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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으면 내가 운다 두견새야」마사아끼사마 성언 2024년 2월 4일 입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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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46회 작성일 24-04-22 18:05

본문

세계메시아교 입춘제마사아끼사마 성언

202424

 

울지 않으면 내가 운다 두견새야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입춘이네요. 24. 204라는 숫자, 24일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의미가 깊은 날이지요.

  먼저 195024. 이날은 명주님께서 그때까지는 불교적인 름인일본 관음교단일본 미륵교회라는 두 개의 단체를 쓰셔서 신업을 진행하시던 것을, 이제 불교의 시대는 끝이라고 하는 것으로 관음, 미륵이라는 것은 그만두시고, 그리스도교적인 말인 메시아라는 이름이 들어간세계메시아교라는 교단명으로 신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195024.

  그리고 이것은 교단명을 바꾸신 것만이 아닌, 세계메시아교로 하신 명주님의 의도는 메시아교라는 것은 기독교와 호응하여 인류를 구원나가는 것이라고, 그러한 것을 명확히 내세우신 것이 1950년의 24.

  이렇듯, 명주님께서 재세 중에는 계속 세계메시아교의 이름으로 진행하셨지만, 명주님 승천 후 2년이 지난 1957년 교단명이 세계메시아교에서 세계구세교로 바뀌었고, 그리고 나서 60년 이상 계속 세계구세교로 오고 있던 것을명주님 재세중의 교단명은 세계메시아교였으니, 이 세계메시아교라는 이름을 소중히 해야 하지 않은가라고 해서, 195024일로부터 70년이 지난 202024, 이 세계메시아교라는 이름이 교주님 아래 여러분과 함께 부활했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이 부활은 당연히 교단명뿐만 아니라, 명주님께서 세계메시아교를 세우셨을 때의 마음인 그리스도교와 호응하여 인류구제를 진행한다는 것의 부활이기도 한 것입니다.

  명주님께서는, 기독교와 호응하여 인류구제를 진행함에 전지전능을 다해 나가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지전능. 이것은 명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지혜와 모든 능력을 사용하시어 그리스도교와 호응하여 인류를 구제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 명주님 마음에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하여, 세계메시아교가 부활한 것이, 이것도 202024일이지요.

  또, 24일이라 하면 물론 201724일도 있습니다. 7년 전의 24. 이날은 뭐가 있었냐면 그 해 24일 입춘제에서 교주님께서 당시 우리는 세계구세교였는데, 그 구세교가 안고 있는 실정에 대해 신도 여러분께 발표해 주셨습니다.

  교주님께서는 그런 일을 하심으로써, 당연히 이른바 구세교 집행부로부터 여러 의미로 공격을 받을 것이다 라는 것은 알고 계셨습니다. 교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교주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 명주님의 진정한 마음을 구해만 하기에,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당신의 몸을 다해, 당신의 몸을 희생하셔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주님께서는 그 후 추방되셨습니다.

  교주님께서는 그렇게 교단의 실정을 신도 여러분께 이야기하면 그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셨지만, 그러나 명주님 마음 쪽이 떻든 위이기에 우리에게 교단이 놓여져 있는 실정을 전해 주셨습니. 이것도 201724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잊기 쉽습니다만, 명주님께서 교주님의 좌를 준비해 주신 것도, 이것도 1950년의 24일입니다. 명주님께서는 세계메시아교 활동을 시작하심과 동시에 교주님의 좌를 만들어 주셨고, 그리고 명주님 당신께서 세계메시아교의 초대 교주로 취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교주님, 교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 교주의 좌라는 것은, 195024일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지상에서는, 명주님께서 초대교주의 좌를 완수하시고 1955210일에 명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다음으로 2대 교주님께서 계승하셨습니다.

  명주님께서 돌아가시면 명주님 신업은 멈추는가 하면 멈추지 않습니다. 명주님 유언에 따라 2대 교주님께 뒤를 맡기시고, 교주를 통해 나는 활동합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대 교주님, 3대 교주님, 그래서 현 4대 교주님에 이르러 지금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24일이라는 날은 우리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며, 뭐랄까 흔히초심을 잃지 말자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 우리의 초심을 떠올리는 날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명주님께서 교주님의 좌를 준비해 주신 날이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와 호응한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때이기도 하고, 세계메시아교를 시작해 주신 날이기도 하며, 또 교주님께서 명주님의 진정한 마음을 구해 일어나주신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24, 204라는 숫자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초심을 떠올리는,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날이며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교주님께서는 오랫동안 우리를 교도주고 계십니다만, 그 중에서 우리 마음에 강하게 남은 교도의 하나로서 이런 것이 있지 않았나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라는 것.

