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에 사랑은 이긴다」마사아끼사마 성언 2023년 입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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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82회 작성일 23-03-30 23:17본문
「입춘제 ~세계메시아교 부활 3주년 기념식전~」
마사아끼사마 성언
2023년 2월 5일
「최후에 사랑은 이긴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해외 참배단분들이 오셨네요. 보통 우리는 해외 참배단이라고 하면「해외 참배단은 성지에 간다」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요.
하지만 이번에 오신 분들은, 교주님을 뵙는 것이 목적으로 브라질과 미국에서 오셨습니다.
미국도 멀지만, 브라질은 일본의 정반대, 일본에서 가장 먼 지구 반대편이기 때문에, 거기서 교주님을 뵙기 위해(그 때문에)오셨습니다.
일본에 있는 우리는, 교주님께서 항상 일본에 계셔서 그것에 익숙해져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외 참배단 여러분은 미국과, 또 더 먼 브라질에서 엄청난 수고를 들여, 오늘 이 자리에 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일본에 있는 우리는 교주님 아래에서 참배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반성하게 된다고 할까요, 생각하게 된다고 할까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이 교단 정화가 있어서, 일본이나 아프리카, 한국 등에서는 신도 대부분이 교주님을 위해 일어서 주셨습니다. 이렇듯 주위의 많은 분들이 그렇게 행동을 하면「자, 다 같이 일어납시다」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예를 들면, 브라질에서는 전종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은 거의 나서지 않은 상태이지요.
게다가 교단정화 때는 여러 정보가 복잡하게 뒤얽히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특히 일본에서 먼 브라질에서는「어떤 것이 정확한 정보인가?」하게 되지요.
일본에서는 교단 정화 중에 교주님 순교가 있지 않았습니까? 교주님께서 전국을 도시며 교단 정화에 대한 생각을 말씀하셔서, 그것을 들은 우리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그것이 없기 때문에, 매우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불확실해도 너무 불확실하지요. 그런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더구나 브라질의 경우는, 브라질 세계구세교밖에 없으며, 그 브라질 세계구세교는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일본 같은 경우는 세계구세교 주의 빛 교단(지금의 메시아교이지요)이 있었지요. 이것이 당시 포괄책임 임원회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세계구세교 주의 빛 교단은 더 이상 세계구세교가 아니라고 되었는데, 재판이 있었기에 재판이 끝날 때까지의 몇 년 동안은, 성지 안에서 제전도 할 수 있었고, 자신들은 세계구세교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재판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세계구세교밖에 없으니까 브라질 신도들에게는, 일본의 여러분들처럼「아직 우리에게는 세계구세교 주의 빛 교단이 있다」「거기로 이적하자」라는, 그런 선택은 없었습니다.
즉, 브라질 세계구세교를 나온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지금 세계메시아교에서 완전히 떠나서, 교주님 중심의 완전히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처럼 예를 들면, 만약 성지에 대한 집착이 있는 분이 계셨다면「그 집착이 해마다 조금씩 없어졌습니다」라고 하는 여유, 유예는 브라질 분들에게는 없었습니다.
브라질 분들에게 있어서는, 몇 년 전 교주님과 함께 일어나셨을 때 완전히 성지와는 결별한 셈이지요. 왜냐하면 브라질 분들은 브라질 세계구세교와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종교단체를 시작했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오늘 여기 와 계신 분들이 대표하시는 브라질 신도분들은, 굉장히 불확실한 교단 정화의 상황에서, 당연히 그동안 다니던 교회에서 나와야만 했으며, 또 대부분의 신도들이 일어서질 않으니까 그때까지 쌓아온 여러 인간관계가 없어진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참배하러 가셨던 성지에 대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교주님을 위해 일어서 주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단지「교주님을 위해서」라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요는 교주님 안에 명주님께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그 신념을 가지고 일어서신 것입니다.
