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음식~ 메-슈사마의 바람을 받고~」마사아끼사마 성언 2023년 9월 월례제 및 3대 교주님 십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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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60회 작성일 23-11-22 00:41본문
9월 월례제 및 3대 교주님 십년제 마사아끼사마 성언
2023년 9월 1일
「새 시대의 음식~ 메-슈사마의 바람을 받고~」
이번에 저는「식(食)」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것들에 대해 말씀을 드린 것은, 우선 무엇에 관해서든 여러분이 날마다 배독하는 성지(聖旨)에 있는「전신전령」이라는 말을 받는 것의 엄중함, 어려움, 불가능함에 대해 여러분이 알아주셨으면 해서입니다.
우리는 사실 전신전령을 바칠 수 없는데도, 전신전령이라는 말을 자신 형편의「전신」으로 그 말로서 신께 맹세하고 있는 그 모습을, 함께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식(食)에 대한 것을 이야기했을 때「만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식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각자의 인생도 가정 상황도 취향도 다르며, 거기에 구체적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이런 식사를 해야만 한다」「이것은 먹으면 안 된다」「고기는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라는 계율적인 사상이 확대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일절 그런 것은 바라지 않으며,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기본적으로는 일식을 먹습니다만, 양식도 먹습니다.
전 세계의 다양한 음식도 먹습니다. 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 것도 아니며 생선을 먹을 때도 있습니다.
즉,「이것은 먹어도 좋다」「이것은 먹으면 안 된다」라는 발상은 제 안에서는 전무하며, 먹고 싶은 것을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명주님도 마찬가지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물론 정화 때는 채식을 하셨다는 사실은 있습니다.
식(食)이라는 주제가 지극히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여러분 안에 음식에 대해 위와 같은 계율적인 마음이 생겨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제 책임입니다.
저는 교단으로부터 여러분의 몸 상태에 대한 다양한 보고를 듣는 중에서, 암에 걸려도 명주님께서「암은 육식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모르시는 듯한 모습이나, 또 실제로 명주님께서는 신 시대의 음식에 대해 말씀해 주고 계시며, 미륵의 세상은 채식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조금은 마음 한구석에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고도 생각하여,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여 주시길 바랍니다.
명주님 성언은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영원히 신성하고 게다가 복종해야 할 것이므로 부정할 방법은 없습니다.
「명주님께서는 생선과 채소의 균형 잡힌 식사를 말씀하셨다」라는 등의 사실이 아닌 말을 가지고, 자신들의 형편에 좋도록 명주님 마음을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주님의 음식에 대한 최종적인 마음은 틀림없이「채식」이며, 여러분이 어떤 식사를 하든지 간에, 이 사실에는 적어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제가 말할 것까지도 없는 일입니다만, 여러분께서는 부디 지금까지와 같은 식생활을 계속해 주시길 바라며, 결코 이것은 먹어도 좋다, 이것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쪼록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만약 병에 걸리거나 뭔가 몸상태가 좋지 않을 때, 혹은 암에 걸렸을 때 등, 마음 속 어딘가 한 구석에 제전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구나 라는 것을 기억해 주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린 식에 대한 명주님의 성언을 들으시고, 앞으로 나는 되도록이면 육식은 먹지 않으려고 하거나 채식으로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완전히 자유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의 구체적인 식사 내용에 대해 저는 일절 개입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장 두려운 것은, 분명 우리는 이미 해방된 계율신앙이며, 식(食)이라는 주제가 구체적이기 때문에 계율화하기 쉬운데, 제가 원하는 방향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명주님에 의해 계율신앙에서 이미 해방되지 않았나요?
연설대가 새로워졌네요.
4년 전 교주님과 함께 포르투갈에 갔을 때 이런 투명한 연설대였는데, 그때 일본에서도 이런 걸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 심플해 보이지만 이것이 사실 구상부터 3, 4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 쪽에서 이미지를 대략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종자 분이 홈 센터에서 산 것을 사용해서 시제품을 몇 개나 만들어, 여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정면에 교단 마크를 붙이면 어떨까 하며, 최종적으로 완성된 모형을 바탕으로 업자가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보이지 않지만 여기 원고를 올려놓는 곳에 영어로「세계 메시아교(World Church of Messiah)」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화려하게 말입니다. 멋있나요?
투명해서 뭔가 알몸 같은 느낌입니다.(일동웃음) 지금까지는 연설대로 가려졌는데 뭔가 약간 허전합니다.
