않습니다만, 그런 것으로 자신은 조금은 주위 사람보다 제대로 된 인간이라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심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할 수 있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산다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삶의 방식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확실히 남을 심판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이해합니다.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들며, 심판하는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깨달았을 때는「아, 저 사람의 모습은 내 모습이구나」「나를 위해 저런 죄를 짓고, 나 대신 감옥에 갔다」라는 생각, 이것입니다. 사실은.
세상에서 여러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은 우리를 대신해 떠맡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을 심판하는 삶의 방식은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말한 것처럼 사람을 심판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남을 심판하여 자신이 위라고 하며 만족하고 끝나는 삶의 방식은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아, 이것은 제 모습이네요.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대단한 삶의 방식의 혁명입니다.
그리고「좋은 일, 나쁜 일」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보통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은「OO씨의 좋은 점을 봅시다」라든가「사물의 좋은 점을 보자」라는 말을 자주 듣지요. 도덕적인 관점에서 그런 삶의 방식을 취하자는 것은 세상에서는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본적인 발상의 베이스가「정화」이기 때문에 전부 좋은 일입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좋은 일.
아니, 그렇게 생각이 드는가 들지 않은가, 그 문제는 있습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라고 해도 나쁜 점만 보일 때도 있지요(일동웃음). 특히 자신에 있어서 가까운 사람이거나 하면, 나쁜 점만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일동웃음). 그 사람이 하는 사소한 일들이 굉장히 신경쓰여서「왜 저런 일을 계속 할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좀처럼 나는 남의 좋은 점을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 안 된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남의 나쁜 점만 보는 모습도「좋은 일」의 나타남입니다. 신께서 그런 미흡한 인류의 모습을 비추어 주시니까요. 나쁜 점만 보는 인간의 모습을 신께서는 보여주고 계십니다.
보통 세상의 종교는, 남의 좋은 점을 봅시다, 사물의 좋은 점을 봅시다 정도 밖에 말하지 않은데, 우리가 가르침 받고 있는 이 마음의 실천이라고 할까, 사물의 견해라는 것은 모두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예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주님께서도 무슨 일이 있든「기뻐하십시오」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까? 뭔가 엄청나게 괴로운 마음이 들 때일수록 용기를 가지고「기뻐하십시오, 신이시여」「이런 마음을 품은 자들이 당신 곁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기뻐해 주십시오」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기뻐하면 기쁜 일이 온다」입니다. 명주님의「인간은 상념나름」. 기뻐하면 기쁜 일이 온다. 명주님께서는 기쁜 일이 오면 기뻐하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명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는 180도 다른 삶의 방식이십니다. 세상은 기쁜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라. 우리는「기뻐하면 기쁜 일이 온다」이기 때문에, 기뻐할 일이 없는 상황이어도 모든 일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대단한 삶의 혁명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의 좋은 점을 봐야 한다, 나쁜 생각은 가지면 안 된다 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말을 들어도 결국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나는 이것을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이것을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할 수 없다, 저 사람은 이것을 할 수 없다, 어제는 좋은 일이 있었는데 오늘은 나쁜 일이 있었다든가, 계속 그런 삶의 방식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제 그 삶의 방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만년에 명주님께서 조레이는 두 번째 문제이고 이제부터는 상념이다,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삶의 방식의 혁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방식에 눈을 떠라」라는 것으로서의 조레이이자 상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럼 그런 삶의 방식이 쉽게 되는가 하면, 실은 그것에는 어려움도 꽤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방식이 스며있기 때문에, 좀처럼 이 삶의 방식에 눈을 뜨기는 어렵습니다.
신약성서에 탕자의 비유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제15장 11절~32절). 이것은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는 것이 신께 있어서 얼마나 큰 일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이야기인데,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어느 곳에 아버지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부자였는데, 어느 날 동생이 아버지에게 죽기 전에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신의 몫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보통이라면 거기서 아버지가「노」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정해서「어, 그래?」「너는 내가 죽으면 줄 유산을 지금 갖고 싶은가?」「알았다」라고 하며, 형과 동생에게 장래에 건넬 유산을 전부 줍니다.
그러자 동생은「오, 아싸!」「설마 진짜로 받을 줄이야」라고 하며 며칠 후에 받은 것을 전부 들고 집을 나가버립니다. 이 정도의 돈이 있으면 이제 독립할 수 있다며「아버지, 안녕」(일동웃음)하며 집을 나가 버립니다. 형은 남았습니다.