  이것은 벌써 10년이나 20년 정도 전의 일인데, 당시 교주님께서 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교도를 주시고, 그것을 들은 우리는 그때, 확실히 그렇다」「러 가지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하는가, 그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아직 그 때의 교주님의 교도가 인상에 남아 있는 분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 생각하면, 먼저 그 그대로인 것이지요.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라는 그 성언 그대로의 의미를 먼저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또, 제가 생각하는 것은, 여기서 교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주시하면, 다음과 같은 것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이 성언을 교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당시, 교단은 교주님 중심이라기보다 교단의 활동 중심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사장 중심, 이사회 중, 교단 중심.

  지금처럼 교주님 성언(당시에는 말씀이었지만) 그것을 받는 것보다 교단이 진행하는 활동이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런 중에 교주님께서는, 그렇게 교단 주도로 진행되는 활동에 대해 이것은 이상하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활동은 있지만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 그 배후에는 있다, 그것을 실은 이 주인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한다 라는, 교주님의 교주로서의 자부심 같은 것도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라는 것대해서는 교주인 내가 알고 있다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그것인 것입니다.

  또 지금 우리의 활동과 당시 활동을 비교하면 전혀 다르지요. 만약 당시 우리가 하고 있던 활동이 정말로 명주님 마음에 맞는 것이었다, 교주님께서는 그 활동을 열심히 하세요, 그리고 그 활동은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주님께서 하신 말씀은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이기 때문에, 어쩌면 실은 당시에 우리가 하고 있던 활동에 대해서, 그것은 정말로 명주님 마음에 맞는 것입니까? 라는 것을 교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던지시지 않았나 라고 그렇게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교주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당시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교주님 성언을 받기 전의 우리는, 예를 들면 이무엇을 하는?라는 실제의 활동에 대해 100%로 노력했었다고 합시다.

  하지만 교주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 혹시 우리 마음속에 지금까지 인간의 힘 100%로 노력했지만, 약 신께서 일하신다 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인간력 100으로 노력하것을, 앞으로는 80정도로 하거나 70정도로 하고, 그리고 나머지 2030을 신께 해 받으려는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최대한으로 했습니다. 최대한. 하지만 교주님께서, 동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우리 마음속에만약 그렇다면 전처럼 최대한으로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은?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최대한 100이었던 것을 줄여나가서 80, 70, 50, 경우에 따라서는 0으로 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됐다, 신께서 활동하시니까 됐다, 나는 맡기고 있다 라고 하며, 교주님 메시지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우리는 이 교주님의 성언을, 최대한 실천하지 않기 위한, 최대한의 자신을 바치지 않기 위한 정당화로서 이용해 온 것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옛날에는 내 힘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나는 편합니다. 왜냐하면 교주님의 인도로 신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이제 나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지금 내 마음은 안합니다. 옛날에는 인력(人力)으로 열심히 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 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으니, 인력은 더 이상 필요없습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신께서 일하시니까라고 하면서 우리는 힘껏 노력하지 아도 된다 라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교주님의 메시지를 이용해 버리고 있던 측면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오늘의힘내라라는 성언에서, 신께 맡겨야 하지만, 우선 어디까지나 인력(人力)을 최대급으로 다해두고, 그리고 맡긴다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명주님께서는 인력은 최대급으로 다하셨습니다. 명주님께서는 신께서 계시다고 해서신께서 하신다면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아 안심이다. 지금까지 나는 계속 인력, 인력으로 노력해 왔지만, 제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는 신의 시대이기 때문에라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신께 맡긴다거나 신의 힘이 나타난다는 것의 의미는, 지금까지 인력 100으로 노력해 온 것을 조금씩 줄이고, 이제부터는 인간 50, 50이다 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명주님께서는인력을 최대한으로 다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인력은 최대한100 그대로인 것입니다. 100 100 그대로, 그리고 거기서 신께 맡긴다고 그렇게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저는 교주님께서 우리에게 교도를 주시게 되어,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 한다는 것에 대해서교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니까하며 교주님 성언을 이용하면서 타협해 온 부분이 있지 않을까 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구원의 삼 기둥 중 하나인기도. 이것은 옛날에는 조레이였던 것이지요.

  조레이. 이것은 우리가 매일같이 실천해 왔습니다. 매일 저는 조레이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3명에게 조레이 했습니다, 4명에게 조레이 했습니다, 오늘은 몇 시간 조레이 했습니다, 저 사람은 매일 조레이를 하니 훌륭하다고, 그런 말을 하면서 매일 최대한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최만년조레이는 두 번째 문제이고 앞으로는 상념의 세계이다.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시고, 그때까지의 이 손을 드는 조레이라는 행위에서 이번에는 기도하는 세계로 들어가셨습니. 명주님께서는 최만년에기도를 호소하셨습니다.