연설대도 새로워지고 명주님께서「계속 새로워져라. 계속 전진하라」라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신전령」이라는 말이 있지요. 성지(聖旨)에도「전신전령을 바쳐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있습니다. 이「전신전령」이라는 말에 대해 최근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통 생각하면 전령의 쪽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신은, 나는 전신을 바치고 있습니다, 몸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신은 가능합니다 라고 생각하는데, 한편 전령은 좀처럼 어렵다고 저도 생각했습니다만, 정말 그럴까 하는 것을 최근 강하게 생각합니다.
전령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맡기고 있다든지, 신을 믿습니다, 전령을 바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말하면, 듣는 쪽에서는「아, 그렇습니까?」「훌륭하다」라고 하게 되지요.
그런데 전신이라고 하면 결국 몸을 쓰는 거니까 이 세상의 모든 생활이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른바 의식주의 모든 것도 당연히 포함되지요.
그렇다면「전신을 바친다」라는 것은, 의식주도 포함한 자신의 생활 전부를 신, 명주님께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함정은「나는 전신 쪽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라는 것인데, 요는 형태만 하게 되면, 마음으로는 신께 대해 무례한 생각을 해도 된다든가, 보이는 것만을 하고 있으면 나는 신앙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라는, 그런 함정은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전신」이라는 것은 의식주 전부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치라고 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꽤 힘든 점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의식주라고 해도 종교적으로는 특히「식(食)」이라는 것이 굉장히 큰 주제이지요
예를 들면 이슬람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돼지는 먹으면 안 됩니다. 돼지 이외의 고기 처리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은데, 제대로 절차를 밟아 처리된 것이 아니면 먹을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알코올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은 돼지고기와 알코올은 안 됩니다.
또는 유대교는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나누어, 이것은 먹어도 된다, 이것은 먹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이 구약성서등에도 자세히 쓰여 있어서 유대교 사람들은 그것을 지킵니다.
그럼 이런 것은 세계 종교뿐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일본에서는 불교입니다. 불교의 정진을 위한 요리라는 것은 동물성은 전부 안 되기 때문에 고기, 생선, 전부 안 됩니다. 부추, 파, 마늘이라든가 그런 것도 안 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계율적인 식(食)의 본연의 자세라고 할까요, 그것에서는 해방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렇다고 해서 음식이 우리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냐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제가 방금 말한 것과 같은 음식의 실천으로 생각하는 것은, 일단 우리는「신」이라고 하면 천상의 신이라는 이미지가 굉장히 강합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천상을 관장하시는 분이라는 것.
하지만 사실은 신이라는 존재는 지상의 신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지상의 왕이시기도 합니다.
그것도 이야기로서는「신께서는 지상의 신이기도 하시다. 대단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께서 지상의 왕이라는 것은, 나의 지극히 구체적인 생활에까지 신께서 임해 오신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형편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예를 들면 이슬람이나 유대교, 불교 분들은 적어도 신이라든가 영적인 존재가, 하늘의 신만이 아니라 땅의 신이기도 하신다는 것을 그러한 음식의 실천을 통해 체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신앙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은 의식주라는 매우 구체적인, 상당히 구체적인 것까지 신의 마음이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은 신앙, 이 세상 일은 이 세상 일로서, 이 세상 일은 나 좋을대로 하며 그것을 신께서는 허락해 주시는구나, 정도의 감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감각입니다. 신께서 지상의 왕이라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이나 유대교 분들이 이렇게 음식의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은「전신 전령을 바친다」라는 신앙을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참고가 되는 점도 있지 않을까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명주님께서도 식(食)에 대해서는 많은 말씀을 하셨지요. 명주님께서는 계율이 어떻다든지 어떤 음식이 맑다든지 맑지 않다든지 그런 관점이 아니라 건강입니다, 건강. 「병빈쟁 절무의 세계를 만든다」이기 때문에.
명주님께서는 건강이라는 관점에서 음식에 대해 많은 성언을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최근 그러한 성언들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남겨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암.
이 암에 대해 명주님께서는, 쉽게 낫습니다, 암은 육식병이니까 고기를 끊으면 쉽게 낫습니다 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고기를 끊고 채소를 더 먹으면 암이라는 것은 낫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채소라고 해도 어떤 종류의 채소냐 하는 것은 물론 있겠지만요. 채소가 좋다고 샐러드, 생채소만 먹으면 생채소는 수분이기 때문에, 몸이 차츰 식어버려 정화력이 약해지므로 암이 좀처럼 낫지 않는다는 것도 있습니다만, 오늘은 그 이야기는 접어두겠습니다.
이렇듯 암에 대한 것도 있으며, 또 명주님 재세 당시에는 육식 어느 정도와 채소 어느 정도 먹는 것이 몸에 좋다는 것도 있었지요.
