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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자유의 메시아교」마사아끼사마 성언 2023년 10월 추계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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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38회 작성일 23-12-27 22:51

본문

세계메시아교 추계대제마사아끼사마 성언

2023101

 

완전자유의 메시아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연설대는 지난 달 본부 월례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아타미에서 가져왔습니다.(일동 웃음)

  지난번 월례제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습니다만, 이 연설대는 4년전 교주님께서 포르투갈에 가셨을 때, 포르투갈 대회장에서 이런 투명한 연설대를 사용했는데 멋있다고 생각하셔서, 일본에서도 만들어 봤습니다. 오늘 마침 포르투갈의 페르난도 본부장님과 부인께서도 와 계십니다. 페르난도 본부장님, 멋진 안()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 달 월례제 때 자주 안 하던 말이랄까요, ()에 관한 말을 했습니다. ()이라고 할까요, 전신전령의 이야기이지요. ()이라는 것을 주제로 하여 전신전령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음식에 대한 것은 평소 그다지 하지 않는 이야기이기에, 여러분께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을까 하고, 지금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식()이라 해도, 이것은 물론 신앙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명주님 신도는, 교조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하셨던 일을 자신의 마음과 몸을 써서 그것에 보답하고 섬기는 것이므로, 그래서 식()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신앙 이야기와는 다르다 라고 받아들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역시 신앙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에 대해 여러가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금후 나올로리, 또 유튜브(YouTube)에서신시대의 식()~명주님의 바람을 받고~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실 수 있는데, 그래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결국 명주님께서는 암이라는 병은 육식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식이라 해도, 명주님께 있어서 그것은 주로 육고(소와 돼지이지요) 그것들을 먹으면 피를 탁하게 하여 암에 걸리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그런 육고기를 먹더라도, 일주일에 1번 정도로 하라고 하셨는데, 이 주에 1회라는 것은 남성에 대해서입니다. 명주께서는 기본적으로 여성은 육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

  그리고 우유에 대한 것도 유명하지요. 명주님께서는 인간은 가능한 한 우유는 피하는 게 좋다 라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미륵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채식가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채식이라 해도, 지금 서양에서 자주 말하고 있는 윤리상이나 환경상의 것이라기보다는, 건강이라는 관점에서 인류는 그렇게 되어 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명주님의 식()이라는 것에 관해서 그런 것을 전달한 것인데, 그 이야기를 한 후, 제가 생각한 것은 자연농법입니다.

  미륵세상이 되어가는 과정은, 자연농법을 함으로써 곡물과 채소가 맛있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채소를 먹게 되어 채식으로 되어 간다고, 그렇게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메시아교와 이어져 자연농법을 하시는 분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미륵세상(미륵세상이라고 해도 그것은 이상 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 세계를 만들기 위해, 명주님 마음 실현을 위해, 나날이 노력해 주고 계시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강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자연농법 농가 분들이, 명주님의미륵 세상은 채이라고 말씀하신 성언을 받으신 후에 나날이 열심히 해 주신다면, 것은 바로 와야 할 인류의 이상 세계의 실현을 위한 명주님 신업에 쓰임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은 모두 신께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분명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로 인해, 만약 자연농법 농가분들이그럼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건가?라고 생각되어지는 일이 지금까지 있었다, 그것은 죄송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명주님 마음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자연농법 농가분들과 함께 걷고자 하며, 또 그런 분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자 합니다.

  지금 제가 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9월 월례제 때도 잠깐 이야기했습니다만, 그것은 먼저 전종자나 신도분들 중에 암과 같은 병에 걸린 분이 대단히 많다는 보고를 많이 듣습니다.

  그런 보고를 들으면서, 실은 명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라는 것을 알려드림으로써, 그런 병에 걸리신 분이나 또는 그 분의 가족이 아주 조금이라도, 명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라는 것을 생각해 주실 수 있다면 좋겠다 라는 마음에서, 저는 식()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전신전령이라는 것이지요. 성지(聖旨)전신전령을 바쳐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있습니다만, 저는 최근 이전신전령을 바쳐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전신의 쪽이지요. 그렇다는 것은전신을 바친다라는 것은 몸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의식주도 포함한 나날의 생활이 들어옵니다.

