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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기를 내다본다」마사아끼사마 성언 2024년 1월 1일 신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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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29회 작성일 24-03-1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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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제 마사아끼사마 성언

202411

 

22세기를 내다본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정말 따뜻해졌네요. 새해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전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할 것이기에(일동웃음), 편안하게 화장실도 이용하시며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매년 그렇습니다만, 오늘도 집에서 일출이 보이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일출을 보고, 그리고 아내가 준비해 준 음식도 먹고 있었는데, 세계메시아교 인스타그램에 얼마 전 메시아교가 구입한 메시아교의 성지가 될 장소에서의 일출 동영상이 올라와서(아직 보지 못한 분은 꼭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보고, 그래서 오늘은 일출을 두 번 봤습니다. 저희 집에서 보고, 그리고 스마트폰에서도 보고, 태양은 하나인데요(일동 웃음).

  그러면서 오늘 여러분들은 새해 첫날을 어떤 생각으로 맞이하셨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 잠깐 생각한 것은, 작년에도 한 해 동안 여러분들께서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는 것, 그리고 올해도 신도 여러분과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며, 그리고 특히 오늘 아침에는 올해는 여러분과 한 가족처럼 함께 걷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족이라 하면, 이 세상의 가족이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신의 품 안에서의성스런 가족이기 때문에, 그런 성스런 가족으로서 함께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고로 바르셀로나에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하여 건축 중인 유명한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성당이 있지요?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말은 스페인어인데, 이 말은성스러운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여담입니다만, 가우디도 왠지 신의 품 안에 있는 전 인류를 생각해내고, 전 인류는 성스런 가족이라는 것을 이미지해서 저런 이름을 사용했나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가족은 무엇인가 하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기쁨도 슬픔도, 그것들 모든 것을 나누고 함께 극복하는 것이 가족이지요.

  그러니 올 한해도 여러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여러분과 여러 기쁨이나 슬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러한 모두를 함께 나누고, 그리고 함께 극복해가고자 합니다.

 

  작년에도 여러분께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 중에서 여러분께 인상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에 대한 것입니다.

  작년에 저는 명주님의미륵의 세상은 전 인류가 채식가가 된다는 취지의 성언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렸다고 할까요, 다루게 되었고 그리고 그 성언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전해 드렸습니다.

  이 채식이라는 것은 전에도 말했듯이 당연히 강제가 아닙니다. 강제가 아닙니다. 메시아교는, 교단으로서는 전종자에 대해 완전 채식, 비건식을 권장하고 있습니다만, 전종자에 대해서도 결코 강제로 하게하는 것은 아니라, 어디까지나 권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족 분들과 다투거나, 예를 들면 요리를 해 주는 아내 분과 옥신각신까지 하며 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한 사람 한 사람 지금까지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이 있으니 그것을 존중하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만약 명주님께서 정말로 신으로부터의 말씀을 받으신 존재라면전 인류는 채식가가 된다라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을만한 가치가 없는 교조를 믿고 있다는 것이 되어 버리지요.

  하지만 만약 명주님께서 정말로 신의 말씀을 받으셨다면, 신의 힘에 의해 세상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 갈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다행히도 제 가족인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완전 채식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에 있습니다만, 환경적으로 그런 것이 좀처럼 어려운 분도 계실 것이고, 또 그런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는 분도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명주님께서 정말로 신으로부터의 말씀을 받으신 존재라면, 분명 신명주님께서 해야 할 때를 준비해 주시고, 그 길로 자연스럽게 이끌어 주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무리하게 어떻게든 한다든가, 가족과 사이가 틀어지면서까지 실천한다든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물론 옛날처럼 의학을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명주님 재세 당시에는 신도들도 포함해 서양 의학을 거부하는 모습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고 우리는, 저도 포함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의사가사망했습니다라고 해야만 장례식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옛날처럼 극단적으로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 한편으로 그럼 다 좋다 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자연스러운 모습, 균형 잡힌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교단은 서양 의학은 부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으면 당연히 의사와 상담하고 의사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옛날처럼, 채식을 하고 있으니까 의학은 절대 거부한다, 약은 절대 거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도 포함해서 주의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것으로 세상과 트러블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 문제들이 있지요? 이런 상태인데 병원 진찰을 받지 않았나요? 라는 문제. 그런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그런 문제가 발생해 버려서, 사회에서 교단 전체를 그런 눈으로 보게 되면, 모처럼 좋은 것을 세상에 전하려 하는데 그런 일이 있으면, 종교라고 해서 원래부터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데 더 그런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 식()에 대해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얼마 전에 브라질에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행기로 상파울루에서 볼리비아 산타크루스로 갈 때, 아침 이른 시간 비행기였기 때문에 모두 아침을 거의 먹지 않고 호텔을 나서서 비행기를 탔는데, 모두 배가 고픈 상황이었습니다.