5할 5할이라든가 3할 7할,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육식」이라 하면, 우리는 소와 돼지를 생각하는데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육식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선과 닭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생선입니다. 그러니까 명주님께서는 기본적으로 당시에는 생선과 채소를 주로 하는 식사를 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식은 있습니다. 곡물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육식이라고 생각하는 소나 돼지는, 이것을 명주님께서는「짐승의 고기」라고 부르시고, 이것은 이른바 피를 더럽힌다, 흐리게 한다고 하여 되도록이면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먹는다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하라고 그렇게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균형 잡힌 식사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시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명주님께서는 최종적으로는 이것은 유명한 성언이기 때문에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버나드 쇼라는 영국 작가가 채식을 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채식은 매우 좋다고 하시며「미륵 세상의 하나의 조건은 채식이다」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저는 가정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으로, 만약 그 시대의 교주님이 지금 이미 미륵의 세상이 왔다, 명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채식의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입니다.
게다가 명주님께서는 버나드 쇼라는 외국 사람을 예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기에, 이것은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 세계 신도들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러니까「신께서는 지상의 신이시기도 하다.」「전신 전령을 바칩니다.」라는 이것, 이것은 말로서는 대단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시대의 교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고, 그야말로 우리 생활의 정말로 구체적인 부분에 신께서 임해 오셨을 때, 우리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까 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에「곤란하다. 지금 생활을 바꾸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든다면, 우리는 분명 전령은 바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신을 바친다는 것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 저는 어디까지나 가정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해서.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일까지 명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이상, 그곳에 정말 신께서 임해오셨을 때「지금까지의 생활과 식생활 바꾸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매일 성지(聖旨)에서「전신전령을 바쳐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은 큰일인 것입니다.
성지(聖旨)를 통해서 매일 성스러운 맹세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할까요, 성지(聖旨)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뜻입니다. 그것을 지킬 것을 매일 맹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전신전령을 바쳐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발하고 있는 이상, 만약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그 시대의 교주가 임해 왔을 때에(예를 들면 미륵의 세상은 이미 왔다 라는 것을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 때에 우리의 신앙이 정말 전신전령을 바쳐 나아가고 있는가 어떤가가 드러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영계는 문제없지요. 「맡기고 있습니다. 이렇습니다, 신을 믿습니다. 용서, 죄인」, 그러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전부 문제없습니다. 이 세상일이 아니며, 자신의 생활을 조금도 바꾸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아, 훌륭한 가르침이네요. 회개합니다.」 이것은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전신」이라는 것은 꽤 힘듭니다.
또 지난 조령대제 때에도 말씀드렸듯이「병빈쟁 절무의 세계를 만든다」라는 것은 가공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병과 가난과 다툼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모토입니다.
당연히 제일 첫 번째는, 명주님 시대부터 변함이 없습니다. 즉, 조레이입니다. 조레이. 이것이 병빈쟁 절무의 세계를 만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
그리고 우리는 진정한 조레이를 가르침 받고 있지요.
이것은 실천해야 합니다. 손을 드는 조레이 때는 계속 했지요.
옛날에는, 이른바 손을 드는 모습만 보이고 있으면, 그것으로「당신은 신앙이 있네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형태로는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신의 시각으로는 더 엄격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 시대에는 손만 들고 있으면「저 사람은 매일 조레이하는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했으며, 또 실천하는 본인도「나는 신앙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주님께서「조레이의 신의 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다」「그 조레이로 전 인류의 마음에 생겨나는 모든 마음을 비춰서 맞아들이고 계신다」라는 진정한 조레이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신이시여, 지금 당신께서 조레이 손을 들어주고 계시네요」「지금 생겨나는 마음, 이 비추고 있는 모든 것과 함께 당신의 빛 속으로 가겠습니다.」라는 마음을 바치는 것, 이것은 실천해야 합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어떻게도 되지 않습니다. 「손을 들지 않아도 되니까 조레이는 이제 안 해도 된다」가 아닙니다. 사실은 옛날 이상으로 해야만 할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옛날에도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조레이를 했었지요.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그렇듯 명주님시대부터 병빈쟁 절무의 세계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조레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병으로 누워있든, 손이 없는 사람이든, 죽을 정도의 정화를 받고있는 사람이든, 누구나, 언제든지, 24시간 실천할 수 있는 진정한 조레이를 지금 우리는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병빈쟁 절무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으로서는, 명주님께서는 조레이 외에는 약과 식사였지요.
약과 식사. 이것이 피를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식사라고 할까요, 육식입니다.
