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세계메시아교 생탄제」 마사아끼사마 성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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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08회 작성일 21-07-27 17:16본문
「세계메시아교 생탄제」 마사아끼사마 성언
2020년 12월 20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금 전「내가 걸어온 신앙생활」영상을 봤습니다만, 명주님께서는 정말로 힘든 인생이었지요. 오오모토와의 만남도, 실제로는 명주님께 있어서 신과의 만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명주님께서는, 메시아로서 새롭게 태어나신 대단한 존재이십니다만, 명주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아니 우리 이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 고통 (첫 부인을 먼저 보내시고, 병, 금전문제 등의 괴로움)을 겪으시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의 자식이 되셨다는 것은, 똑같이 이 세상에서의 괴로움을 안고 있는 우리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 명주님께서 나타내 주시는 길에, 앞으로도 여러분과 함께 걸어가겠다고 강하게 생각했습니다.
방금 전, 나리이 이사장님 인사에도 있었듯이「주기도문」에 대해서입니다. 메시아교의 전 전종자, 전 교회장이 교주님께「주기도문」을 봉송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요청 드리고, 그리고 그것을 교주님께서 받아주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주기도문」을 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메시아교는「기독교와 호응한다. 상당히 기독교와 가까워지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분도 계실 것이며, 한편으로는, 거부감도 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명주님과 「주기도문」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주기도문」이 명주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거부감이 생긴다, 그렇게 느끼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주기도문」을 한다 해도, 명주님과「주기도문」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주기도문」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하면,「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됩니다.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벌써 이 첫 구절부터 「하느님 아버지」와 명주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실제로는 관계가 없기는커녕,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명주님 찬가에「그리스도의 아버지 신이란 주신이심을 알아야만 하노라 신도여 나와 함께」라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버지이신 신, 하느님 아버지는 주신과 같다, 내가 말하는 주신이라는 신과, 그리스도가 말하는 하느님 아버지, 이것은 같다, 그것을 너희들, 나의 신도들은 알거라, 그리고「나와 함께」이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으니, 내가 말하고 있는 신은 하느님 아버지라고 너희들도 인식하거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명주님께서는 성언 안에「하느님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다」라고, 확실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은, 본래 우리가 거부감을 느껴야만 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하늘에 계신 아버지」이것은 명주님과 대단한 관계가 있는 첫 번째 구절입니다.
그 뒤는「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라고 하는데, 이「이름」은, 일반적으로는 신의 존명인 것으로, 이것이「여호와」나「야하웨」라는 이름으로 존칭되고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의 이름인 것이지요. 하지만, 유대교 등에서는「여호와」「야하웨」라는 신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황송한 존재라는 이유로, 신의 이름 자체가 아닌 그냥「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명주님께서는,「메시아교의 신, 이것은 기독교의 여호와입니다」라고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대상은「여호와」이며 「야하웨」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대광명」이라든가 신체를 배례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이신「여호와」를 배례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만, 본래 우리는「여호와」「야하웨」를 대상으로 제전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이 구원의 복음을 알게 되어 신도가 되어,「대광명」신체를 받기를 바라고 있지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신체 앞에서 참배를 하고, 신 여호와를 우러르길 바라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대상인「여호와」「야하웨」의「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라고 하는 것은, 거부하기는커녕, 본래 우리의 마음도, 이 말 그대로의 마음입니다. 분명히 이 말 그대로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나라가 오게 하시며 뜻하시는 바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이어집니다만, 이 천상의 번영이 지상에서도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명주님 신업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요?
야주전환에 의해, 영계에 이미 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이 지상에도 투영시켜서, 천국이라는 멋진 세계를 이 지상에도 만들고 싶다는 것이 명주님의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찬가에도「꽃피어 웃고 온갖 새들의 노래 천국낙토의 그 모양 이 땅에 옮겨놓는 신업」라고 있습니다. 천국낙토라고 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이 지상에 옮겨놓은 것이 나의 일이라고, 그런 신업을 나는 하고 싶으시다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가 오게 하시며 뜻하시는 바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것도 명주님과 큰 관계가 있는 말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중대한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여기「하늘」과「땅」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우리는「뜻하시는 바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할 경우, 나는 지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천국에 있는 것인가, 어느 쪽입니까? 라는 이 질문이 있지요.