집을 나온 동생은, 드디어 부모로부터 해방되어 파티 삼매경에 빠집니다. 여자를 부르고 술을 마시는 파티 삼매경에 빠지고, 그리고 금세 돈을 다 써 버립니다.
그래서 어디로 갔냐면, 어딘가 먼 마을로 갔겠지요. 여기는 아타미니까 아타미라고 가정하고, 좀 도시인 오다와라나 요코하마 근처일까요, 뭐 도쿄에 갔을지도 모르겠지만(일동 웃음), 어쨌든 돈을 제대로 쓸 수 있고 파티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곳이니까, 그 정도의 도시까지 갔겠지요.
그런데 거기서 돈이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자 그가 있는 지방에(방금 말한 요코하마라는 비유가 이 이야기와 잘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지방에 대기근이 일어납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돈도 없기 때문에 곤란합니다. 그래서 농가에 가서「일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자「그럼 돼지를 돌보라」라고 하여 돼지를 치게 됩니다. 참고로 돼지를 치는 것은, 유대교의 문맥에서는 가장 더러운 일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돼지를 치는 것이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돼지를 치느라 흙투성이가 되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람이 먹는 것을 살 돈은 없어서 돌보고 있는 돼지의 사료라도 먹고 싶어집니다. 그만큼 견디기 힘든 배고픔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사료라도 먹고 싶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그는 정신이 번쩍듭니다. 즉, 아버지가 생각난 것입니다. 너무 염치없지만 그는「아버지는 돈도 있고, 거기로 돌아가면 먹을 것도 곤란하지 않으니까,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돼지를 치니 진흙투성이에 배도 고프고 이미 비쩍 말라 있을 때,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려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어서 아버지를 만나면「저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저를 고용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집을 향해 걸어서 돌아갑니다.
한편, 집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아버지는 갑자기 차남이 유산 전부를 달라고 하여 그 돈도 다 주니, 돈을 받은 차남이 바로 집을 나가버려서 보통 사람 같으면 화가 나 있을 텐데, 그 아버지는 아들이 나간 후에도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매일 매일 현관 앞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혹시 이쪽으로 돌아올까?」「아니 저쪽일까?」하며 매일 매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때가 온 것입니다. 돼지를 치던 곳에서 개심하고 돌아오는 아들. 그 아들의 모습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아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들에게로 달려가서 잘 돌아왔다 하며 그를 끌어안습니다.
그때 아들이 말을 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라고 하며, 집에 있는 가장 좋은 옷과 가장 좋은 신발 등을 준비시키고 그리고 잘 돌아왔다 하며 큰 기쁨으로 축하연을 합니다.
아버지는 거기서「너 그동안 뭐했냐?」「내가 너한테 준 돈을 다 썼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일절 나무라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맞이했다는 그런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은 그냥 보통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비유에서 전부를 들고 집을 나간 것처럼, 우리도 신의 것을 전부 들고 신의 집에서 나온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당연히 그것뿐만 아니라, 보는 힘, 호흡, 말, 생명, 의식, 이것들 전부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힘이라는 것은 대단한 파워이기 때문에, 돈을 가지고 나왔다든가 하는 그런 수준은 아닙니다.
이렇듯 나에게는 대단한 힘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신의 것을 자기 맘대로 다 사용하고 시들어져서,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습니다.
신의 집에 돌아가면 얼마든지 충전, 보충해 받을 수 있는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충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차츰 차츰 주어진 것을 다 써 버려서, 지금 우리는 나만은 훌륭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돼지를 치며 더 이상 먹을 것도 없는, 인간이 먹을 것이 아닌 것을 먹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까지 몰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사실은 말이죠.
신의 것,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호흡도 말도 전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은 신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아니 내가 지금 돌아가도, 죄인이다, 회개하라 라는 말을 듣고 있으니, 나는 신께 혼이 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신의 집에서 전부를 가지고 나와 나의 힘으로 오늘까지 살아왔다, 인생에서의 고생도 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이제 신께로 돌아가는 것보다 이대로 생애를 완수한다,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지금도 계속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매일 밖을 내다보며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께서는.