  전신을 바친다. 전령은 일단 놓아 두고 전신을 바친다는 것은, 이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할까요, 불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신을 바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 명주님을 얕보고 있다고 할까요, 그런 마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다 라든가, 나는 이런 신앙을 하고 있으니 이 정도 하면 신께서 받아주실 것이, 라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는신이시여. 신이시여라고 하면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 결국 자신의 사정에 맞춘 테두리 안에서 만든을 섬기고 있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교단 분들께서 이해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식()에 대한 것이나 여러 가지를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좀처럼 전달되지 않습니다. 역시 우리 마음속에아니, 우리들은 전신전령으로 섬기고 있다」「나는 신을 이용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신전령으로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는 마음이 좀처럼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중간한 이야기로는 전신전령으로 섬긴다는 것의 어려움을 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지극히 구체적인 식()의 이야기를 제전의 장에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극히 구체적인 이야기가 됐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아니 그것은 사정이 나쁘다, 전신전령이라는 것은 사정이 나쁘다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추상적인 이야기나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은 이야기로 하면, 우리는 계속, 아니 나는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전신전령으로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부분에서 머물러 버리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극히 구체적인 식()이라는 나날의 생활에 관여하는 것이것을 바라봤을 때, 우리 마음에 생겨나는 생각, 사정이 나쁘다 라는 생각, 그런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식()이 아닌 사람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달 월례제에서도가정(假定)의 이야기라고 했듯이 식()이라는 것은 하나의 비유인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가 되면 비로소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아니, 이것이 있어서 어렵다, 이것이 있으니 무리다, 지금은 무리다 라는 것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바라봄으로써전신전령으로 섬기겠다하지만, 사실은 전령은커녕 전신으로 섬기는 것도 우리는 뜻대로 되않는다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

  그것은 저 자신도 포함해서입니다. 교단사람이 어떻다든가, 신도 여러분이 어떻다든가 라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 매일매일 신께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 저 자신의 사정을 우선하며 살고 있는 저의 모습이 느껴지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식()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라는 것은 지극히 구체적인 이야기이기 문에,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것을 매우 강하게 계율적으로 아들인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나는 신앙을 하고 있다 라든가, 나는 신앙자이다 라는 것이 있어서, 여러 가지를 계율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사람에게 감사해야만 한다든가, 무슨 일이든 감사해야 한다, 화를 내면 안 된다, 신께 기도해야 한다든가, 그렇게 계율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일이든 계율로서 가르침으로서 받아들이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신앙을 하고 있으면 좋아합니다. 계율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식()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 머릿속이 바로더 이상 이것을 먹으면 안 된다」「저것을 먹어야만 한다」「고기는 더 이상 먹으면 안 된다」「맛없어도 이런 걸 먹어야만 한다」「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한다라는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배독한 명주님 성언(강화말씀195397)에도 있었듯이, 메시아교에는 계율은 없습니다. 명주님께서는, 나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렇지는 않고 자연스럽게 마시지 않된다, 그것이 메시아교이며 그것이 진정한 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

  대체로, ()에 관련해서 생각합니다만, 애당초 우리는명주님 모습이라는 것을, 진짜 명주님과는 뭔가 다른 명주님 모습을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 온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의 성언. 명주님께서는 술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가 명주님께서는 포교를 하는 사람은 술을 마실 수 있어야만 한다, 술에 강해야만 한다는 이미지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것은 명주님께서 성언으로 말씀하신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또는, 고기든 뭐든지 먹어야만 한다, 그것으로 선교를 해야만 한다 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때의 변천으로 그런 것도 필요한 시기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하지만 그것은 명주님 모습과는 다릅니다. 진짜 명주님 모습과는 다릅니다.