  제 옆에는 브라질 메시아교의 산토스 본부장님이 앉아 있었습니다. , 참고로 오늘은 브라질 메시아교 마츠무라 부본부장님의 부인께서 참배하고 계십니다(일동박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그때 아침을 안 먹고 6시인가 630분 쯤에 호텔을 나와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탔습니다. 참고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저도 포함해서 완전 채식, 비건식을 실천하고 있는 중으로, 그 볼리비아행 비행기를 탔더니 아침 식사가 나왔는데, 그것이 치즈 샌드위치였습니다(일동 웃음).

  제 옆에 산토스 본부장님이 앉아 있었고, 모두 마음속으로어떻게하지라는 상황으로, 게다가 모두 아침 식사를 못해서 배가 고파서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거리는 상태였습니다.(일동웃음). 꼬르륵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어떻게 할까?하는데, 그때 제가 동행자분들에게 이것은 신께서 준비해 주신 것이니 감사드리고 먹읍시다라고 하고 모두 먹었습니다.

  교주님께서 교도해 주시는 것처럼 만물은 우리를 통해 신의 곁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신이 계신 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옆에 앉아 있는 산토스 본부장님께「『만물과 함께 되돌아가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신께 감사드리고 먹읍시다라고 말씀드리고, 그리고 그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얼마 전 제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신도 여러분 중에는 육고기나 생선, 유제품을 취급하는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에 부담감을 느낄 일은 일절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이상, 그런 것으로 장사를 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도 뭔가 신 쪽에서 필요가 있어서 그런 길을 준비하신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것에 뭔가 부담감을 느끼는 쪽에 자신의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역시이런 물고기, , 돼지, , 생선도 모두, 우리 인간을 통해서 신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그런 신업에 쓰임받겠습니다라고 하며 그런 장사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만약 명주님께서 정말 신의 말씀을 받으신 존재이시고, 그리고 그 명주님께서 미륵의 세상에는 전 인류 채식가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분명 장래적으로 무리한 형태가 아닌 자연스러운 형태로, 그 장사도 그런 시대에 적합한 모습으로 전환하는 길을 명주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의식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초점이 가기 쉽지요. 그리고 이것은 좋다, 이것은 나쁘다 하며 선별을 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관해서도 지금까지 우리는, 의료 거부라든지, 이것은 거부한다 라든지 그렇게 해 온 것인데, 다시 그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물론 명주님께서는 미륵의 세상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대방침은 내세우시지만, 당연히 과정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중에, 아까 치즈 샌드위치 이야기도 그렇고, 또 동물이나 물고기, 여러 만물을 접하는 중에 여러 마음이 생기지요. 명주님의 성언에 대해 배신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나,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그런 마음도 포함해서, 전부만물도 제 마음도 모두 신께 되돌려드립니다라고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을 면죄부처럼 해서 사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명주님의 이 식()의 성언을 받는 것에서 도망치기 위해,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면죄부처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극단적으로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전의 우리는 자칫하면 극단적인 방향으로 가서모두 신께서 만드셨으니까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라고 하며모든 것은 신의 것이라는 가르침을 자신에게 좋도록 이용하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를 충분히 알고 계시기 때문에, 분명 무리가 없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해 주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주위 분들도, 그런 장사나 일을 하시는 분을 심판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며, 또 본인도 그것으로 뭔가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일도 일절 없는 것입니다. 저는 신, 명주님께서 절대력으로 반드시 좋도록 인도해 주신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함께 그것을 신뢰하고 걸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좀 전에 오늘의 명주님 성언과 성서를 배독했습니다. 사회자는 이와마씨라는 여성분인데 목소리가 정말 좋으시네요. 저는 열심히 귀담아들었는데, 이것으로 오늘의 제전은 끝내도 되지 않을까(일동 웃음)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일 마지막 성서말씀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고 하는 말을 듣고그대로입니다.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제전 끝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 참배석에서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나갈 수는 없기 때문에, 주어진 책임만은 어떻게든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명주님 성언은 새해에 어울리는새로운 사람이 되어라였습니다. 새로워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잠깐 언급하겠습니다만, 성서 쪽은 여러 내용을 언급하고 있었지요(고린도후서47~71).

  오늘 배독한고린도후서라는 것은 바울이라는 사람이 썼는데, 바울은 옛날에는 그리스도교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을 죽이고, 남자 여자 상관없이 끌어내어 감옥에 넣은 사람인데,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해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이미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뒤의 일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바울이 다마스커스(현재 시리아 수도인 다마스쿠스입니다)로 그리스도교인을 더 잡겠다고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확 비쳐오고 바울은 그 빛에 휩싸여 땅에 쾅 하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사울이라고도 불렸는데 그때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이.