우리는 이 세상 일을 겪으면서 여러 일이 있습니다. 그 전부입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외로움도 그 전부입니다. 그것을 맛보았을 때「아, 이런 마음은, 신, 당신께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네요」「많은 조상님과 인류의 생각을 저는 붙잡고 있습니다. 이것을 당신께서는 받아들이고 싶으신 것이네요. 신께서는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네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앞으로도「나는 나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할 것인지, 아니면 회개하여 신께 마을을 향하고 방금 배독한 성서에도 있었듯이「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신께 등돌린 그때처럼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히브리서」제3장 15절)라는 것으로 신께로 돌아갈 것인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돼지를 치는 이야기처럼 완전히 막혀 있는데, 아직도 아니 나는 나의 힘으로 살아간다, 나는 훌륭한 존재이다, 남들에게 좋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하며 계속 완고하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라는 것은 신께서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지금「돌아오라」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 배독한 또 하나의 성서의 한 편에도 있었습니다만(「에스겔」제36장 24절~31절) 완악한 마음은 돌 같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 같은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돌 같은 마음은 완악한 마음이지요. 내가 살아간다 하며 꽉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그런 것은 어쩌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열심히 지키고 그리고 가족을 지켜야 한다, 싸워야 한다 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돌 같은 마음이 되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훌륭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신께서는 너의 모든 것을 가지고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고 살의 마음이 되라, 맑혀줄 테니 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같은「에스겔」에 우리를 맑히는 물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만(제36장 25절), 그 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의 피입니다. 완전히 굳어진 돌 같은 우리의 마음에 뿌려지는 맑은 물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만약 자신이 맑아지는 것이 자신의 마음가짐 나름이라면「나는 이미 신께 마음을 향하고 있는데, 당신은 아직도 돼지사료가 먹고 싶나요?」라든가,「나는 이제 돼지사료를 먹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고 신께로 돌아가고 있습니다」라든가, 그런 우열의 세계로 들어가 버립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은 관계없습니다.
생명의 물인 예수님의 피는 이미 전 인류 위에 빠짐없이 뿌려져 있으며, 우리 인류가 안고 있던 돌 같은 마음은 이미 살 같은 마음으로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께 마음을 향하는 것도 우리의 공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입니다. 음성을 들은 것에 반응할 뿐이기에 아무 공적도 없습니다. 나는 신의 음성을 듣기 전부터 돌아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조금은 자신의 공적일지도 모릅니다만, 하지만 그렇지 않고 신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일이 있지요. 전쟁에 이어 전쟁, 재해, 천재, 질병, 이웃 관계.
혼돈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혼돈의 세상에서 신께서는 우리가 당신에게로 돌아오기를 두근두근 설레하시며 기다리고 계신다는 이 일만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통 이런 세상이라면 신께서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고 생각합니다만, 신께서는 두근두근 설레하시면서,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이「아 신이시여」하며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전 인류가 신께 마음을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 필요가 있어서 언뜻 보기에 부조화라고 생각되는 일을 일으키셔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 신께 있어서는 괴롭습니다.
하지만 신의 마음 중심에는 돌아오는 자신의 아들들 딸들과 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신의 집에 있던 모든 것을 가지고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신께서는 계속「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라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해 주고 계십니다. 집 현관 앞에서「너를 만나고 싶다」라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게다가 돌아가도 우리를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신께서는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나무랄 것이든 뭐든 이미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를 맑혔기 때문에 나무랄 필요같은 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고생을 했든, 어떤 나쁜 일을 했든, 신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고의 대접을 하고 싶으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세상은 혼돈스러워 보입니다만, 신께서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우리와의 재회를 바라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그리고 메시아교라는 것은, 이 신의 사랑에 보답하는 매우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의 사랑이라는 것은 설합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무엇이든 용서하시는 분이라든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든가, 그런 것은 모두 설합니다.
하지만 메시아교가 설하는 이「기도」의 구원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지금 이 순간도, 지금 말한 탕자의 아들 이야기와 같은 감동을 만날 수 있는 구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우리가 느낀 여러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지금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많은 마음이 생기지요. 지금 신전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고 해도, 여기에서 한 걸음 밖으로 나가면, 이 세상과 접촉하면서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가게 되지요. 전철 을 탔는데 떠드는 사람이 있다든가 하면.