  다르지만 뭔가 포교를 위해서라든가, 이 인간세계에서 살아가기 해서 라든가 그런 것을 우선하여, 진짜 명주님 모습과는 다른 명주님 모습을 우리가 만들어 온 부분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저는 명주님의 모습이라는 것은, 이것은 먹어도 된다, 이것은 안 된다, 이런 것을 생각하라 이런 것은 생각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그런 계율적인 모습이 아니라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간다라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미륵세상은 채식이다 라는 것도, 뭔가 계율적으로 그렇게 되어 다는 것보다는, 신의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갑니다 라것이 명주님의 모습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명주님 신앙이란, 런 신앙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또 명주님의 삶의 방식도 그런 삶의 방식이셨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명주님께서는 뭔가 계율을 남에게 부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그리고 메시아교에는 계율은 없기 때문.

  그러니까, 혹시 지난 달 저의 말에 의해, 그 후 맛없지만 이런 식사를 해야만 한다, 하고 싶지 않지만 식사를 바꿔야만 한다 라고 생각하신 분이 계셨다면, 그것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맛이 없거나 하기 싫은데 뭔가를 한들 그것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약 저의 지난달 월례제에서의 식()의 이야기를 들으시, 이제부터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라고 계율적으로 받아들이신 분이 셨다면, 그것은 제가 덕이 없고 부족해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과드리겠습니다. 그런 것은 저의 바람이 아니며, 명주님께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명주님도 뭔가를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식()에 관련된 명주님의 성언을 만나고. 그렇구나」「명주님께서는 미륵세상은 모두 채식가가 다고 하시는구나라고 감동했고, 그래서 제 마음 속에는무리하게 뭔가 하고 있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자연스럽게명주님께서 기뻐해 주시길 바란다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저는 뭐든지 먹습니다. 제 안에는 이것을 먹으면 된다, 먹으면 안 된다 하는 계율적인 생각은 제로입니다. 제로. 왜냐면 메시아교에는 계율이 없기 때문에.

  물론 가능하면 명주님께서 바라시는 식()의 생활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다지 무리하게 생각하는 것은 닙니다. 명주님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다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뭔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것 먹고 싶다하며 먹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완전히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완전 자유이기 때문에.

  명주님의 마음에 보답하고자 하여, 명주님께서 자연농법을 하셨듯저도 집에서 화분 같은 것을 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다만 볕이 좋지 않아서 그때는 계속할 수 없었는데, 그런 것도 무리하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주님의 마음에 보답하고자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하면, 우리는 계율신앙에서 해방됐는, 음식이라는 구체적인 것이 나온 순간, 우리 전체의 마음이 또 계율신앙 쪽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금 말하는 것은뿐만 아니라마음에서도 같은 것입니다.

  메시아교 라는 것은 무엇을 생각해도 좋습니다.

  보통 세상 종교는이런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이런 것을 생각해라」「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입니다.

  오늘 명주님 성언에도 있었듯이, 세상의 종교라는 것은 계율을 지키거나 도덕적으로는 이렇다 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도덕을 지켜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사를 잘 해라, 이런 것은 생각해도 된다, 이런 것은 생각하면 안 된다 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교는 무엇을 생각해도 됩니다. 무엇을 생각해도 되며 무엇을 느껴도 됩니다.

  물론 생각되어지거나 느껴지게 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신께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종교처럼이것을 생각해라」「생각하면 안 된다라는 것은 메시아교에서는 없습니다.

  메시아교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든 무엇을 느끼든 좋습니다. 뭘 먹어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슨 생각을 해도 됩니다. 이것은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오늘 배독한 성서(마태복음517~48), 이 내용을 계율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어떤가요? 대단히 엄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다, 율법을 취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러 오지 않으셨나요?라고 하게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을(계율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오히려, 천지가 망할 때까지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는 일은 없, 그리고 율법 학자의 의()보다도 우리의 의()가 뛰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후의 내용, 이것은 계율신앙적으로 보면 매우 엄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사람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노하는 것만입니다. 그것만으로 사람을 죽인 것과 같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혹은 누군가에 대해서 어리석은 자라고 하면 공회에 잡혀가 버린.

  또 누군가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

  누군가에게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만으로 입니다.