  그래서 바울은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자 그 음성은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쨌든 다마스커스로 가라고 바울에게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듣고 바울은 일어나서 다마스커스로 가려 하는데, 눈은 뜨고 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한편 다마스커스에는 또 다른 아나니아 라는 그리스도교인이 있었는데, 바울이 마을에 왔을 때 아나니아가 바울에게까지 가서 바울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그랬더니 바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바울은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이것이눈에서 비늘(지금까지 몰랐던 일을 갑자기 깨닫다 의 의미)이라는 말의 어원입니다. 이 바울의 성서에서의 에피소드가 우리 일본인들이 자주 사용하는눈에서 비늘이라는 말의 어원입니다.

  눈이 보이게 된 바울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그때부터는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인들을 죽이던 것이 완전히 뒤바뀌어,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됐습니다(사도행전 91~22).

그래서 오늘 성서의 이 고린도후서의 고린도라는 것은 그리스에 있는 도시의 이름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서 그리스까지 배를 타거나 걸어다니며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포교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그리스 사람 앞으로 쓴 편지를 오늘 배독한 것입니다.

  오늘 배독한 부분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면, 기본적으로는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

  그러면성서는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성서보다 더 어려운 것은 명주님 성언입니다.

  그래서 만약 성서가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명주님 성언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명주님께서는, 아마 이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내 문장만큼 어려운 건 없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문장과 그 외라는 제목의 성언에서, 내 문장만큼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문자가 나온 이래로 예가 없을 것이다, 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명주님의 문장은 글자가 나온 이래로 예가 없을 정도로 어려운 문장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다지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지요. 명주님께서 알기 쉽게 써 주셨다 라는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여기서 명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냐면, 우리가 액면적으로 파악하는 명주님 성언의 그 심오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어렵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모두 다여기는 이렇게 쓰여 있으니 아, 그렇다, 이런 의미이다정도이지,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명주님 성언은 문자가 나온 이래로 예가 없을 정도로 어렵기 때문에, 당연히 성서보다 어렵습니다.

  그럼 오늘의 성서 중에서 한 부분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배독한 부분이 길어서 그 부분에 있는 중요한 점 하나하나 전부 이야기하면 날이 저물어 버립니다(일동웃음).

  그래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화해라는 것인데,화해라는 말이 나왔지요.

  세상의 죄과를(세상의 죄과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신과 화해시켜 주셨다고 그렇게 적혀 있지요.

  화해했다는 것은, 그 전에는 화해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으로, 우리는 신과 적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과 화해했으니 그 전의 우리는 신과 적대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신께서 보시기에 우리는 적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까요, 사실은 신의 쪽은 우리를 적으로는 보고 계시지 않았지만, 우리 인간 쪽이 신께 대해 마음대로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라는 적대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멀어져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을, 신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 아무런 죄도 지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선택하시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바치신 그분의 피를 통해 더 이상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신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화해시켜 주셨다고,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계속 신과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는 화해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쓰여 있는 것은,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하사하셨다고 되어 있지요(신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스스로 우리와 화해하셨고 화해의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으니(고린도후서518)

  요점은,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신과 적대하고 있던 우리 인간을 화해시킨다는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보통은예수 그리스도는 대단하다로 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과 화해했을 뿐만 아니라, 신께서는 이번에는 너희도 화해의 직분을 다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신께서는 우리를신과 함께 일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신과 함께 일하는 자이것은 대단한 표현이지요. 신과 함께 일한다 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입장은 이미 신의 입장입니다.

  때문에 신께서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화해의 직분을 하사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우리에게 하사해 주셨다라고 쓰여있기 때문에, 예수님 이외의 전 인류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신께서는 이 화해의 직분을 하사해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께서는 얼마 전까지 신을 적으로 삼았던 이런 우리들이라도 화해해 주시고,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라 이번에는나와 함께 일해 주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출을 해 버렸습니다. 아빠 엄마가 싫다고 가출을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모로서는 언제든지 집에 돌아와도 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의 문을 여는 열쇠는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라」「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여라입니다. 그 열쇠를 사용해서 집 안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그렇게 반항하던 우리라도 부모는 맞아들여 주시고, 그리고 이번에는 함께 요리하자, 함께 쇼핑하러 가자, 집 수리를 함께 하자든가, 그렇게 말해 주고 있는 상황과 같습니다.

  신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그런 부모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신을 적으로 여겼지만 부모의 마음으로서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그럼 이 화해의 직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화해의 직분이란 구체적으로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라는 것입니다. 화해의 직분이 있다고 하면, 이야기로서는, 대단하다라는 것이 됩니다만, 그 임무란 도대체 무엇인가?