  조레이 때는 매우 알기 쉬웠지요. 보이는 형태가 있으니까요. 그래우리는, 저 사람은 아침부터 밤까지 조레이를 해서 훌륭하다든가, 늘은 정화자 방문을 다녀왔습니다, 병원에 가서 조레이를 하고 습니다, 훌륭하네요 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칭찬하거나 찬받거나 하는 것이 열심히 하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을 드는 조레이라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덕으로 하기도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기도라는 것이 돼 버리자, 예를 들어 눈앞에 두 사람이 앉아 있고 한 사람은 오늘 저녁 식사를 뭘로 할까 하고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어도, 옆에서 보는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까?(일동웃음). 신께서는 아십니다. 신께서는.

  하지만 결국 딱 보면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그것은 조레이 시대와다릅니다. 조레이 때는 저 사람은 조레이 실천을 하고 있으니 훌륭하, 나도 열심히 해서 좋았는데 기도라고 하는 것이 되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알 수 없다 라고 하게 됩니다.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한다명주님의 굉장한 표현이지요.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하는 것이니까 사람의 힘을 가장 크게 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활동에 자신의 전신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이 명주님 자세 속에는, 신께서 하시기 때문에 이 정도면 되겠지 라는 타협은 일절 없습니다.

  우리는 손을 드는 조레이를 하고 있었을 때는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은 그것이기도가 된 지금도 우리는 조레이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라는 것에 대해서도 성심성의껏 열심히 실천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기도가 진짜 조레이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많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분노, 불안, 초조함, 누군가싫어하거나 우월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생겨납니다. 하지만 실신께서는 신의 사랑의 손으로 그 우리의 마음을 감싸서 받아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진짜 조레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신의 조레이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생겨나는 마음을, 신이시여. 당신의 조레, 당신의 사랑의 손으로 저를 감싸주고 계시네요. 받아주십시오이것입니다. 진정한 조레이인기도의 실천이란.

  이기도를 우리는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해서 실천해야만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나머지이나음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어떻게 마주봐야 하는?

  물론 어떤 신앙 활동도, 그것을 실천할지 말지는 한 사람 한 사람자유입니다. 에 대해 실천하지 않는 분은 별도로 그것으로 좋습니다만, 실천하시는 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마주봐야 하는가?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하기보다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하는 정도의 마음으로 이 기도나 식이나 음악과 마주하고 있는 부분도 있지 않을?

  저는 왠지 서두에 소개한 교주님 성언을 이용하면서 타협하여 실천해도 되겠구나 라고 생각해 버리는 듯한 마음이 오랜 시간에 걸쳐 리 안에 조금씩 자리잡아 버린 부분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

  물론 교주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쪽에서 그것을 이용한 점이 있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명주님은 어떤 분이셨냐면, 당연히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하는 분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아시다시피 프래그머티즘이라는 것을 중요시 하셨던 분이기도 합니다.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시고, 자신의 생활방식이라는 것은 종교행위주의이다, 종교적 사고와 일상생활을 하나로 하시고, 종교적 생각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 간다, 행동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대단히 소중히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자연농법에 대해 말하자면, 명주님께서는 당시 일본 내에서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할 때, 또 먹을 것이 있어도 이미 농약투성이 비료투성이인 현상이 있어서, 명주님께서는 그것에 직면하셨습니다. 이제 먹을 게 없지 않은가, 있어도 농약투성이, 비료성이라 도저히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 명주님께서는 직면하셨습니다.

  명주님께서는 그때 어떻게 하셨을까요?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노력하자든가, 가능한 한 농약이 적은 것을 사자든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좀 나눠달라고 하자든가, 혹은 지금은 세상이 이렇지만, 신께서 분명 미래를 향해 바꿔주실 테니까 그때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을 하며 노력하자든가, 때를 기다리자든가, 그런 것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명주님께서는 그 사태에 직면하셨을 때 어떻게 하셨냐면,그럼 내가 직접 만들자입니다, 명주님께서는.

  먹을 것이 없다, 먹을 것은 농약 투성이, 비료 투성이라고 하는 태에 직면했을 때, 명주님께서는 그럼 비료가 적은 것을 사자라든, 무농약 채소가 세상에 많아지면 좋겠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농약을 친 것을 먹을 수밖에 없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명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실행력이 대단합니다. 그저 일본의 한 종교의 정말 작단체의 교조인데, 명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을 바꾼다, 일본 사회를 바꾼다 라고 하시며, 당신 단 한 사람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없으면 만들자라는 것입니다.

  이 명주님의 실행력, 이것을 우리는 잊고 있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 유명한울지 않는다면이라는 속담이 있지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울지 않는다면의 속담. 이 세 사람의 성격을 표현한 것이지요.