  혹은간음하지 말라라는 것도이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성범죄(마사아끼님 추기: 성범죄라기보다는 불륜과 바람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인 것인데, 간음은커녕 이성을 정욕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이미 성범죄를 범한 것과 똑같다, 네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성을 보고 정욕의 마음을 품는 정도라면 눈을 빼라, 그 편이 낫다고 말씀하십니.

  속옷을 빼앗기면 겉옷까지도 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속옷을 빼앗기면 겉옷까지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도 돌려대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이것은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거 전부 다 가능한 사람 있나요? 누군가에게 화를 한 번도 내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누군가를 어리석다고 생각한 적 없나요? 어리석다고 하면 지옥 불에 던져집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계율적으로 받아들이면 엄청 엄합니다.

  받아들이기는커녕 이런 것들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속옷을 빼앗기면 겉옷도 준다. 예를 들면 도둑이 와서 숨겨놓은 돈의 일부를 훔쳐갔다, 그 때 우리는도둑님 기다리세요, 이쪽 금고있습니다(일동 웃음)라고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가능한 사람 있나요?

  그러니까 계율신앙으로 받아들이면 오늘 성서를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도 마음도 모두 죄투성이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쉽게 화를 내고, 바보니 어리석다느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뭔가를 도둑맞으면, 내 것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다음엔 어떻게 방어를 할까 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더 주어라 입니다.

  그러니까 이 내용, 계율신앙으로 받아들이면 구원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여기의 율법을 폐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취하기 위해서 왔다, 라는 이성취가 어떤 의미인가 입니다. 율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율법 학자의 의()보다 우리의 의()가 뛰어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입니다.

  그래서율법을 성취한다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저는 이고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이것, 간단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갈림길입니다.

  율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는다말로는 쉽지요. 하지만 이것은 큰 갈림길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닐 경우, 또 하나의 방법은 율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이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해 온 것으로, 그것은감사하라」「이렇게 생각하라」「좋은 일을 하라라는 길입니다. 그 길로 가는가, 아니면나는 그런 좋은 일은 불가능하므로 죄의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라는 길로 가는가, 이것은 큰 갈림길입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받는 것, 그것이 율법이 성취하는 것이며, 또 우리의 의()가 율법 학자의 의()보다도 나은 것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에게는 율법이나 계율을 지키고 있는 것이 그들의 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과 싸울 것인가요? 율법 학자에 대해서나는 정욕을 품고 이성을 본 적도 없습니다라고 하며 싸울 것인가요?

  그래서 우리의 의가 율법 학자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것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들리지요.죄의 용서를 받는다. 간단하게 들립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 자체도 만만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우리는나는 죄인입니다」「회개해야만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나에게는 이런 죄가 있다, 저런 죄가 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하지만 나는 살인한 사람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것이 밑바탕에 있습니다.

  뉴스에서 나오는 터무니없는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든가, 혹은 소규모든 대규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들의 뉴스도 있지요. 전쟁 같은 것도 있으며 그냥 살인도 있습니다.

  그래서나는 죄인입니다」「회개해야만 한다라고 분명 입으로는 말하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보다 나는 아직 낫다 라는 마음이 깊은 곳에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방법이 어중간한 것입니다. 저런 끔직한 성범죄를 저지른 괘씸한 사람보다는 낫다라는 것을 마음속에 꽉 가진 채저는 죄인이니까 받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의 만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겠다고 해도.

  때문에 그런 만만함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배독한 성서에서 꿰뚫고 있습니다.

  「너희는 살인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건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노하는 것만으로 살인과 같다. 그뿐 아니라 사람을 바보라는 하는 것만으로 지옥불에 던져진다라고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십니다.

  「저는 죄인이지만 성범죄는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이성을 정욕의 눈으로 본 적은 없는가? 그렇다면 성범죄를 저지른 것과 같다라고 지적하십니다.

  「저는 남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우리에게럼 너는 한쪽 뺨을 맞으면 반대쪽 뺨을 내어 줄 수 있는가?라고 지적하십니다.