  보통 화해라고 하면, 예를 들면 여기 두 그룹이 있는데, 이 그룹과 이 그룹은 적대하고 있습니다. 그 두 그룹을 중재해서 모두 사이좋게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 화해의 직분인가, 여러 사람과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하는 것이 우리의 직분인가 라고 생각합니다만, 오늘 배독한 성서 후반부에는 빛이 어두움과 어찌 사귀겠느냐,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떤 부분을 같이하겠느냐, 더러운 것으로부터 떨어져라 라고, 그렇게 신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는 것은 신께서 우리에게 하사해 주시려는화해의 직분이라는 것은, 단지 주변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면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이화해의 직분이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조레이입니다. 조레이.

  조레이인데, 그것은 명주님께서 조레이는 두 번째 문제이고 상념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래서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조레이는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회개하라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상념으로 사죄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조레이이자 화해의 직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께 대해 회개해야 할 요소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교주님께서는 맡긴다고 말씀하시고, 와타나베 선생님은 그것을 한때상념의 실천이라고도 하셨지요. 명주님께서는 그것을기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입니다. 화해의 직분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상, 표면적으로 느끼는 것은 예를 들면 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가 그러한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는데, 그 마음이 발생하게 된 본래의 발단은, 결국 우리가 신께 반하여 인간의 사정에 맞춰 살아가고자 한다, 나를 주체로 해서 살아가고자 한다 라는 것, 그것이 발단이 되어 여러 가지 이 세상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결국 주위 사람과 적대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위와 적대하는 마음은 순식간에 생겨나지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오늘은 기분 좋다가도 사소한 일로, 예를 들면 왜 이 가게 주인은 이렇게 무례하게 응대를 할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좋게 응대하는데(일동웃음) 라는 마음이 순식간에 듭니다. 우리 안에.

  그만큼 우리의 마음 속이란 신과 적대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그것을 화해하라는 직분이 우리에게 부과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주위 사람에 대해 이런 마음을 발생하게 되는, 신께 대해 적대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었습니다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신께서는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하사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로서 신과 마주해야 합니다. 명주님께서는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말로써 신과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에기도하라라는 것입니다.

  어떤 말로 기도를 하느냐 하면, 그러한 적대심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에 의해 이미 용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항상 말하고 있듯이, 생겨나는 부정적인 마음에 대해당신들은 이미 용서 받았습니다라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해의 직분입니다. 그것이 신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의 우리의 직분입니다.

  우리 안에 생겨나는 마음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누군가를 적대하는 마음이나, 질투, 불안 그런 마음입니다.

  요 최근에도 교단의 여러 보고를 듣는 중,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이런 마음은 분명 내 안에도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이웃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라는 말이 있지요. 이것도 기본적으로는 질투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이웃집 잔디가 라고 하는 것.

  상대방이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고통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뭔가 자신의 가치나 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하여, 분명 저 사람은 행복할 거야, 행복해서 좋겠다, 나는 불행하다, 저 사람은 좋겠다 라는 이런 마음, 이웃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는 마음이 확실히 내 안에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마음을 생각하면, 이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을 중심으로 한 마음으로,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려는 것은 제로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분명 이 사람은 내가 모르는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판단하고, 그리고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타애가 아니라 이기애의 모습입니다. 이기애(利己愛). 이기애라는 것은 명주님께서 인간의 사랑은 결국은 악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신께 적대하는 마음입니다.

  이번에 제가 이 보고를 들었을 때,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안에 이기애의 마음, 신께 적대하는 터무니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신께서는 이미 그런 마음은 용서해 주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보고 속의 그 분과 함께 라는 마음으로, 제 안에 존재하고 있는 이기애적인 마음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정말로 실천한다는 것.

  이전의 우리는 조레이였기 때문에, 조레이라는 것은 손을 들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이지요.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최종적으로는 조레이는 두 번째 문제이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이번에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주위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악의 싸움, 명주님 성언의선악의 싸움에 있듯이 메시아교가 나옴으로써 사신은 큰일이 난 것이라고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면, 사신이라는 것은 무엇을 원하는가 하면, 인간 세계의 번영, 이것을 그들은 원하는 것입니다.

  사신은 인간 세계의 번영이 멈춰 버리는 것은 곤란한 것입니다. 이타애가 아니라 이기애의 세계가 이겨가는 것을 사신은 바랍니다.

  「사신이라 해도 뭔가 공상 속의 이야기라든지, 어딘가에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마음 속에 사신이 숨어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 이기애의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전 인류가 이기애가 되는 것이 사신의 소원입니다. 인간의 형편, 인간의 척도로 가득 찬 세계, 인간 세계의 기준에서 가장 강한 자가 이기는, 가장 돈이 많은 나라가 이기는 그런 세계입니다. 무력이나 재력, 이것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가 이기는 그 세계이지요. 우리는 보통 그 상식을 전제로 한 세계에서 당연하게 살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사신은 그런, 인간을 주체로 한 생각이나 이기애의 마음이 만약에 신과 화해해 버리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인간 주체의 세계가 계속되지 않기 때문에.