소와 돼지, 이것이 피를 더럽힌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교주님의「만물은 모두 신께서 만드셨다.」 분명 이것은 중요한 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약을 반드시 먹어야 하는 상황에 계신 분도 계시며 그리고 명주님 성언과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중에 교주님께서「만물도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자 모두 신께서 만드셨다」라고 교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요도 없는데 적극적으로 약을 먹는다든가 서양의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과는 당연히 다릅니다.
만물은 신께서 만드셨다, 그럼 매일 맥도날드 먹어도 되지 않는가, 술을 계속해서 마셔도 되지 않는가, 불섭생을 얼마든지 해도 된다 라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저는 전종자분과 신도 여러분들의 여러 몸 상황에 대해서, 교단 쪽으로부터 매일 같이 보고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교주님과 함께 듣고, 명주님께 그 상황을 보여드리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구체적으로 뭔가 한다 라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런데 듣고 있으면 암도 정말 많습니다. 전종자 분의 암이나 신도분의 암, 정말 많습니다.
당연히 저는 서양의학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일절 아닙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이미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육식의 해, 육식이 암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할까요,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히려 서양의학의 항암제만이, 서양의학만이라는(지금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만)것을 듣는데, 하지만 저는 아까부터 언급하고 있는 명주님 성언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제 안에서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정화는 신의 사랑. 확실히 그것은 압니다. 알지만, 하지만 저로서는 신도 여러분이 가능한 한 건강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뭔가 그런 보고를 듣는 일이 거듭됨에 따라,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물론 저는 서양의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명주님께서는 분명히 부정하고 계셨지만) 서양의학의 필요성도 있으며, 그것에 의지하고 계신 분들도 많이 계신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식(食)에 대해서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이런 것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조금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명주님 때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왜 지금 그다지 주목을 받지 않게 되었냐면, 물론 경륜의 추이는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뿐만이 아니라 역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전신전령을 바친다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 이것입니다.
명주님 시대의 신도들은, 서양 의학도 약도 완전 배제하고, 먹는 것에 대해서도 말 그대로 명주님께 전신전령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가장 순수한 신앙이지요.
단, 이 신앙은 매우 괴롭습니다. 전신도 바쳐야 한다는 것은 힘이 듭니다. 내 생활과 내 주변의 일은 내 자신이 결정하고 싶은 경우가 있으니까요. 또 여러 면에서 장벽이 높지요, 가족이 신도가 아닌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등등.
그러면 결국 몸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성언은, 우리에게는 형편이 좋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 성언은 없는 편이 좋다고 되어버려, 결국 좋아하는 것을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먹는다, 이 성언만이 살아남아서 명주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먹으라고 하시니까 무엇을 먹어도 좋다고 되어 있었으며, 그렇게 되었습니다.
단 실은 이것도 꽤 어렵습니다. 명주님께서는 정말 배고플 때 먹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는 세끼 먹는 것에 얽매어 있기도 하여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기도 하지요. 자신은 그것을 원할 때 먹는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정말로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건 꽤 어렵습니다.
이런 성언도 본래는「명주님의 뜻안에서」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결국 자신이 편한 대로 해석하고 있으니까요.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명주님께서 식(食)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먹어도 된다는 것과 육식을 조심하라는 것,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중심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원할 때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 역시 내 안에 신적 존재가 계시기 때문에, 그 존재가 무엇을 원하고 계실까 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듯 이번에는「식」에 대해 거론했습니다만, 이 세상 일로 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전신전령을 바쳐 나아간다고 해도, 이것은 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 집에 명주님께서 오셔서 식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씀하시면 바로 변명을 해버리거나 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전신」은 바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성지를 배독할 때「전신」부분을 빼고「전령을 바쳐」라고 한다면 좋을 텐데요(일동 웃음).
하지만 사실은 체보다 영의 쪽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전신조차 바치지 못하면, 사실 전령도 도저히 바칠 수 없습니다. 그렇듯 전신전령이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최근 강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조금 바뀝니다만, 어제까지 아이들이 여름방학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는데, 여름방학 처음 무렵에 차로 어딘가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이미 꽤 어두워진 시간이었습니다만, 6살이 된 큰딸이「해변에 가고 싶다, 해변에 가고 싶다」라고 계속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둘째 딸은 올해 3살인데, 작년에 해변에 갔을 때 파도가 무서워서「싫어 싫어」해서, 둘째에게는 해변에 특별히 좋은 기억이 없는데, 큰 딸이 계속해서「가고 싶다」고 하니까, 둘째 딸도 작년 일은 잊었는지 바다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지금부터?」「지금부터?」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라고 해도 벌써 저녁 7시쯤이었기에 주위는 어두웠습니다.