  「이타애를 실천하고 있습니다라는 우리에게네가 싫어하는 사, 너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하십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하면나는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오면서 사람도 죽인 적이 없습니다, 성범죄도 한 적이 없습니다, 남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하려 합니다, 하지만 회개합니다정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한다면, 마지막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지옥에서 나올 수 없다고 성서에도 적혀 있듯, 나는 죄인이지만 저 사람보다는 낫다라고 생각한다면 평생 감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이것은 하않는다, 그것은 하고 있다라고 하는 계율 신앙 속에 있으면서, 무리죄의 용서를 받겠습니다라고 한들,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지 않으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나는 죄투성이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것이 정말로 뱃속 깊은 곳에 떨어지고, 그 위에죄의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가 되지 않는 한은, 계속 감옥에 들어가 있는 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율 신앙으로 가는 한, 계속 감옥에 들어가 있는 채입니. 나는 적어도 이것은 지키고 있다. 적어도 이것은 하지 않는다생각을 마음 깊숙이 가진 채죄의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라고 한, 100%가 아니지 않습니까? 90%의 죄는 인정합니다. 99% 악인임은 정합니다라고 하더라도, 마음속 밑바닥에는 있지 않습니까? 는 착실한 사람이다라는 것이. 그렇다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메시아교는 정말 계율은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대단한 복음.

  오늘 성서의 한 부분, 그리스도교의 분들은우리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을 정욕의 눈, 음란한 눈으로 보면 안 된다, 하지만 꽤 어려운 일이다」「사람에게 화내면 안 된다, 하지만 화를 내 버렸다. 꽤 어려운 일이다라는 세계입니.

  그리스도교인들은 확실히 예수님은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모처럼 모세의 십계명을 통과했는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더 어려운 훈계를 남기시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계율의 감옥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서에서 정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죄의 용서를 받아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의 한 푼이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나는 가까스로 건실한 인간이다 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 용서를 받겠습니다 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되지 않는 한,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서 부분을이 계율은 엄하다. 그래도 지켜야 한라고 받아들이고 계속 계율을 지키는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가. 니면 자신이 죄인임을 정말로 인정하고 마지막 한 푼을 갚는가 어떤가 입니다.

  「-어떠한 죄라도사하시며 그-어떠한 죄여도물으시는 천지의신이시여명주님 찬가입니다.

  어떤 죄도 용서하신다, 이것은 좋지요. 하지만 어떤 죄도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죄의 용서를 받아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죄든 책망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기에서 탈출하나?

  그것은 속죄주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떤 죄여도 물으시기 때문에 피할 방법은 죄의 속죄를 한 자를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의 속죄를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바쳐주셨지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것은 대단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면 명주님께서, 예수님은 속죄주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어떤 죄라도 물으신다고 말씀하신다면, 인간이 유일하게 살아남는 길은(시아교 신도나 그런 것은 도외시입니다. 그런 것은 관계 없습니.) 감옥에 들어가 계율신앙에 묶인 삶이 아니라, 앞으로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피를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선인과 같은 얼굴로 살아가도 됩니다. 나는 이런 것을 합니다, 런 것을 합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며. 하지만 그것은 명주님께서 보실 때는그렇습니까? 훌륭하네로 끝입니다.

  그런 선인과 같은 얼굴로 살아서 뭐합니까?

  그렇지 않은 삶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명주님께서는 어떤 죄도 물으신다고 하십니다. 죄의 용서받지 않는 한, 그것은 계속 부과되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독하지 않나요? 살아가면서또 이런 죄를 저질렀구나」「좋지 않은 생각을 가져 버렸구나라는 삶은 힘들지 않나요?

  하지만 그런 마음의 감옥에서 나올 방법이 있습니다. 모르실 수도 있는데 우리는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신 예수님의 속죄의 피, 이것입니다. 우리는속죄주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한다, 이제 자유입니다. 감옥에서 나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교에 계율이 없다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의 피를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류는 이미 완전하게 해방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해도 좋고 무엇을 먹어도 좋습니다. 자유입니다.