우리는 해외 신도분들과 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해외 신도분들, 특히 브라질 신도분들이 보여주신 자세, 그 의지의 강함, 그것은 세계메시아교 신도로서의 귀감, 모범의 모습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항상 일본에서, 오직 일본인만으로서 참배하는 것 같습니다만, 실은 항상 그런 해외의 든든한 동료들과 함께 신앙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한 번, 오늘 해외에서 와 주신 분들에 대한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다함께 해외참배단 여러분께 박수를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주라는 것입니다. 속죄주. 이것은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죄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중요하게 여겨오지 않았습니다만, 교주님께서, 아니 실은 명주님께서 예수님이 속죄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지금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려 하는 것인데, 그것의 중요성을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속죄」라는 것은 평소에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일본어이기 때문에 사전을 찾아 봤더니, 그 의미는「죄를 갚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를 갚는 것. 죄갚음.
게다가 이 속죄주라는 것에 대해서 명주님께서는, 예를 들면 백 년 후, 이백 년 후, 천년 후에, 또 한 명의 속죄주가 나온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다른 속죄자가 온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이천 년 전의 예수님 단 한 분입니다. 우리 죄를 속죄하시는 분, 갚으시는 분은. 예수님 단 한 분. 그것이 이미 이천 년 전에 끝났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의 죄는 이미 갚아졌습니다.
뭔가 잘못을 하면 자주「죄값을 치뤄야만 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저 사람은 죄 갚음을 하고 있다」라고 하지 않나요? 그것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천 년 전에.
그러니까 그것은, 뭔가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서 지금까지 범해온 죄나 잘못이 있지 않습니까? 혹은 지금 뭔가 저지르고 있는 것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미래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내 자식이 터무니없는 짓을 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누가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그것은 이미 갚아졌습니다. 「갚아졌다」이기 때문에 과거형입니다. 이천 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여러분 한 분 한 분, 무죄라는 것입니다.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 세상에서 정한 법이라는 것은 있지요. 그것을 어기고 사회에 피해를 준다면, 이른바 교도소라는 곳에 가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교도소 같은 곳을 볼 때의 우리 시각이「저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값을 치르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보는가, 아니면「이미 죄는 갚아졌다. 하지만 우리 자신, 우리 자신이 어디서 신의 용서를 받았는지 모르니까, 그것을 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키시거나, 또 신께서 세상 사람을 쓰셔서, 소위 죄라는 일을 저지르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그것이 갚아졌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모습이다. 나는 이것으로부터 속죄되었으며, 죄 값은 치뤄졌다」라고 볼 것인가, 어느 쪽일까요?
속죄의 주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갚아주실 분은 더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우리의 죄와 잘못은 이미 갚아졌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무죄입니다. 무죄.
「죄갚음」이라는 것은「돈과 노력 등의 방법으로 죄와 잘못을 메우는 것」이라고 사전에 되어 있습니다.
돈과 노력. 노력이니까, 사회봉사 활동을 한다든가 하는 것이죠. 그런 것을 통해서 죄나 잘못을 메우는 것이 죄갚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활동이라는 이름하에, 계속 이 메우는 것을 해오지 않았나요? 죄를 메워야 한다 라고 하며 신앙활동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신혼닦이를 해야 한다, 조상님과 인연이 있기 때문에 나는 선행을 해야 한다, 좋은 일을 해야 한다면서, 계속 메워오지 않았나요?
하지만 죄갚음이 끝났다는 것은, 이미 메우는 것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세월, 우리 자신의 조상님의 인연이 있다든가, 우리 집안은 이렇다든가, 그러니까 신앙활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하며 계속 신앙해 오지 않았나요? 죄를 메워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이미 죄가 속죄되어 죄 갚음이라는 것은, 그 메우는 것은 끝난 것입니다.
병에 걸렸습니다. 이것을 우리는「아직 죄가 남아 있으니 속죄가 필요한 건가? 그래서 병이 난건가?」라고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닙니다. 이미 그 죄 메우기를 해주셨으니까요,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은 속죄주이시지요? 「죄갚음의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죄를 메워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범할 잘못에 대해서도입니다.
그러니까 교주님께서 이천 년 전부터 새로운 세상이 됐다고 하셨는데, 되지 않았나요? 왜냐하면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속죄해 주셨습니다.
이천 년 전 시점에서, 그때까지 살아온 사람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한 무죄 선고가 이미 내려졌습니다. 이천년 전에. 그러니까 그것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아니면 언제인 건가요?