큰딸은 이제 6살이라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가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6살 정도면 시간의 감각이 꽤 있기 때문에. 그래서 다음에 데려고 가 준다고 하니「아싸~」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둘째 딸이 갑자기「지금부터?」라고 해서 다 같이 웃고「지금은 못 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아이를 재운 후, 문득 든 생각이 그것은「지금부터?」라고 말했던 둘째 딸이 귀여워서 모두 웃었습니다만, 그런데 뭐랄까, 그 순수함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시간이나 주변 상황 상관없이 지금 바로라도 가고 싶다는 아이의 순수함, 그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우리 신앙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교주님으로부터「천국에 가세요」라는 말을 듣지요. 그것은 명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
「천국, 지금 갈 수 있습니다」「지금 갈 수 있습니다」라고 들으면, 이 둘째 딸의 정신이라면「네, 가겠습니다.」라고 할꺼라 생각합니다. 「지금부터?」「지금부터 갈 수 있나요?」「바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며 기쁘게 갈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지금 이미 갈 수 있으니까요.
확실히 어릴 때는 좋습니다. 하지만 성장하면 꽤 어려워집니다. 둘째 딸 나이인 3살 정도는 좋았는데 6살 정도가 되면 이제는 알게 됩니다. 지금은 갈 수 없다는 것을. 수영복도 없고 수건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있기 때문에 극복해야 할 문제는 시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렇듯 차츰 어른이 되면 우리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 다 같이「좋아 그럼 해변에 가자」라고 하고 실제로 가면 옷도 엉망진창이 되고 힘들지요.
그래서 오늘 배독한 명주님 성언(「재차 베르그송에 대하여」 1951년 7월 18일)에도, 아이가 순간적으로 하는 말로 어른이 배우는 것이 있다 라는 말이 있었지요.
반대로 어른이라는 것은, 차츰 여러 기성 학문, 즉 꾀가 생겨서 그것이 막대기처럼 굳어 버립니다. 또 애초에 조상 대대로 수십 년 수백 년씩 이어져 온 막대기가 우리 안에 있고, 그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막대기를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다고 그렇게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주님으로부터「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안에 조상 대대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사고방식이 있어서(그것은 막대기나 또는 성서에서「들보」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그로 인해서 제대로 그것을 파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냐면, 우리 안에「아니,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라든가「나 같은 사람이」라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해변은 바로 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천국은 이미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명주님께서는 우선 천국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지금 바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아니,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아서」라든가「나 같은 사람이」「이런 신앙 실천을 하고 나서가 아니면 천국인이 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을, 우리는 계속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배독한 성서 (「마태복음」 제18장 1절~14절; 7장 1절~14절)에서도 예수님께서「이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는「아, 좋다」라고 생각하면 바로입니다. 제 둘째 딸 예처럼, 작년에는 해변을 좋아하지 않았지만「언니가 저렇게 말한다면 좋은 곳일 것이다」하여 바로 가고 싶어합니다. 그 아이의 솔직함은 대단하지요. 아니, 제 둘째 딸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전반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마음의 솔직함.
반면 어른인 우리는 어떤 일을 생각함에 있어,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것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달콤한 이야기가 있을 리 없다든가.
그래서 명주님께서도 막대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모두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자신에게 막대기가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막대기에 의해 천국에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명주님께서는「찰나의 내가 되라」「그 막대기를 제거하고 찰나의 내가 되라」라고 말씀하시고, 성서에서도「눈에서 들보를 뽑아내면 밝히 본다」또는「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것이, 틀림없이 간단하게 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쓰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가 일대 문제인 것입니다. 막대기를 어떻게 없애느냐? 어떻게 마음을 고쳐먹을까? 어떻게 눈의 들보를 없애느냐?
성언이나 성서에는 간단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하지만「막대기를 없애고 찰나의 내가 되어라」 「아, 그렇습니까?」라고 쉽게 되나요? 쉽게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막대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명주님께서는 먼저 천국에 올라가 천국인이 되어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도 쉽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알겠습니다, 그럼 천국에 가겠습니다.」라고 그렇게 쉽게 되는건가요 라는 느낌이지요.
그리고 이「먼저 천국에 올라간다」는 것은, 그것을 설하고 있는 성언 제목도「본교 구원의 특이성」이기 때문에 메시아교 신도, 성도의 전제는「먼저 천국에 올라간다」는 것, 그것이 가장 먼저 오고,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저는 계속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봉송한 명주님 찬가의 여섯 번째. 이것은「몸도 영혼도 신의빛-으-로 맑혀져-서 천국에-사-는 내가되었도-다.」「몸도 영혼도 신의 빛으로 맑혀져서」천국에 사는 내가 되었다 라는 찬가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저는 쭉 아무것도 없이 어쨌든 먼저 천국에 올라간다 라는 것이 시작, 전제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전의 대전제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먼저 몸도 영혼도 신의 빛에 정화되지 않으면 천국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까요, 명주님께서는 몸도 영혼도 신의 빛으로 맑혀져서 천국에 들어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내가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듯 이 찬가의 대단한 부분, 첫 번째 포인트는「먼저 천국에 올라간다」가 명주님 신도의 전제라고 생각했는데 그 전제 앞에 대전제가 있었다는 것.