  다들 아시겠지만, 두견새의 우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새장 안에 견새를 두었습니다. 그 두견새가 울기를 셋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장면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이야기로 해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어땠냐면울지 않으면 죽여 버릴 터이니 두견새야입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두견새가 울지 않는다면 죽여 버리겠다, 그것이 노부나가입니다.

  히데요시는울지 않으면 울려 보이마 두견새야. 노부나가는 시원하게 죽여버렸지만, 히데요시는 창의적인 궁리로 어떻게든 두견새를 울게 하겠다, 이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울지않으면 울때까지 기다리마 두견새. 노부나가는 죽여 버린다,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울게 하겠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기다린다. 울지 않는다면 기다리자는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속담은 이야기로서는 분명 이에야스의 이기다림의 미덕이라는 것을 설한 것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최종적으로는 승리하지 않았고, 이에야스가 마지막에 남아 그 오랜세월에 걸친 에도정권을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추진하여 대성공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은, 그럼 명주님께서는 이 중 어디에 해당실까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명주님 방식은 어떤 것일까? 명주님은 세 사람 중 어느 쪽에 해당되실까,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결론적으로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명주님 방식라고 하는 것은울지 않으면 내가 운다 두견새야(일동 웃음)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울리려고 뭔가 궁리를 하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죽여 버리는 것도 아닌, 오히려 새는 소리를 어떻게 내는 것일까 를 연구해서 자신이 운다는(일동 웃음), 그것이 명주님 방식이 아닐까, 명주님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점은, 뭔가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죽여서, 즉 그 문제를 피하여 없었던 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궁리를 해서 그 때의 가능한 한 대응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의 자연농법에 대해 말하자면, 이미 없었던 일로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 무농약 채소를 나누어 달라든가, 좀처럼 완전히 하는 것은 어려우니 창의적인 생각을 해서 가능한 한 해 나가자든가, 혹은 신께언젠가 그런 시대로 해 주실 테니까 그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 라는 것도 아닌, 명주님이라는 분은, 즉 실행입니다.

  게다가 즉시 실행하는 그 정도가먹을 것이 없다」「좋아, 그렇다내가 만들자라는 것은 굉장히 긍정적이고, 이 실행력, 실천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생각했을 때, 지금 메시아교는 미륵 세상의 식()인 비건 식을 권장합니다만, 이에 직면하는 중에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좀 전에도 말했듯이, 결코 이런 식()을 강제하고 있는 것아닙니다. 하지만 실천하시는 분에 대해서는 그것과 마주할 때, 명주님 방식을 마주보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그것은 지금 말한 세 개의 속담처럼 죽여 버린다, 즉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려 이 문제는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혹은 창의적인 방법도 있지요. 명주님께서는 채식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뭐 어느 정도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노력하자 라는 방법.

  혹은 기다리는 자세. 그 시대가 신의 힘에 의해 오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것을 하고 기다린다 라는 자세.

  하지만 저는, 만약 지금 명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 명주님께이라고 하시지만 너무 어렵습니다. 세상은 육고기뿐이라 좀처럼 실천은 어렵습니다라고 한다면, 명주님께서는 바로그렇다면 나는 내가 만들겠다라고 말씀하실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명주님입니. 명주님의 삶의 방식이지요.

  게다가 우리의 경우는 각 개인의 식사로 큰 소란을 피우고 있는 인데, 명주님의 자연농법은 당시 일본인 전체를 생각하고 계셨습니.

  그 명주님의 대단함을 생각할 때 우리의 지금의 모습은 어떨까요?

  우리는 오랜 세월, 어느 새인가 이 명주님의 즉시 실행, 종교행위주의,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한다, 신께 있는 힘껏 바친다 라는 명주님식의 삶의 방식에서, 어느 사이에 세상의 상식 속에서 사는 것이 당연해져 버리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상식으로 보면, 한 종교의 교조가 농업을 시작했다해서 특별히 일본의 식량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라고, 그것이 세상 상식의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그런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명주님의 스케일은 엄청나게 큽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모든 사람에게 식재료를 골고루 미치게 하는 것에 마주하면, 거기에 여러 곤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명주님께서는 특별히 의식적으로, 뭐라고 할까요, 이 곤란을 어떻게든 극복할 거야, 라는 그런 외고집을 부리고 계셨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명주님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저에게는 불요불굴(撓不屈)의 정신의 나타남이지요. 여러 곤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지지 않는 것입니다. 명주님께서는.

  명주님께서는, 이런 이유가 있다, 저런 이유도 있다, 그래서 좀처럼 어렵다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명주님께서는 바로 실천하자 라는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설령 실패를 하셔도실패하면 이번에는 이쪽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또 다른 방향으로 도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주님께서는 불요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명주님식의 삶의 방식이란,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한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한다, 남이 아니라 내가 한다, 마음먹으면 즉시 실천한다. 이것이 명주님식 삶의 방식이 아닐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명주님 신도인 우리로서는, 교조인 명주님식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고자 합니다. 따라가야 한다고 해야 할까요?