  그럼 사신은 어떤 수법을 쓰냐 하면, 성언선악의 싸움에서 명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두뇌를 점령하여 상념을 빼앗아 버린다라고, 그것이 사신의 수법인 것입니다(그들 사신군은 본교를 방해함에 있어서 쓸모가 있을 만한 자를 선택하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빙의하게 된다. 인간이란 물론 무신론자이며 유물주의자이며, 드물게는 유심주의자도 있지만, 이것은 뭔가의 동기로 말미암아 사념이 발생하는 경우 사신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사신이 빙의하면 그 인간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그 수단으로서 두뇌를 점령하여 상념을 빼앗아 버린다. 예를 들면 본교에 대해서 왠지 모르게 화가 난다, 기분이 나쁘다, 곤란을 당하게 해 주고 싶다, 곯려주자고 하는 관념이 집요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지성적인 인간에게는 그에 알맞도록 상념을 일으키게 한다. 즉 미신사교인 것이니 때려부수는 것이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도록 하는 것이다」「선악의 싸움1950318).

  명주님께서 조레이를 진행하고 계셨을 때, 사신은 아 조레이다, 빛이 나와 버렸다, 곤란하다, 곤란하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명주님께서조레이는 두번째 문제이다」「기도하라라고 했을 때 사신은 더 곤란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뭔가 인간의 병이 낫는다든가, 그런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이야기까지의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쪽에까지 명주님의 빛이 진출하려 하기 때문에, 이것에 사신은 당황한 것입니다.

  병이 낫는 정도의 일은 괜찮지만, 마음까지 지배되면 큰일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명주님의 빛에 의해 빼앗길 것처럼 되었다, 하지만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쪽은 빼앗기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명주님께서 최만년에기도하라」「마음으로 회개하고 기도하라라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이것에 사신은 크게 당황한 것입니다.

  이렇게 명주님 승천 전에 크게 당황했지만, 결국 그 명주님 마음을 교단으로서는 계속 이어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 상태는 사신으로서는 잘된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라라는 것에 관해서는, 명주님께서이것이 유일한 견본()이다라고 하신 화상이 낫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지상천국681955315일 발행), 명주님으로서는 앞으로는 기도로서 나아간다는 길을 우리에게 남기셨지만, 명주님 승천 후, 결국 우리는 다시 손을 드는 조레이로 돌아왔기 때문에, 사신으로서는 아이구 잘됐다 였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마음은 빼앗기지 않았다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교주님께서 나오셔서명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것을 말씀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에, 이것에 사신은 곤란한 것이지요. 이것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모처럼 명주님께서 돌아가셔서 더 이상 그 마음을 계승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신들은 앞으로는 인간 주체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수십 년 동안이나 크게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교주님께서 나오셔서, 명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레이라고 하는 것도 있지만 앞으로는 상념의 세계이다,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라고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곤란한 사신은 어떻게 하냐면, 명주님께서 사신은 두뇌를 점령하고 상념을 빼앗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교주님께서는 명주님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예를 들어 자주 들은 말이 교주님은 포교 경험이 없다, 교주님은 포교 경험이 없으니까 교주님 말은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이런 말로 자신을 납득시키려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신들이 그런 사람들 속에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주님께서는 명주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교주님께서 어떻다든가 하는 것은 관계가 없을 텐데 그런 의미도 모르면서 자신들을 납득시키려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는 교주님께서는 우리와 달리 행복하시고 물질적으로도 축복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 마음 같은 것은 모를 것이라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도 생겨나게 합니다.

  이렇듯, 교주님께서는 명주님 마음을 전달하시려 하는데, 그런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주님의 포교 경험이 어떻다든가, 교주님은 풍요롭고 행복하시니 우리의 마음은 모르실 것이다 라든가, 그런 것이 나옵니다.

  이것은 보통 생각하면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로서는 교주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명주님 마음을 받는 것이고, 그것은 신의 마음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사신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니까 그야말로 우리의 두뇌를 점령하여 여러 마음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주님 성언 등을 듣고 있으면 우리 마음속에서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지만, 전혀 포교 경험이 없지 않은가?」「인생이 힘들지? 교주님을 봐봐. 너의 마음 따위는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라는 목소리, 이것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삭임에 지고 싶습니다. 지고 싶어요. 지는 편이 자신을 주체로 하여 사는 길이 남는 것이기 때문에. 물론, 지고 싶지 않은 분도 많이 계시지만요(일동웃음).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의 진리를 받기보다 자신의 형편을 우선시하며 살고 싶기 때문에.