야주전환. 명주님의 야주전환. 명주님께서는 그 야주전환으로 나온 빛은, 죄업소멸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언「대광명세계의 건설 광명여래」). 죄업소멸의 빛. 죄를 용서하는 빛이라는 것이지요. 죄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명주님께서는 이미 그 빛이 나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빛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지금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아직 빛의 세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세계에서 살겠습니다 라고 하며 문을 닫은 채 살아갈 것인가? 어느 쪽입니까?
오늘 제전 전의 피아노 연주 제목도「얼마나 멋진 세상인가/What a Wonderful World」입니다. 이미 지금 그 멋진 세계에 들어가 있습니다. 죄는 이미 용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속죄주이십니다. 피아노 연주를 듣고, 언젠가 그런 멋진 세상이 온다면 좋겠다 가 아닙니다. 벌써 왔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초래된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까지 이렇게 멋진 복음을 받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좋은 이야기인데 왜 진작 받지 않았을까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렇게 멋진 이야기이지만, 이 일은 우리에게 형편이 안 좋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죄인이 되지 않으려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앙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며,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어떻게든 잘 지키고 싶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으며, 또 이천 년 전에도 우리 조상님이랄까, 우리 인류는 그렇게 살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갑자기 신께서는 예수님을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 목적이 뭐냐 하면「너희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 예수를 보낸다. 너희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보낸다」라고 하셨습니다. 신께서는.
그것에 우리는 깜짝 놀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죄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죄인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열심히 신앙실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아니, 아니요, 저는 예수님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아니라 저 사람들이 죄인이니까, 속죄주가 필요할지 모르겠네요」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께서는「전 인류의 죄를 속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는 전원 일방적으로 신으로부터「너희들은 죄인이다.」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렇지요?
신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써 너희들 전원 죄인이라고 선고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형편이 안 좋았던 것이지요.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끔찍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 죄를 속죄한다고? 예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나는 이것저것 다 실천하고 있는 훌륭한 신앙인이며, 신을 믿는 훌륭한 존재이다. 그런데 내 죄를 없애러 왔다니 무슨 소리냐? 예수는 이상하다」라고 하는 그것이, 우리 생각이었고 마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면, 애써 지금까지「나는 착한 사람. 저런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로서 살아왔는데, 그「저런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과 같은 동료가 되어 버리고, 죄인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죄인이 되고 싶지 않지요. 애써 열심히 신앙 실천해서 자신이 우위에 서 있었는데, 어째서 저런 사람들의 동료가 돼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한 해결책은, 예수님을 죽여버리자, 그것이 우리의 해결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자신에게 형편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속죄주를 받아들여 오지 않았다는 것은, 단지 그 사실을 몰랐다, 알지 못했다 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나는 열심히 신앙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이 잠재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아 온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타애 실천도 하고 있습니다, 조레이도 하고 있습니다, 참배도 하고 있습니다, 봉사도 하고 있습니다, 헌금도 하고 있습니다, 신혼닦이도 하고 있습니다, 훌륭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필요 없습니다」라는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본에도 여러 종교가 있고, 거기에는 이런 가르침을 지켜야 한다 라고 하는 계율 같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궁극적으로는 모세의 십계명에 도달합니다. 모세의 십계명.
유대인들은, 십계뿐만 아니라, 모세의 십계명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규칙이 있어서, 그것을 지킨다고 하며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규칙을 지키고 있다, 우리들이야말로 정당하게 신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신의 큰 계획 안에서의 일입니다.
명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야 비로소 세계가 통일된다고 말씀하셨는데(1952년 10월 18일 강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그 큰 계획 안에서는, 메시아의 이름이 유대에서 나왔고, 그것이 우리에게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이 메시아의 이름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듯 우리가「메시아의 존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고 예루살렘에 가면, 사실은 유대교 사람들도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전 인류가 유대인을 필두로 신을 섬길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획이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은, 말하자면 사랑입니다. 사랑.
「신의 사랑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지요.
신의 사랑은 뭐냐 하면, 예를 들면 신께서는 아이가 빵을 달라는데 돌은 준비하시지 않는다, 신께서는 빵만을 준비하시는 분이다 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빵이냐 돌이냐 어느 쪽이냐 하면 신께서는 빵을 준비하신다, 그것이 신의 사랑이다, 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2023년 신년제 마사아끼님 성언「마음에 봄을」참조)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구나 라든가, 좀처럼 빵만 준비해 주신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든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또는 좋은 일과 나쁜 일. 신께서는 좋은 일밖에 안 일으키신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좀처럼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또는 너희들은 새롭게 태어날 운명에 있다, 나의 자식이 되기 위해 양육받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것도 있지요. 그것에 대해서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좀처럼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라는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혹은 우리는, 우리 안에 천국이 수립되어 있다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생각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생각하려고 합니다 라고 말하거나, 또는 우리가 무죄라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라고 하지요.