나는「땅」에 있으면서, 이 지상에도「나라가 오게 하시며」, 뜻하시는 바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는가, 아니면 이미 뜻하시는 바가 이루어지고 있는 천국이라는 곳에 나는 있는 것인가? 어느 쪽입니까? 이것은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만, 우리는 사실은, 천국 쪽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우리의 진짜의 존재가 있어서, 우리는 그곳에 마음을 향해야만 한다고, 명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교 구원의 특이성」중에서, 명주님께서는 남을 천국으로 구원하려면, 먼저 자신이 천국에 올라 천국 인이 되어 구원해 올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는「천국으로 세상사람 구제할 소망가지고 내가 먼저 천국의 사람 되려 하노라」 아름다운 천국으로 세상 사람을 구원하고 싶다고 생각하고「내가 먼저 천국의 사람 되려 하노라」입니다. 「내가 먼저」라는 것은, 먼저 명주님께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이며, 너희들 신도도 나의 다음으로 천국의 사람이 되거라,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나라가 오게 하시며」「뜻하시는 바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것은, 뭔가 천국이라는 위쪽에 있는 그런 멋진 세계가, 내가 있는 지상에도 오면 좋겠다. 라고 바라는 것과는, 사실은 다릅니다.
명주님께서는 이「먼저 천국에 올라가서 사람을 구한다.」라는 것은「모든 종교와 다른 점으로 그것은 오히려 반대이기 조차 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기독교도 포함한 모든 종교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면, 그것은 지상에서, 어쨌든 천국이 오지 않을까,「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상에 있으면서「천국이 오기를 바라는」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천국에 있는 천국 인이라는 입장에서, 지금의 이 아름다운 천상의 번영이, 지상으로도 가져와지기를 라고 생각하고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는 부분을 봉송하는 것입니다.
「뜻하시는 바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제가 있는 이 지상은 혼돈스럽습니다. 그러니 뭐든 보다 좋아지길 바랍니다.」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천국에 있는 입장으로서 생각하고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도, 이 지상에서 위쪽을 향해「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천국에 있기 때문에, 천국에 계시는 아버지를 마주보고「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는, 실은 우리가 매일 봉송하고 있는「기도의 말」도「신이시여 당신은 살아계십니다」라고 지상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안에 살아 계십니다.」라는 것도, 자신은 지상에 있고, 지상에 있는 자신 안에 신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가 신께 받고 있는 혼은, 천상에 있습니다. 그 안에 신께서 살아계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우리의 혼이 존재하는 천국에 먼저 올라가, 그 입장으로서「제 안에 살아 계십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모든 이에게 있도록」라는 것도, 우리가 지상에 있으면서,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이 신의 은혜에 받길 바란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는 천상에 있는 입장으로서「이 천상에서의 은혜가 세상 사람들에게도 있기를 바란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신의 그 뜻대로 써 주십시오.」 이것도 우리가 매일 지상에서 하는 일, 그 일에 대해 신의 뜻대로 써 주시길 바란다는 것도 확실히 있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신께서는 천상에서 인류구제를 진행하고 계시기 때문에「그 하늘의 신업에 써 주십시오.」라는 것이 「신의 그 뜻대로 써 주십시오.」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말」도, 본래는 천상의 입장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 20억명의 기독교 신도의 99.9% 사람들은 「주기도문」을「천상의 입장에서 기원하는 기도」로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주기도문」을 그런 마음으로 올리는 것은, 전 세계에서, 메시아교 신도인 여러분뿐입니다. 때문에「주기도문」을 올리는 것으로, 뭔가 기독교에 가까워져 버린다. 라는 것은 전혀 아니지요.