일상생활 속에서도「이 사람과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가 있다」하며 고민을 하게 됩니다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아, 이것을 신께서는 받으시고 싶으시네요. 그 때문에 기다리고 계시네요. 저를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군요」라고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신이시여, 정말로 이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으신 것이네요. 많은 조상님들의 마음을 받아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고, 만약 그것을 신께서 받아주신다면, 신께서는 그 조상님들에게 분명 새 옷과 새 신발과 새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준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자신 안에 계신 많은 조상님들이 더욱 생기가 넘치면 당연히 우리 자신도 더욱 생기가 넘칩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에 쓰임받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그것이 진짜 조레이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런 기도를 통해서 사랑과 빛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신업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나무라지 않으시기 때문에. 신의 사랑이라는 한 점의 빛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얼마 전 예수부활제 및 춘계대제에 대한 어느 신도분의 감상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대제에 참배하시고 감동하여 그 기세로 신앙을 반대하는 자신의 딸에게 대제 회장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그에 대한 딸의 답장은「종교만큼 이상한 것은 없다」이것이 답장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 신도분은「그런 말 좀 하지 마라」라고 합니다만, 그때는 대제의 감동으로 기분이 좋았는지「이상해도 좋다!」라고 답장을 보냈다고 적혀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렇다 그렇다, 좋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종교라는 것은 일본에서는 이상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우리는 신의 진정한 사랑을 구하고 있으며, 그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종교만큼 이상한 것은 없다고 하면 미국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실상 미국에서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면 대통령도 될 수 없습니다. 또는 유럽도, 유럽의 여러 서양 예술은 거의 전부 그 토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상하다면, 관광 갔을 때 그런 작품을 보는 것도 이상하며 교회를 보러 갈 수도 없습니다. 종교만큼 이상한 것이 없다면 유럽 여행도 할 수 없으며, 미국에 가도 만일「뭔가를 믿나요?」「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라고 한다면 세계 기준으로는 신뢰받지 못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왜 신과 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야? 라고 실은 종교를 믿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세상이 신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 그런 요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시 우리는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느껴지는 것에 대해 신께 바쳐야만 합니다.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도「깨어나세요」라고 알려줘야만 합니다.
종교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도 전부 부정하는 건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리 표면은 훌륭하게 보여도 실제로는 계속 돼지사료라도 먹고 싶다는 삶으로 끝나는 인생이 됩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종교를 믿는 것이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신의 사랑」이라는 말은 일본에서는 농담으로 사용되는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우리가 옳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위에서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해도 거기서「이상해도 좋아!」라고 하듯이, 우리 자신이 신의 사랑을 믿고, 신에 대한 신앙을 관철하는 것입니다. 설령 이 세상에서(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우리의 빛이, 크고 넓은 바다 속에서 아주 작은 빛이라고 해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등대와 같은 존재여서 많은 사람들이「아, 저쪽에 빛이 있다!」라고 하며 모여들고 있습니다.
가족관계라든가 이웃관계라든가, 우리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나는 진정한 사랑과 빛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것을 자각하고, 어디에 가든「이 사랑과 빛이 모든 존재에 있기를」이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면서 용기를 가져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틀렸다면 용기는 가질 수 없습니다. 아니, 만약 주위 사람이 옳고, 내가 이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용기는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진리이고 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빛, 세상의 등대가 되어 세상을 비추는 동시에, 비추면 또 모여들기 때문에, 그것을 거느리고 신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대단한 사명이지요. 하지만 오늘의 탕자의 비유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신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신이라는 존재는 완전한 평안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안식이지요, 안식. 오늘 배독한 성서에도 그 신의 안식에「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이라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제4장 1절).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에 생겨나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신으로서는,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너에게 이런 마음을 맡기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확실히 인생은 여러 일이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전 인류의 활동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 속에서 느껴집니다.
「사랑의 날개」의 노래 가사처럼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힘든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몇만, 몇십만 년의 인류의 활동 전부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마음에 져서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이상해도 좋아!」의 정신(일동웃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상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등에는 신께서 계시기 때문에, 라는 그런 정신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정말로 세상의 빛, 세상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기도, 식, 음악」이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맡긴다고 해서「마음」은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가 라고 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지금은 노래도 불러도 되듯이 매우 구체적인 활동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크게 활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이쪽으로 오세요, 함께 걷지 않겠습니까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나무라지 않는 신의 자녀에 대한 광대무변한 사랑, 이것을 항상 기억해내고 용기를 가지고 함께 살아갑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