또 하나의 대단한 포인트는「명주님을 맑히는 존재가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신의 빛」이라고 표현되어 있지요. 조레이는 명주님의 빛이다 라고 생각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신의 빛」은 명주님의 몸도 영혼도 맑히셨기 때문에 적어도 명주님보다 위의 존재입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은,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신의 빛」이라는 것은 유명한 성언「광명여래」에도 적혀 있듯이, 죄장소멸의 빛, 죄를 없애는 빛이기 때문에, 즉「용서의 빛」이라는 것.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명주님께서는 적어도 자신의 몸도 영혼도 죄로 얼룩져 있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명주님께서는 당신을 죄인이라 여기시고 신의 용서의 빛에 의해 맑히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명주님 찬가는 대단한 찬가입니다. 방대한 양의 명주님 성언 모두를 근거로 하여 이 찬가를 파악하면, 이 찬가의 대단함이 매우 가슴에 와 닿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막대기를 없앤다든가, 들보를 뺀다든가, 마음을 바꾼다든가 하는 것은, 먼저 너의 몸도 영혼도 신의 빛으로 맑혀라 라는 것입니다.
「맑힌다」라는 것은 죄라든가 더러움을 정화해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도 명주님과 마찬가지로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리는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명주님께서 가신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인이며 몸도 영혼도 맑혀진 내가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그렇게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 때문에.
명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죄인이고, 당신의 영혼뿐만이 아니라 몸도 라고 하신 것은 그 몸도 그 안쪽에도 전부가 죄투성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신의 빛으로 맑혀지는 것이 가능하셨으며 또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도 가능하셨습니다.
아이 때는 쉽고 좋습니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지만 어른이 되면 우리 조상 대대로의 온갖 사고방식이 나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조상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조의 총합체이며 조상님들과는 한 몸이기 때문에.
그리고 죄를 맑혀주는 존재를 우리는 가르침 받고 있지요. 속죄주입니다. 「속죄」라는 것은 죄를 없앤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죄의 목적이니까요. 게다가 속죄는 그냥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고 죄를 없애는 것이 속죄입니다. 대가. 왜냐하면 속죄한다는 것은 돈을 지불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없어지는 데에 대가가 지불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뭐냐면 분명 그리스도 예수의 피이지요.
명주님께서는 분명, 예수님이 속죄주라는 것은 분명히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당신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그 부분은 애매하게 하셨습니다. 이천 년의 때가 지나 뭔가 영적 연관이 있다느니, 예수님과 당신 사이에는 뭔가 신의 숨은 뜻이 있다느니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고, 분명하게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그러냐면, 만약 명주님께서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셨다면, 결국「세계메시아교는 그리스도교의 한파이다」로 끝나 버립니다.
하지만 전 인류가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이 구원은 그리스도교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메시아교에 맡겨졌습니다.
신께서는 이른바, 일반적인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경로를 사용하셔서 그 신업을 진행하려 하셨기 때문에, 명주님으로서도 재세 중에 좀처럼 예수님에 대해 확실히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명주님께서는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인류가 본받아야 할 모형을 남기셔야 했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가 찰나의 나가 된다든지, 마음을 바꾸어 천국으로 들어간다든지, 눈의 들보를 없앤다는 것, 그것을 이루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저는 지금 전혀 극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속죄주라면 그 피로서 우리의 대가를 치뤄주셨지요?
대가를 치르셨다는 것은, 지금 우리는 마치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사실은 빚더미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수십억 수백억의 빚을 안고 그것에 칭칭 얽매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자신 혼자의 존재로 살고 있으며 가족과의 관계, 친구관계, 지역에서의 활동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구축해 나가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예수님의 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실은 빚투성이인 것으로 그런 것이 가능한 존재가 우리는 아닙니다.
실제로는 수십억 수백억 정도가 아닙니다. 숫자로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빚입니다. 왜냐하면 사람 목숨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나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채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면 자칫 잘못해 곤경에 빠져 자살입니다. 어디론가 도망가든가. 어째서 그런 것을 보게 되는가, 인류가 경험하게 되는가 하면, 그 정도로 우리는 꽁꽁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예수님이 없으면 나는 꽁꽁 묶이는구나」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지요.