  저 자신, 물론 이 명주님의 자세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예를 들어 식()에 대해 말하자면, 명주님께서미륵의 세상은 채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어떻게든 보답하고자 실천을 하니까, 뭐라 할까요 거기에 감동이 있습니다.

  「밥 한 입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당근 하나가 이렇게 맛있을 수」「양파 하나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라는 감동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맛뿐만 아니라 명주님 마음에 보답하고 있는, 보답하려고 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명주님께서 보시면 아직 병아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저 나름대로 열심히 실천하는 가운데, 역시 감동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당근 하나로 이렇게까지 감동한 적이 있었을까, 한 입으로 이렇게까지 감동한 적이 있었을까 라고 생각하면,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주님 성언을 실천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제가 맛본 감동을 맛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교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만물은 신께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는 , 이것은 지식으로서는 알고 있었지요. 알고 있었다고 할까요, 가르쳐 주셔서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만물이라고 해도 당연히 그것에는음식도 포함되지요. 음식도 우리 몸을 통해 신께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지금까지는 막연하게만물과 함께 되돌아가겠습니다라는 것은 제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감동 속에서이 당근 하나, 이 양파 하나, 신께서 흙을 준비해 주셔서 이런 대단한 채소를 만들어 주신다. 이 멋진 색깔, 이 멋진 모양. 신께서는 인간을 양육하시기 위해 이렇게 멋진 채소와 곡식을 준비해 주시고, 그리고 지금 이러한 것들이 신께로 돌아가고자 한다라는 그런 감동은 지금까지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오히려뭐든지 좋다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오늘 2대 교주님 찬가에 대자연의신력이라고 쓰고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대자연의 힘 앞에 세상 사람들이 무릎 꿇고 기도할 때가 온다 라고 있었지요.(-자연의 힘앞에무릎꿇고 세상사람들 기도할--는 가까워--)

  이 찬가는 확실히 여러 가지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물론 대자연의 힘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당근이나 양파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만(일동 웃음), 하지만 신의 힘으로 준비해 주신 이 대자연의 은혜인 만물과 함께 신 앞에 무릎을 꿇고만물과 함께 저를 받아주십시요라고 기도하는, 그때가 오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명주님께서는 더 큰 감동을 앞으로도 준비해 주실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만약 제 자신 안에서 명주님 성언을 어중간하게 마주하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라는 정도의 감각이라면,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감동을 맛보지 않았을 꺼라 생각합니다.

  명주님 마음에 보답하려고 하는 감동, 노력할 수 있는 감동은 물, 밥에 감동, 한 끼 한 끼, 매 끼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기도, , 음악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저 막연히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고 있는 목적이 뭐냐 하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신의 자식인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모든 존재를 거느리고 신께로 되돌아가 신의 자식인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것이 목적입니다.

  교주님 축사에도 만물을 새롭게 하여 사람 새롭게 태어난다는 취지의 성언이 있지요.

  이렇듯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신께서 돌아가야만 합니다. 돌아가서 새롭게 태어나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한 세 가지 활동입니다.

  분명 이 세상의 일도 있습니다. 보급시키자든가 실천하자든가, 런 것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활동의 진정한 목적은, 우리가 신의 자식인 시아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그 때문에 이 일들을 하는 것입니.

  「기도. 이 기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교주님께서 가르쳐 오셨지. 하루하루 속에서 여러 가지 생겨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내 안에 계시는 많은 조상님들의 마음이다, 그리고 신께서는 내 안에 계시니명주님과 함께인 메시아의 존명으로 이런 마음을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이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열심히 실천하려 해왔지요.

  당연히 내 안에는 전 인류도 만물도 연결되어 있지만, 보다 상징적으로는 우리와 연결된 조상님들의 구원, 이를 위해 이 기도라는 것을 계속 실천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최근 들어음악이 나왔습니다. 기도로 시작해서 이번에는 음악이 나왔습니다. 분명 음악도 혼자 부를 수는 있지, 기본적으로는 지금까지는 내 안에서 기도하고 있었고나와 조상님이라는 세계에서 완결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음악이 나와서 이번에는 가로가 넓어진 것입니다. 교주님을 통해 전해지는 신의 메시지, 명주님 메시지를 음악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확대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기도에 대해서도, 이 기도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전한다 라는 것은 있지만, 하지만 음악이나 노래라는 것은 더 확실히 가까운 사람에게 그것을 노래한다, 음악을 통해서 가사의 세계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로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라고 하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에서, 다음에 음악이 나온 것에 의해 이번에는 확대가 되었고, 그에 따라 전 인류가 포함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노래한다, 그것을 통해 류에게 신의 파동을 고루 미치게 하고자 한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나와 조상님이라는 기도에서 이번에는 음악이 들어온 것에 의해 가로로 확대가 된 것입니다. 전 인류라는 요소가 더해졌습니다.