  그래서 그 속삭임이 들려왔을 때 우리는그렇다. 그렇다라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100%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것은 명주님 마음이 아니라고 하고, 그리고교주님 성언은 너무 어렵습니다라고 하거나교주님께서는 포교 경험이 없기 때문에 모르신다」「교주님께서는 내 처지와 같은 사람의 마음은 모르신다라는 등의 이유로 자신을 납득시키고, 그리고 결국 진정한 조레이인기도하라를 실천하지 않게 되어 버려 있습니다.

  이것은, 사신의 입장에서는됐다!이지요(일동웃음), 정말로. 이제 됐다 됐다 입니다, 사신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사신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약함을 발견해 오는 것입니다. 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하기 위해 이 사람에게 약한 것은 무엇일까 하며, 여러 생각을 우리의 마음에 불러일으켜 오고, 그리고 한편 우리로서는 자신에게 납득이 가는 설명으로 자신을 납득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이런 이런 이유 때문에 실천할 수 없다,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것이지요.

  그런선악의 싸움이란 것이, 우리 마음속에서 시종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쪽으로 마음을 향한다는 것은오라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신은 빛이심으로 빛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명주님께서는 빛이 있는 곳으로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빛에 비치면 결국 먼지나 더러움이 전부 보입니다.

  그러니까, 집이 지저분하면 사람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좀 안 되겠네요하며 거절하거나, 또는 손님이 와도 손님이 들어오는 곳만 깨끗하게 하고 다른 곳의 문은 전부 닫아버리거나 해서 보지 못하게 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마음의 움직임으로서는요.

  하지만 사실은 신께서는 그 문을 다 열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 실제로는 손님에게 엄청난 잡동사니 같은 방을 보여주지 않아도 됩니다만, 다만 신으로서는 너는 문을 전부 열고 너의 더러워진 곳을 전부 보이거라, 속속들이 드러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신이 제일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빛에 비춰지면 빛에는 살균 효과가 있으니까요(일동웃음), 살균되면 사신은 이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생겨나는 생각을(여러 문을) 여러 이유를 대며 닫고 있습니다. 자신은 닫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지만 명주님의 메시지는그 문을 열어라입니다. 용서의 빛이 나왔으니 이제 문을 열어라라는 것이 명주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교주님과 저의 표현이 아무리 부족해도, 또 교주님과 저라는 존재에 대해, 예를 들면 포교 경험이 없다든가, 교주님은 우리의 마음은 모를 것이다든가 라는 그런 비판 같은 것은 많이 있다 하더라도, 저는 그런 비판을 달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명주님 메시지는 영원불후이기 때문에, 이것은 역시 여러분은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의 빛이라는 것이 구원의 빛이고, 그 빛으로 신께서 차츰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면 세상은 더 좋아지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더 깨끗하고 더 맑아지게 되면 좋은 것입니다. 결국 그것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연말 대청소를 합니다만,마음의 대청소라는 말은 좀 어색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마음의 대청소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마음의 대청소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신께서내 빛으로 깨끗하게 하겠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진짜 대청소는 힘듭니다. 환풍기의 때는 어쩌지 라고 하는 것 등이 있기 때문에(일동웃음). 하지만 인간은 여러 스프레이 같은 것을 사용해서 그 때를 벗깁니다만, 그것에 반해 신께서는 신의 빛에 의해 우리의 마음을 일격에 깨끗하게 해버리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그 신의 힘을 신뢰하고 큰맘 먹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기적을 원한다」「기적을 원한다라고 말하지요.

  명주님의신을 보여주는 종교라는 유명한 성언이 있습니다. (1952101) 믿든 안 믿든 신께서는 기적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을 믿든 안 믿든 조레이를 하면 낫습니다. 그러니 대단하지요 라는 명주님의 뭐랄까 자랑이었지요. 그것이 명주님의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만큼 신의 구원의 힘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뭔가 인간이 열심히어때? 이 힘으로 낫겠지라고 하지 않아도, 열심히 믿지 않아도 낫는다. 그것이 명주님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믿든 안 믿든조레이를 받으라, 지금은 믿든 안 믿든기도하라, 믿든 안 믿든 기도하라 입니다.