  성서에서는썩어짐의 속박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마음도 몸도 썩어짐의 속박에 묶여 있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계율같은 으로 붙들어 매어 실제로 몸도 무겁습니다. 무겁지 않습니까? .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계속 그 썩어짐의 속박인 것입니. 계속 스스로 그 짐을 질질 끌고, 오늘은 몸이 무겁다, 왠지 의욕이 없다, 뭔가 힘이 나지 않는다 로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그런 모습으로부터 크게 해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새가 되어 날고 싶다고 생각하는 때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지금 그 정도로 자유롭게 날고 있는 것입니다. 날아다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왜냐면 우리는 계율의 세계인,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좋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어디에 이런 훌륭한 구원의 복음이 있습니까?

  분명 그리스도교는 훌륭한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인간의 마음속으로 계율신앙이 들어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좋다, 이런 일은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 깊숙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교는 제로입니다. 계율 제로. 1개나 23개 정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대단한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은 꽁꽁 묶여 있지 않았나요? 이런 생각을 품고 있어도 되나?」「아니,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된다」「좀처럼 감사가 안 된다라는 마음으로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세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신의 넓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완전한 자유 속으로 맞아들여졌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있는 것은 진정한 밝음과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인류는 그렇게 걸어가고 있나요? 걷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 이것은 생각해도 된다, 이것은 좋다 나쁘다 하며 묶여서 살고 있지 않나요? 하지만 메시아교는 계율 제로이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해도 좋고 무엇을 느껴도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에 식()에 관한 것으로 또 계율신앙 쪽으로 끌려가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에 의해 우리의 진정한 신앙의 훌륭함을 오늘 알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메시아교 신앙을 알고, 그것을 퍼뜨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우리는 썩어짐의 속박에서 해방되지 않은 채 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니, 왜냐하면 보통「『감사합니다라고 합시다」「무슨 일이든 감사합시다, 그것이 종교 아닙니까?

  하지만 메시아교인 우리는이제 너희들은 자유다」「신 앞에서 너희는 무슨 생각을 해도 되고, 어떤 것을 느껴도 된다, 완전히 자유의 세계해방되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복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메시아교를 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는 시아교 신앙의 진정한 대단함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메시아 성당은 메시아교의 신앙의 상징이기 때문에, 리는 오늘까지 왜 메시아 성당을 건설하는지도 사실은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계율로부터 정말로 해방된 완전한 자유를 설하는 메시아교의 상징이 되는 것이 메시아 성당입니다.

  메시아교는 완전히 자유로운 종교입니다. 이것을 하면 안 된다, 것을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해라, 이것은 생각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 메시아교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간신히 메시아교 신앙의 대단함을 알았습니다. 오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메시아교를 전하는 것도나는 이제 신 앞에서 완전히 자유다」「나는 계율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라는 그 기쁨을 전하는 것입니다.

  계율을 0.1 남겨두면 안 되나요? 0.1 남아 있으면 100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는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쨌든 계율을 좋아합니다. 왜냐면 계율이라는 것은, 그것지킴으로써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마음에 깊숙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좋아합니다. 좀처럼 벗어날 수 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 그래서 몸이 무겁습니다. 병이 납니다. 그런 것으로 우리는 병이 나버립니다.

  마지막 한 푼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고 한 것처럼, 그 마지막 0.1, 마지막 한 푼을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부 인정합니다.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부 해방시켜 주셨네요라는 것입니다.

 

  메시아 성당을 건설한다고 해도, 이렇게 대단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메시아교의 메시아 성당이기 때문에, 역시 메시아교의 진정한 대단함을 알고 나서 건설하고 싶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메시아 성당의 구체적인 정보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토지를 사기 전에 장소는 공표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여러분들이 많은 헌금을 해주셨는데 아무것도 진전되고 있지 않은 것 같이 생각하시겠지만, 하지만 헌금은 지금 정말로 좋습니다. 아무런 정보가 안 나오는 것 같지만 헌금은 정말로 지금 좋습니다.

  정보가 나왔을 때는 이미 토지를 산 후이기 때문에, 그것은 한 단계의 헌금은 끝난 시점입니다.

  그래서 후보지는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헌금의 액수가 어느 정도금액이라면 어느 정도 큰 곳, 그렇지 않으면 조금 작은 곳이라는, 런 단계입니다. 지금은.