  그럼 이제 뭐가 빠졌냐 하면 그것은만물입니다. 그러니까이지요.

  조상님이나 전 인류라고 하듯이, 인간, 인간, 인간뿐만 아니라 물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도 만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 상징적으로, 대자연, 산이라든지 강, , , , 음식이라든, 그런 것들입니다. ()이 시작됨에 따라 이번에는 만물도 포함되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기도때는 자신과 조상님. 물론 이것은 상징적으로입니. 그것은 결국은 자신 안에 전부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먼저기도라는 것으로 자신과 조상님. 거기서부터 이번에는음악으로 전 인류에게 신의 마음을 넓히지 않겠는로 되어, 마지막에 의해 만물도 더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세 가지 활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우리는 신과 자신에게 맺어진 조상님과 전 인류와 만물, 그 모든 것을 거느리고 신께로 돌아간다, 이것뿐인 것입니다. 이것뿐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 세 가지 활동은 뿔뿔이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로 하나인 것입니다.

  매일의 기도. 음악을 통해 주변에 신의 파동을 넓힘과 함께 신께 마음을 향하고자 한다. 그리고 식(). 먹거리를 통해서, 식에서 더 확대해서 예를 들면 자신이 입는 옷이라든가, 그 모든 만물은 신의 것이라고 인정한다.

  신께서는 이 세 가지에 관련된 모든 요소, 그것들을 빠짐없이 우리에게 돌려달라고 말씀하십니다.

  확실히 형태 쪽의 활동은 있습니다. 하지만 주된 목표는 오히려 그런 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신께 모든 것을 바치고 그리고 신께서 그것을 받아주시고 새로운 것으로 해 주신다,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신다, 그것을 위해 이 세 가지 활동을 신께서는 준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께서는 왜 이런 활동을 지금의 타이밍에 준비해 주셨는지 그 깊곳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뭔가 음악 활동에 있어서도 필요한 분들을 신께서 준비해 주시곤 합니다. 제가흙의 성지라고 했던 아프리카도 있지요.

  그런 일이 왜 지금 일어나고 있는지 그 신의 마음은 우리는 모릅니. 모르지만 몰라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모든 것을 거느리고 신께로 돌아가 새롭게 태어나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알건 모르건, 새롭게 태어난다는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이런 활동을 신께서 준비해 주신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그것을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하여 한다면, 신께서는 열심히 하는 우리의 그 모습을 보시고, 너를 받아주겠다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너희들에게 이런 활동을 주겠다, 그것을 통해 나에게 돌아오너라라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신의 의도라는 것은.

  세상에서도 비슷한 활동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다 같이 세계 평화를 기원합시다 라든가, 음악을 확대합시다, 이런 식사를 실천합시다 라든가, 그런 것은 세상에 여러 가지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거느리고 신께로 돌아간다, 이를 위해 이러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목적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롭게 태어난다.

  메시아교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신의 자식인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33).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그렇기 때문에 목적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신의 나라를 보는 것, 이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함으로써, 뭔가나는 신의 자식이라는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인간이라는 것에서 벗어나 더욱 신께 다가가 계속해서 더 위대한 존재가 되어 갈 수 있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틀림은 없습니다만, 우리는 내가 대단한 존재가 된다든가, 그쪽이 더 좋기 때문에어려운 이야기지만, 그런 것이 있다. 메시아라든가 신의 자식이라든가, 그런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구라는 부분에 자신의 마음이 가기 쉽지요. 하지만 진짜 목적은 신의 나라를 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신의 나라.

  신의 나라를 보는 것이 왜 목적이냐면, 신의 나라에는 신께서 계십니다. 신의 나라니까 당연히 거기에는 신께서 계십니다. 그렇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신의 나라에 가서 그곳에서 신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단지 나는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나서 사람도 치유할 수 있다, 이것도 할 수 있다, 저것도 할 수 있다, 위도 걸을 수 있다, 이렇다 저렇다는, 의미가 없습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신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롭게 태어나는 것은 신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목적입니.