  그래서 믿든 안 믿든 실천하면 뭔가 일어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온갖 이유로 실천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고 좀처럼 실천하지 않습니다.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이것은 기도, (), 음악 모든 것에 통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지금 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은 물론,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결코 강제는 아니지만 예를 들면 몸 상태가 좋지 않다든가, 의사가 사실상 포기했다든가 할 때, 믿든 믿지 않든, 명주님의 미륵세상의 채식이라는 것을 믿고 실천해 보면, 무슨 일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음악, 알아도 몰라도소리내어 불러보자하고 불러보면 무슨 일인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기도라고 해도, 이것은 옛날에 우리가조레이라고 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명주님께서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우리는 그저기도라는 새로운 말로 명주님의 조레이의 신업을 진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든 안 믿든 지금 구원의 삼 기둥인 기도, , 음악의 실천을 해봄으로써 저는 뭔가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듯 우리는, 어쨌든 계속 눈에 보이는 기적을 구하고 있는데, 명주님의신을 보여주는 종교를 배독하면, 메시아교는 어쨌든 의심해도 여러 이익을 가져다 주는 종교입니다 라고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익이라는 것도 어중간한 이익으로 기뻐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의사가 포기한 큰 병에 걸렸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아서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좋은 종교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성언의 액면적인 의미는 물론 있지만, 조금 전 명주님의 문장만큼 어려운 문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듯이, 진정한 의미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에게 버림받은 우리는, 의사는커녕 신으로부터도, 세상으로부터도 버림받는 죄인이었습니다. 이미 멸해가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명주님께서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나신 것에 의해 신의 생명이 있다, 인간은 70, 80세에 죽는 존재가 아니라, 실은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르렀습니다. 신께 받은 생명이라고 하면, 그것은 당연히 영원한 생명입니다.

  최초 명주님께서는 물질적인 기적으로 인해 신께서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명주님께서는 자신 안에 메시아라는 신적 영혼이 있다며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는 명주님이라는 존재를 본 것에 의해서(이것은 현세의 명주님이 아닙니다. 명주님 안에 계신메시아라는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실은 우리는 신을 본 것입니다. 신을 보여주는 종교의 말 그대로. 명주님의 모습 그 자체가 무엇보다의 증거인 것입니다.

  「범인의눈에 비쳐질수있으랴 매우존귀한 신--모습이 나타나신다해도라는 명주님 찬가가 있지요.

  그러니까 이미 나타났습니다. 명주님께서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나심에 따라 신의 모습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기적을 받아도 계속기적을 원한다」「기적을 원한다」「신을 보고 싶다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나신 명주님의 존재 그 자체가 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게다가 입니다, 이것은 명주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메시아라는 신의 모습을 받고 있습니다.

  때문에기적을 보고 싶다」「신을 보고 싶다라고 한다면 거울을 보면 되는 이야기입니다. 거울을 보고, 내 안에 신께서 살아계시네요.그 뿐입니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의사가 포기한 큰 병이 나아서,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야말로 전신전령을 쏟아부어도 되는 틀림없는 신앙이다」「신을 보여주는 종교).

  명주님께서는 이신을 보여주는 종교에서 메시아교는 자력이 아니라 타력으로 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런 타력은 없습니다. 거울 앞으로 가는 것 뿐입니다. 거울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조금 전에도 화장실에 갔더니 있었습니다(일동웃음). 거기에 가서 자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초창기 때는, 계속 병이 나았을 때, 정말 신께서 계신다의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명주님께서는 조레이는 두 번째 문제이고 상념이다, 나는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은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주님께서는신을 보여주는 종교에서 메시아교는 간단히 신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메시아교가 호소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특별하지 않다, 명주님만이 특별하지 않다, 전 인류 모두의 안에 신의 혼이 있지 않은가, 모두 신의 혼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거울을 보라고, 그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의 자녀가 아니라 신의 자녀라는, 정말로 대단한 존재로서 신과 함께 화해의 임무의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단 정화가 일어나고 그리고 교단이 깨져 버렸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가 깨져 버렸습니다 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배독한 성서에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겠느냐, 그러니 그들에게서 나와 따로 있어라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따로 있다기보다 더러워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당신의 입에서 뱉어낸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아슬아슬하게 신의 입 안에서 신의 침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있는 단계이지요.(일동웃음). 교주님과 맺어져 있다는 것은 명주님과 맺어져 있다는 것이고, 명주님과 맺어져 있다는 것은 신과 맺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뱉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더러운 것에서 떨어져 맑아지면 내 아들이자 딸로 삼아 주겠다, 나의 자녀로 삼아주겠다 라고 오늘 성서에 적혀 있었지요. 여기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들과 딸들이 되리라(고린도후서618)라고 있습니다. 되리라이니까 장래의 일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앞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이번에 교단을 나눠주신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신께 진정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입에서 뱉어진 더러운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신께서는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도 언젠가 반드시 맞아들이십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이번에 그런 일을 일으키신 것에 의해서, 먼저 일부의 사람들(여러분입니다)에게 당신의 마음을 나누어 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말하면, 그런 더러운 사람들이 없었으면 이라고 할까요, 이런 일이 없었으면 교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명주님의 마음인 신의 자식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확실히 받아들이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지금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도 그런 사람들 덕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단지 일부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여러 생각이 들지만, 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지금 우리를 양육해 주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오늘 명주님 성언은새로운 사람이 되어라였습니다. 명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워지라고 말씀하시지요. 21세기적 문화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21세기적 문화인.

  21세기로 말하자면 명주님께서는21세기라는 제목의 성언도 쓰셨지요.