  그러니까, 아무런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토지를 살 때까지는 정보는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느냐는 것은 신, 명주님께서 정해 주시것이긴 합니다만, 우리로서는 가능하다면 더 좋은 장소, 더 멋진 곳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메시아 성당건설에 대해 들으면이것은 큰 일이다라고 생각하지요. 한편 개개인이 하는 헌금 등은이것은 작은 것이다하듯이, 우리는 작은 것과 큰 것을 나누어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지만 사실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작은 것이 큰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실은큰 것이라는 것은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 왜냐면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으며, 것이 큰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인간이 하는 작은 일 하나하나가 이미 큰 일 그 자체입니다. 사실은.

  그래서메시아 성당 건설은 뭔가 큰 일이구나. 이것은 어떻게든 진행되어 가겠지라는 것으로는 진행되어 가지 않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하는 작은 일이, 즉 큰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말하자면 성심을 결집하여 메시아 성당을 건설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우리는나는 감사가 안 되는 인간이다」「이런 것을 생각하는 인간이다라든가, 또는 사람에 대해서도그 사람은 감사가 안 되는 사람이다라고 이렇다 저렇다 하며, 계속 어둠을 갖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어둠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마음속에 그림자를 가지고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해방되어 밝아졌습니다. 한없이 밝고, 한없이 즐거운 미래는 언제 올까 했던 그 미래는 지금 왔습니다. 밝아서 즐거워서 기쁨이 넘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미래는 이제 왔습니다.

  오늘 명주님 성언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신께서는 환희에 넘치는 세계를 만들고 싶다고 있었지요? 그것이 이미 왔습니다. 우리 마음에 왔습니다.

  왜냐면 계율은 이제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각을 해도 되며, 것을 느껴도 좋습니다. 너희는 자유이다」「너희의 마음은 이제 밝」「한없이 밝은 세계에 이미 돌입했다라고 그렇게 신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한없이 밝고 즐거운 세계에 이제 우리는 있습니다. 왜냐면, 무슨 생각을 해도 좋으니까요. 썩어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지요?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끌고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없이 밝은, 한없이 즐거운 인류가 바라 마지않던 완전한 자유로운 세계가 이제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신은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무엇을 느꼈든 신께서는 노하않으십니다.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신께서는그것을 가지고 내 으로 돌아오거라」「나는 기다리고 있다 너를이라고 말씀하십니.

  이런 멋진 것을 인류가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런 멋진 존재라는 것을 알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인류는.

  그래서 종교라든가, 메시아교나 관계 없습니다. 지금 신의 사랑이 이미 인류에 임하고 있습니다. 신의 사랑이 전 인류에 임하고 있으, 우리 메시아교는 그저 중개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교가 아니더라도, 만약 우리와 같은 것을 설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분은 우리의 동료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어둠이나 짐을 끌고 오늘까지 어떻게든 겨우 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신께서는이제 그 짐을 내려놓아라」「마음의 짐을 내려놓아라. 마음의 그림자는 이제 없다. 이미 너를 어둠의 세계에서 해방시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멋진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의 구원의 복음을 우리는 알았습니.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려 합니다. 자신이 그 기쁨을 느끼면 그것은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마음의 그림자, 마음의 짐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마지막 한 푼을 갚을지 어떨지 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밝고 해방된 신앙인가 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할까요, 신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시려 하고 시기 때문에그 사랑을 받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미 그것은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이런 것을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진정한 기쁨과 밝음을 인류보다 먼저 알게 되었습니. 그래서지금까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감사합니다고 하며 전 세계 사람에게도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도 된다라고 한다면, 정말로 밝고 기쁨에 넘치는 세상이 되어 갑니다.

  오늘까지 우리는 감옥에 들어가 쇠사슬로 묶여 있었던 것일지도 릅니다만, 이제 그 쇠사슬은 풀렸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발도 손도 쇠사슬로 묶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쇠사슬은 이제 풀렸습니다.

  오늘 메시아교 신도로서 그런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마음이 되었으니, 그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밝고 즐겁게 기쁨으로 함께 걸어갑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