  그리고 신이라는 것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영원히 신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것은 기쁜 일입니다만, 세상 사람들에게 메시아교를 알리고 싶다, 알리고 싶다해도 꽤 어려운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영원신을 섬기라고 하면재미없을 것 같다가 되어,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여기세상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입니다. 우리의 자세입니다. 결국 우리가, 섬긴다는 것을 소중히 하기보다 이 세상이나 자신의 형편이나 주체를 우선으로 하여 살아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우리의 진짜 목적은 새롭게 태어나 훌륭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태어난다라고 하면, 뭔가 자신이 점점 훌륭한 존재가 되어 가는 이미지를 가질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 나와 맺어진 조상님, 전 인, 만물, 이 모든 것들을 신께 되돌려드리고 그러한 것들을 새롭게 해받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의 것이 점차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훌륭한 존재가 되려고 하면 좀처럼 이 길은 걸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만물이라면 아직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신께서는 이번에는 생명과 의식과 혼, 이것도 모두 돌려달라고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신께서는 너의 생명과 의식과 혼, 이것들은 누구의 것이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우위에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평생 새롭게 태어나는 부분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은 명주님께서는 새롭게 태어나신 것에 의해 위대한 존재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조차도, 의식조차, 영혼조차신이시여, 이것들은 당신의 것이었습니다라는 으로 신께 대해 완전히 낮추셨습니다. 그러니까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는 위대한 존재가 되셨기는커녕 오히려 겸허하게, 겸허하, 겸허하게 되시고, 그리고 모든 것을 신께 되돌려드렸을 때 신께서그럼 너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겠다」「너는 나를 영원히 섬기는 나의 자식, 나와 평생 떨어지지 않는 존재이다라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큰 착각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명주님을 봤을 때, 또 내 삶이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것을 봤을 때, 우리가 그리는 방향성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모든 것을 거느리고 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쉬운 것 같지만, 전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자신이라는 존재에 매달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매달리고 싶기 때문에이 이야기 어렵다」「모르겠다」「좀처럼 실천할 수 없다라고 우리는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려운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간단하게 이야기해도어렵다라고 하고 싶은 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신께 대해서 그런 완고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우리 안에는 신의 나라인 천국은 존재하고 있으며 신의 목적도 이미 확실합니다.

 

  조금 여담에 들어가서 죄송합니다만, 얼마 전에 큰딸과 작은딸에게 밤에 잠깐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저와 큰딸 작은딸 이렇게 셋.

  그 때, 평소에는 거의 하지 않는데 드물게 뭔가 신앙 이야기처럼 되어서, 제가천국이라는 것은 여기(마사아끼님, 미간부근의 이마 천정(天庭), 혹은 천제(天帝: 조물주, 하나님)라고 불리는 곳을 가리)에 있단다. 천정(天庭)에 있는 거야. 여기에 아주 멋진 세계가 있어. 바깥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고 여기에는 진짜 편안함이 있단다. 그리고 여기에는 신께서 계시고 명주님께서도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와도 만날 수 있는 거야. 여기 있는 거야라고, 뭔가 그런 이야기를 딸들에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큰딸이 자신의 다리를 그 미간의 천정(天庭)까지 들어올리거나, 양손을 미간에 집어넣는 듯한 동작을 하면서떻게 들어가? 어떻게 하면 거기에 갈 수 있어?라고 하며, 열심점프하면서 천정(天庭)의 자신의 미간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일동웃).

  큰딸은 6, 작은딸은 4살 정도이고, 작은딸은 그 이야기를 들은 후 평소와 같이 제가 읽는 책을 들었는데(우리 집에서는 제가 영어를 좀 할 수 있는 관계로 아이들을 두 개의 언어로 키우려고 지금 말한 천(天庭)이야기를 영어로 했습니다만) 그랬더니 그 작은딸이 읽고 있는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미간부분을 매번헤븐(heaven:천국) 헤븐 헤븐이라 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켜서(일동웃음),여기에 천, 여기에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뭔가 그것이 재밌어서 큰딸도 저도 같이 세명이서 등장인물의 미간을 가리키며, 모두 천국 천국이라고 하며 계속 웃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생각한 것은, 둘째 딸은 아직 4살인데 신의 나라를 나온 후 아직 이쪽 세계에서의 시간도 짧으며, 그리고 또 아직 철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정도이기 때문에, 제가 이야기 한 것을 굉장히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 여기에 천국이 있구나라고 하는 걸로.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미간 안에도 국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래서헤븐(heaven), 헤븐(heaven)이라고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았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 큰딸은 이제 6세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나이가 되면 점차 간의 지혜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릴 때는 뭐든지 아들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생각한 것은, 큰딸은 마침내 이 멋진신앙라는 세계의 활동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 요는 보이지 않는다, 모른다 라는 것에 대해, 그것을 보이지 않아도 믿는다, 알지 못해도 믿는다, 라는 세계입니다.

  모두 다 미간의 천정(天庭)부분에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갈 수 없으(일동웃음), 그 멋진 천국을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줄 수 없는 것입니.