전 인류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안고 있는 부채를 당신의 피로 속죄해 주시고 우리 빚의 대가를 지불해 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맑혀지지 않으며 천국에 올라갈 수도 없습니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 천국에 들어가는 것. 애초에 우리는 이것을 원하고 있었나? 구하고 있었나? 그 문제가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이것을「원할 때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먹는다.」의 문제점과 마찬가지로「구하라」라는 걸 듣고, 뭔가 자기 중심의 소원을 가지고,「그럼 나는 이런 것을 구합니다. 이것을 구합니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신께서는 주지 않으시는구나 가 되는 걸까요?
그것이 아니라 신의 마음에 맞는 것을 우리가 구한다면 그것은 주어집니다 라는 의미이지요. 명주님 찬가「기묘하도다 아—기묘하도다 소원하는일」에도 있지 않습니까(「기묘하도다 아-기묘하도다 소원하는일 올바르면반드시 들어주심이니라」).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소원하는 것이 올바르면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이라고 말씀하시니까 맥도날드 먹고 싶다, 이것 먹고 싶다, 저것 먹고 싶다, 그래도 된다 라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라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려라 도 있지요. 우리는 애초에 문을 두드리려 하는 걸까요?
천국에 올라가라, 돌아오라, 새롭게 태어나라는 것을 아무리 들어도, 만약 우리가 구하는 것은 이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이라면, 그것들은 계속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라는 것은 대단한 말이지만, 정말 그것을 자신이 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일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이 세상 일이 잘 되고 자기 몸도 건강하고 가족들 상황도 좋을 때「아, 이것이 신의 자식이 되는 것인가?」라든가「이것이 천국인 건가?」라고 누구나 생각하게 되지요.
하지만 막상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나는 천국을 구하고 있습니다」「새롭게 태어나길 원합니다」「신의 하늘 문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요」라고 생각하는지 아닌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설령 그런 말을 들어도「그런 말을 들어도 좀처럼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해도 좀처럼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구하라고 말하지만 구하지 않는 저를 봅니다. 좀처럼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으며 그래서 좀처럼 어렵습니다.」라는 마음도 우리 안에서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마음이야말로, 우리와 우리 조상님들이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지혜를 써서 만들어 온 막대기입니다, 지금 말한 그 마음 자체가.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 이것은 제가 실감하는 것입니다.」「막대기가 아닙니다, 제 실감입니다」라고 하며, 그런 마음을 도피처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좀처럼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 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미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세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좀처럼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라는 자신」을 소중히 하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그「좀처럼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라는 부분에 신께서는 벌써 와 계십니다. 지금 와 계십니다. 그것이 오늘 성서에도 있었던「길잃은 마지막 한 마리 양」입니다.
우리는「좀처럼 생각할 수 없다」라는 말과 마음을, 신을 받아들인다거나 교주님을 통해 명주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명목으로 사용하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님들은 신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계속 그래왔으니까요.
그래서 사실은 그런 조상들의 모습을 신께서 구원하려 하시기 때문에「좀처럼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구하라고 해도 좀처럼 구하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성서에 백 마리의 양이 있는데 그 중 99마리는 있다, 하지만 한 마리가 나가서 헤매는데 이 한 마리를 신께서 구하러 가신다는 것은 확실히 사랑의 말씀입니다. 또는「전 인류를 구한다」라는 말과 오늘 교주님 찬가 7번째에도 있듯이, 누구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구원한다는 것은 분명 사랑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은 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서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들은 다시 말하면, 우리의 도피처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붙잡는다는 것은, 「그런 말을 들어도 좀처럼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라고 하며「좋다. 이것으로 완전히 도망쳤다, 신께서도 여기까지는 못 오실 거야. 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눈을 뜬 순간, 신께서 눈앞에 계시는 느낌이지요. 「에!?」하며 놀라기도 하지요.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졌든 거기까지 신께서는 와 계십니다.
우리는「좀처럼 생각할 수 없다」「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실감이 나지 않는다」등의 말을 교묘하게 사용하며 신으로부터 양처럼 도망쳐 왔습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지금 그 마음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고, 그리고「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신으로부터 도망칠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신의 사랑으로 가득차고자 하는 자에게는 그것은 사랑의 손입니다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안 좋은 상황이기 때문에 도망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도망치고 있는 마지막 한 마리 양의 마음은, 전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신의 진실을 들었을 때「사정이 나쁘다」라는 마음이 있지요? 그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지금 신께서「그것을 거느리고 내 품으로 돌아오라」라고 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정말로 최고이자 최후의 구원을 맡고 있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 대단한 일입니다.