그리고「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뒤에「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이어집니다만, 이것은 물론, 우리는 매일의 양식, 이것도 어쨌든 신으로부터 받고 있지요. 매일의 양식을 어떻게든 받고 싶다, 물론 그것도 신께 부탁드리는 것입니다만, 사실은「영주체종」이기 때문에, 체의 양식이 있듯이, 영의 양식, 생명의 양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정말로 양육하고 있는 것은, 그 영의 양식인데, 이것은 기독교 신도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에도 신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진정한 양식이라는 표현도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 메시아교 신도는, 그저 매일 신께「양식을 주십시오,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영의 양식의 의해 양육되면서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가 하면, 우리에게는 그 목표가 확실하게 있습니다. 그것은「신의 자식인 메시아로서 새롭게 태어난다.」라는 목표입니다. 우리는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양육되고 있으며, 그리고 신으로부터 영의 양식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절대로 이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할 때, 「아. 신이시여. 당신의 자식인 메시아로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영의 양식을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양식도 받고 싶지요. 그래서「메시아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신업에 쓰임받기 위한 현실의 양식도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마음으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도들은 이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만일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부분을, 제가 말씀드린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이것도 지구상에서 메시아교 여러분만이 하는 것이 됩니다.
그 다음으로「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있는데, 이것도 신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셨다, 신께서는 우리 주위 분들을 모두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 자신은 어떡하겠는가? 신의 용서를 받겠는가? 받지 않겠는가? 이 문제가 남아 있다. 라고 그것을 신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서「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가르침 받고 있듯이「나」라는 존재 안에, 전 인류와 그 선조님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우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주기도문」의 이 부분은, 지금의「맡긴다.」라든가「상념의 실천」인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매일 많은 마음이 생기지요.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마음이 아니라,「나」에게 연결된 조상님의 마음, 전 인류의 마음이 와서 그렇게 느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미 모든 것을 용서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에 사과할 필요는 없다」라고 거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신께「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이 부분을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누구라도 예외 없이 많은 것들을 느끼고 생각합니다. 미워하는 마음, 저 사람을 혼내주고 싶다는 마음, 초초한 마음 등, 여러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전 인류와 그 선조의 마음이며, 그것이 내 안에 와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와 있습니다. 그것을 신께「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구원의 신업이 된다, 라는 것을 기독교 신도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이것은, 그저 용서를 바라는 기도의 말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는 구원에 이르는 말입니다. 전 인류, 전 인류의 선조의 구원에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 부분을 기도드리는 것도, 메시아교 신도인 여러분뿐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것은 당연히 이 지상에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없도록 저희를 지켜 주십시오. 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만,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사실은「하늘」에 속해 있는데, 이 지상의 유혹이 강하기 때문에「땅」의 것들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지요. 텔레비전 이라든가, 지상의 여러 것들에 의해, 자신의 마음이「땅」에 끌려 내려와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땅」의 시험「땅」의 유혹에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저의 진정한 거주지인 천국에 저의 마음을 항상 두게 해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기독교 신도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만, 만일 생각한다면 그 분들은 우리와 함께 걸어가야만 할 분들이 아닐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아멘」, 이것은「그리되게 하소서」라는 의미인데, 이 말도 지상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에 있는 존재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주기도문」에 관해 지금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을 기독교에서는, 전혀 이런 마음으로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것을 기독교 사람들에게 말할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 요는「천양지차」입니다. 기독교 신도가「주기도문」을 올리는 마음과, 우리가 지금 교주님을 통해 가르침 받고 있는 명주님 마음 안에서 올리는「주기도문」, 이것은 이미「천양지차」입니다.