  그러니까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멋진 세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있습니다 라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때는 확실히 좋습니다.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좋은데, 그러나 거기서 더 성장해서 이번에는 드디어 홀로서기해서,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이 신앙의 세계를 붙잡고 가야만 합니. 그러니까 이 큰딸이 취한 반응을 보고, , 지금 바로 그녀는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순간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뭔가 그것에서 저에게 감동이 있었습니다.

  오늘 배독한 성서에도 보이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신앙이라했지요? 옛날 사람은 신앙에 의해서 신께 칭찬을 받았다고도 적혀 있습니다.(히브리서111~2).

  「보이지 않지만 있습니다.」「천국이라는 멋진 세계는 분명히 있습니다그것이 신앙이지요.

  분명, 보통 천국에 돌아가라, 돌아가라 해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천정(天庭)에 천국이 있다고 해도어떻게 들어가요?고 하며 큰딸이 한 일은 감각으로서는 어른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6세의 나이의 아이와 어른인 우리의 감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어른도 멋진 세계가 있다고 하면그럼 바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하기 때문에.

  하지만 신께서는 바로 결과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면,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이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1036). 믿으라, 당장 그것을 느낄 수 없지만 믿으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하늘에 있는 고향입니다(히브리1116). 그것이 여기(마사아끼님, 미간의 천정(天庭)을 가리키)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보이지 않지만 있습니다. 그곳에는 멋진 세계가 있고, 신께서 계시고, 신께서는 그곳으로 우리를 맞아들이시고, 다시 당신의 자식으로서 멋진 존재로 해 주겠다 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을 영원히 섬기는 것은 엄청난 기쁨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서두에 초심 이야기를 했지요. 초심초심을 잊지 말 것의 초심.

  그런데 진정한 초심은 더 옛날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우리를 천국에서 낳아주셨습니다.하늘에 있는 고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향이라는 것은 옛날에 있던 장소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실은 그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옛날에 신께서 그곳에서 우리를 낳아 주셨을 때, 신께서는 부모의 사랑으로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부모의 사랑에 자식으로 보답하고자 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만남이 있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맺어진 그 순간이 었습니다. 뭐가 초심이냐면 그것이 초심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초심. 그때 우리가 갖고 있던 것이 우리의 진짜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때 신께서는 우리에게너희는 이제 지상으로 가겠지만, 모든 것을 거느리고 다시 나에게 돌아와 줄 거지?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신께 약속하였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초심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 와서 더 이상 그때의 일은 모릅니, 기억나지 않습니다 와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몰라도 있습니.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고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일상생활의 전부입니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생겨나마음, 이웃관계, 식사, , 호흡, 아침에 일어난 후의 모든 일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돌아가서, 그리고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천국이 분명히 있다는 기쁨으로 기도를 드리, 노래를 부를 때도 그 기쁨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단지 옆으로 넓히는 것만, 전 인류에게 넓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 전 인류와 함께 돌아간다는 기쁨 속에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의 모든 것도 그 기쁨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 우리의 모습을 보신 신께서 좋다고 해 주신다면, 신께서는그럼 너는 내 자식이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그리고 신과 약속한 그 초심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붙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고, 그것에 부응하는 자식의 사랑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맺어지면 당연히 그것은 영원한 행복입니.

  그래서 구원의 삼 기둥이라고 해도, 그것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것을 거느리고 신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신께서는 그런 활동을 주고 계시기 때문에, 시 그것에 대해 인력을 최대급으로 다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한다인력을 최대급으로 한다는 것은 다르다고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어떻게 다를까 하는 것도 생각합니다만,열심히 한다라든가인력을 최대급으로 한다라는 그런 말도 있으며, 하지만효도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력이라든가 열심히 한다 라든가 그런 말은 무거워지지만, 그 말들의 의미는, 실은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하는 효도를 하고 싶은 마음인 것입니다.

  신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그리고너에게 사명을 주었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 사명을 받은 우리는신이시여, 사랑해 셔서 감사합니다.」「당신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습니다.는 그 효심, 그 마음이 우리가 노력하는 에너지의 동력원입니다. 그저 자신의 힘이나 인력으로 노력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효도하고 싶다가 우리의 동력원입니다.

  그래서 서두에서 이 입춘의 중요한 날에 초심을 떠올리자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사실은 천국에서(하늘에 있는 고향에서) 신으로부터 초심을 받았습니다.

  그 초심을 사실은 매일 떠올려야 하는데, 오늘은 입춘의 날이니까 더욱 더 함께 신의 초심에 관철된 사랑을 떠올리고,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는 정말로 기쁨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이렇게 오늘, 우리는 신의 초심, 진정한 초심을 떠올렸으니 오늘부터 또 우리의 순간순간을 신의 사랑을 위해 살아갑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