  이 성언은 아시다시피 1926년 때 명주님께서 그 유명한종이와 붓을 준비하라2대 교주님께 말씀하시고 쓰신 내용의 성언입니다. 1926년이니까 입교 전의 이야기입니다. 오오모토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신기하게도, 1926년의 크리스마스, 1225일의 밤, 크리스마스의 밤, 명주님께서 뭔가 말하고 싶으셔서 하신 말씀이종이와 붓을 준비해라. 뭔가 말씀하고 싶으셔서 나온 말이종이와 붓을 준비해라입니다. 저는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입에서 나올 거라 생각하시고 말을 했더니 그 소리는종이와 붓을 준비해라이기 때문에 멋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신으로부터 백 년 후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인데, 그것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 저21세기의 논문이기 때문에, 그것은 2026년의 일입니다. 명주님께서21세기의 논문에 쓰신 것은 2026년의 일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은 이미 2024년이기 때문에 거의 도달을 했습니다. 21세기안에 쓰여져 있는 것은 이미 충분히 실현되어 있는 것도 있으며, 또 방향성으로서는 상당히 실현되지 않았나 라는 것도 있습니다. 어쨌든 명주님께서는 백년 전의 시점에서, 백년 후의 세계를 응시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2024년에 사는 우리는 21세기적 문화인이 되려고 하면 이미 늦습니다. 왜냐하면 명주님께서는 1926년 때 이미, 2026년 이야기를 하셨고 이제 그 2026년에 도달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2024년에 사는 우리는 앞으로 백 년 뒤인 2124년인, 22세기를 응시하고 걸어야 합니다.

  명주님 성언새로운 사람이 되어라가 쓰여진 것은 1950년으로, 그 때는 아직 1900년대, 20세기에 살면서 명주님께서는 21세기적 문화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고, 그것도 벌써 사반세기가 지나가려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는 22세기적 문화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명주님께서는 21세기에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는 남겨 주셨지만, 그럼 22세기적 문화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이 지금 이 메시아교가 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기도. 우리의 기도는 지금의 21세기 사람들이 보면뭐야 그게라는 내용입니다. 세상 사람이 없습니다, 없습니다,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있습니다, 있습니다, 있습니다 라고 하는 기도. 신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주무시고 계십니다 라고 하는 것을, 일어나 계십니다, 일어나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기다리지 않습니다 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설령 지금의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실은 이 기도야말로 22세기적 문화인으로서 적합한 기도인 것입니다. 또 식()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도래하는 미륵의 세상. 그 미륵의 세상은 채식이라고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것이 실현되지 않으면(명주님의미륵의 세상에는 전 인류는 채식으로가 실현되지 않으면) 명주님께서는 신의 성언을 맡고 계시지 않은 존재였다는 것의 증명이 되어 버리며, 또 명주님께서는 그저 거짓말쟁이의 교주였다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명주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식()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현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음악도, 지금 말한 것과 같은 기도에 있는 것처럼 신께서는 이미 나타나셨다, 빛은 이미 나타났다는 것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음악이기 때문에.

  이렇듯 명주님께서 1926년 크리스마스 날에 백년 후의 세계를 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응시하며 걸으셨듯이, 지금 2024년에 사는 우리는 22세기를 응시하며 걸어야만 합니다.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해 명주님께서는 미륵의 세상이라든가 여러 말로 표현하십니다만, 어쨌든 그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를 세우기 위해 신께서는 올해도 계속해서 나아가십니다.

  뭐, 그때는 여기 있는 사람, 저를 포함해서 아무도 살아있지는 않지요(일동웃음).

  하지만 이 지상에서의 신의 창조의 신업의 추이는 있겠지만, 이 진정한 기도를 통해 구원을 진행해 나가는 것은 우리가 죽더라도 천상에서 계속되는 것이며, 완전히 새로운 음악으로 신을 찬양하기도 하고, ()이라는 것도 또 다른 형태에서의 양육이 천상에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22세기는 이미 나는 죽었기 때문에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명주님께서도 백 년 후에는 이미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훌륭한 신의 미래를 이 세상에서 만들어 간다는 신업에 쓰임받으시고, 그리고 그런 미래를 향해 당신의 발자취를 이 지상에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명주님 신도인 우리는 22세기를 응시하고 새로운 시대를 신께서 계속해서 창조하신다는 발걸음 속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뭔가기도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오늘의 명주님 성언에도 있었듯이, 뭐야 종교야, 낡았다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새로운 것을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금 진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올 한 해, 신께서는 여러 일을 점점 새롭게 새롭게 새롭게 해 가십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에는 저항이 있지요. 우리는 현상 유지를 좋아하니까요. 하지만, 신의 쪽은 점점 새롭게, 새롭게 진행되기 때문에 그쪽 방향으로, 우리 성스런 가족으로서 함께 힘을 합쳐 극복하고 또 나아가고자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