하지만 저는 2천 년 전, 예수가 최초에 이「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하사하실 때에 담으신 마음, 바라셨던 마음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그 마음이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2천 년간 계승되지 않은 채로 왔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도가 2천년이나, 이 기도를 계승해 와 주신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예수가「주기도문」에 담으신 진정한 바람은, 오늘날까지 계승되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께서 예수를 통해「주기도문」을 인류에게 맡기신 진정한 바람, 그것을 지금, 명주님 마음을 받으시는 교주님을 통해, 우리가 알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기독교와 호응한다.」라든가, 「메시아교는 상당히 기독교에 가까워진다.」라고 하면, 지금까지의 명주님 신앙은 어떻게 되어 버리는 건가. 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만,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신께서는 자신의 진정한 바람을 지금, 우리 메시아교에 맡기시려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메시아교는, 실은 기독교 신도를 깨어나게 해야만 합니다. 아니, 이것은 그렇게 잘난 척하며 말할 일은 아닙니다만,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기독교 신도를 깨어나게 하여, 기독교에 대혁명을 일으키고, 그리고 기독교 신도들을 진정한 의미로 구원하고,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여러분에게(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주님께서는「기독교를 구한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기독교 신도는 전부 메시아교의 신도가 된다고 하십니다. 꿈같은 이야기 같지만, 꿈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그 날이 온다고 믿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와 전혀 다른 활동을 하고 있으면, 기독교 신도가 갑자기 메시아교 신도가 된다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때문에 기독교 신도가 하는「주기도문」(할렐루야 코러스도 그렇습니다만) 그런 것을 통해 지금, 신, 예수, 명주님께서 기독교 신도들을 어떻게든 진정한 길로 인도하고 싶으셔서, 이「주기도문」을 하나의 실마리. 계기로 하셔서, 기독교 신도의 구원과 인류의 구원을 진행해 가고 싶으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주기도문」을 하는 것에 대해, 전종자와 교회장의 총의로 그렇게 되었다, 교주님께서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런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은, 명주님께서 우리에게「「주기도문」을 하거라.」「기독교를 구하기 위해 하거라.」라고 생각하고 계시고, 그리고 또「너희의 신앙을 위해서도 하거라.」라고 바라고 계시지 않는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흐름은 생겨날 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 메시아교의「주기도문」은「진정한 의미로 기독교 신도를 구하기 위한「주기도문」이며, 또「자신이 천국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기 위한「주기도문」」이며, 또 자신에게 맺어진 선조를 포함한「우리들」의 그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조상님을 신께 중개하고 구원하기 위한「주기도문」이며, 또 신의 자식이 되기 위한 영과 체의「양식」에 의해 양육되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메시아로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주기도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명주님께서, 여러분 메시아교 신도에게 맡기신 마음에는 정말로 강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기도문」을 하고, 차츰 기독교에 가까워지게 되면 어떻게 되어 버리는 걸까 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런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인류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한다, 기독교를 진정한 의미로 구하고, 그리고 인류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여러분의) 사명이 아닐까요?
만일 기독교 신도들이 우리가 하는「주기도문」의 마음을 느끼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는 것은, 실은 자신 마음에 조상님의 마음이 와 있는 것이며, 그리고 구원을 구하고 있다, 이 마음을 신께 맡겨야만 한다」라고, 기독교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깨닫는다면,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리고「양식」도 「메시아로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양식이다」라고 느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온다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구원을 위해 이「주기도문」을 올리고, 그리고 어떻게든 명주님 기대에 응답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주기도문」을 한다면, 방금 전의 명주님의「내가 걸어온 신앙생활」에도 있었지만, 타오르는 마음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는 타오르는 마음으로 (물론, 차분하게 해야 합니다만) 「주기도문」을 봉송하고자 합니다.
그런 책임이 우리에게는 있으며, 또 그런 대단한 일에 우리는 관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큰 자긍심을 가지고 봉송하는 것입니다. 책임과 자긍심, 여러분께서 그 책임과 자긍심을 갖고, 이「주기도문」을 해 주시길 바라며, 저 또한, 여러분과 그런 마음으로「주기도문」을 하고자 하오니,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