무릇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를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져 버렸습니다만, 사실은 어폐가 있는데 그 정도는 메시아교인 우리는 재빨리 넘어가서 이번에는 교주님께서「제 2단계 창조」(명주님께서는「제 2기원의 탄생」이라 하심)라고 말씀하시는 천국에 올라가 모든 것을 맞아들이고, 그리고 모든 것에 축복을 나누어 주신다는 진정한 구원의 신업에 우리는 쓰임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분들은「예수님께서 속죄주이다. 대단하다」에서 멈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메시아이다」에서 멈춰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든가, 속죄주를 받아들인다는 것 정도는 간단하게 뛰어넘고, 그리고 메시아교에 맡겨져 있는「모든 생각을 구원한다」라는 구원에 쓰임받아야 합니다. 뭔가 마음에 솟아나더라도「그렇다. 이것을 구원하기 위해 나는 온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명주님 찬가, 몸도 영혼도 신의 빛으로 맑혀져서 먼저 천국에 사는 사람이 된다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명주님께서는 구원에 쓰임받고 싶다면 먼저 천국에 올라가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먼저 대 전제인「자기 자신이 회개하고 죄의 속죄와 용서를 받는다.」라는 것을 받고 거기서 천국으로 올라가서, 그리고 메시아교 여러분께 맡겨져 있는 빛과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이 신업에 쓰임받아야만 합니다. 이것 전부 추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원래 예수님도, 그저 전 인류가「당신 덕분에 우리는 살아있습니다」만으로 끝나길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 앞의「그럼 앞으로는 더욱 신께 가까이 다가가는 존재가 되라」라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인류는 계속「예수님을 믿는 나」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메시아교인 우리는 그리스도교도가 믿고 있는 것 정도는 쉽게 클리어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솟아나는 생각을 신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어떤 곤란한 상황, 어떤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아, 감사합니다. 이곳은 이미 맑혀서 구원해 주셨네요」라는 것, 이것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신업에 쓰임받기 위해, 가능하면 심신 함께 건강하게 쓰임받길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명주님께서는 식(食)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필요가 있어서 병에 걸려야 하는 분은 계십니다만.
하지만 가능하면 영육 모두 건강하게 신의 신업에 쓰임받길 바라셨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물론 정화를 안고 있는 분도 신의 소중한 신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만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병에 걸린 사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이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은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불치병이신 분들도 계시고요.
그런 분들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은 이것저것 말을 합니다만, 하지만 결국은 모릅니다. 그 병을 경험한 사람밖에 모릅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신께서「너에게 맡겼다」라고 맡기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답을 원하며「남들이 좀처럼 이해해 주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괴롭기도 합니다만, 하지만 신께서는 그 괴로움을 알고 계십니다. 「나는 안다」「너에게 이 소중한 신업을 맡기고 싶다」「너를 통해 너와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구원하고 싶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말하는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병에 걸리신 분이 어쩔 수 없는 절망감을 맛보았을 때「신이시여. 감사합니다」「여기를 비춰주셨네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래 그것조차도 생각들지 않으니「그것조차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이시여,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피를 받고 싶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습니다」라고 하고, 그것으로「축복을 나누어 주는 신업에 쓰임받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메시아교 신도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서 이 세상의 병이 사라져 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있습니다. 그런 분도 계십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한편으로 명주님께서는 가능하면 이 지상에서 우리가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그 명주님의 바람을 이대로 끝내서는 죄송하다고, 제가 너무나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고,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진정한 구원, 우리 마음을 써서 신께서 진행하시는 구원, 그 구원의 신업에 날마다 쓰임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메시아 성당. 그리스도교를 뛰어넘는 메시아교의 상징이 되는 메시아 성당.
이것이 건설되기를 교주님께서 바라고 계신다는 것은, 명주님께서도바라고 계시는 일이 됩니다만, 그뿐만 아니라 오늘은 3대 교주님의 10년제도 거행하였는데, 3대 교주님께서도 바라고 계십니다. 2대 교주님께서도 바라고 계십니다.
2대 교주님 시대의 신도도 있었고, 3대 교주님 시대의 신도도 있었고, 명주님 시대의 신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명주님과 2대 교주님과 3대 교주님의 마음을 전부 받고 메시아 성당을 건설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내려진 것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전신전령으로, 그리고 메시아교인 우리가 일치단결해서 나날의 구원의 신업을 실천하고, 그리고 또 신의 사랑을 주위 분들에게 전하고, 그리고 메시아 성당을 건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교도들을 비롯한 전 인류를 구원해야 하니까요.
그런 길을 이루고자 하시는 신, 명주님께, 교주님을 선두로 하여 기쁨으로 서로 의지하며 쓰임받읍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