그런데 설령 우리가 빵이라고 생각하지 못해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해도, 천국이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해도, 죄가 용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신께서 빵만을 준비하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신을 믿을 수 없다며 아무리 우리가 신을 부정해도, 신이 어디 있느냐고 아무리 우리가 신을 매도해도, 여기 있는 우리 전원이 차츰 신을 떠나고 신은 없다며 아무리 신을 업신여겨도, 우리가 신께 대해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에 대한 신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신께서는, 나는 너를 위해서 좋은 일밖에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해서는 빵밖에 준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네 안에 천국을 수립했다고, 죄도 용서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보답을 구하지요. 나는 사랑을 베풀었으니 제대로 보답해 달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나는 이만큼 했으니 제대로 답례를 달라고 합니다. 또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는데 몇 십 년인가 지나면 그 마음은 사라지듯이, 변하기 쉬운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하지만 신께서는, 우리가 어떤 말을 하든, 무엇을 하든,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무상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몇십 년 흐르면 옅어지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불변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의 사랑이라는 것은, 무상이고 불변이며 영원한 사랑.
이것이 신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신께서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일밖에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신을 떠나든 말든, 신께서 우리에게 좋은 일만 하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부한 표현이지만「최후에 사랑은 이긴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최후에 사랑은 이긴다.
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신의 사랑은 최후에 이깁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을 떠나더라도, 신께서는 계속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가 느끼고, 아아 신께서 계속 사랑해 주셨군요 하며, 신의 사랑이 최후에 이깁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 변하지 않는 것, 절대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신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업신여겨도 사랑해 주십니다.
신께서는 그 사랑으로 너를 감싸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지금 당장 그 생각을 하지 못하더라도「아, 언젠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때를 신께서는 준비해 주신다」「그런 신께서 내 안에 계시는구나.」「그런 사랑이 있구나.」라는 식으로 여러분이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박해라는 것이 있지요. 박해. 현재 일본은 종교에 대한 박해같은 것도 있습니다. 종교라서 이렇다 라는 것 등이 있지요.
하지만 이것은 사실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일본의 경우는 이전에는 국가신도(國家神道)라고 해서, 국가가 인심(人心)을 교화시켰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쟁 후, 국가가 종교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인심(人心)의 교화는 국민에게 맡긴다고 하여, 국가로서 종교법인격을 부여함으로써, 그러한 단체에 국민의 인심(人心) 교화를 맡기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여론이「종교 이상하다」라고 하니, 국가는 자신들이 여러 종교단체에 인심의 교화를 맡기고 있는데, 정작 못 본 척을 하지 않습니까?
원래 국민에게「인심 교화를 하기 위해, 우리가 이런 단체에 종교법인격을 주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해야 하는데, 막상 여론이 반종교가 되자, 국가에 관여하는 분들은 못 본 척을 합니다.
하지만 설령, 지금 우리가 어떤 박해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우리 앞을 걸어온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께의 신앙이라는 것에 의해 예수님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예수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라고 해서 십자가보다 더 잔혹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많은 사람들이 처형 당했습니다.
일본에서도 국가가 기독교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금교령을 내렸고, 그 후, 예를 들면 나가사키 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습니다. 순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처형된 것입니다. 그 중에는 어린 아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처형당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택을 해도 됩니다. 죄의 속죄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을 속죄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만약 받아들인다면「어떻게 할까?」「좀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구나.」라는 그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처형당한 그런 열 몇살 정도의 소년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소년이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이어왔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주로 받아들이고 죄갚음을 끝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순교한 소년의 눈을 보고「받아들일 수 있을까?」「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나 편합니다. 미온적이고 편합니다.
우리가「예수 그리스도. 음, 그럼 믿어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라든가,「아직 받아들일 수 없지만 열심히 해서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해도, 전혀 죽임을 당할 위기로는 되지 않습니다. 굉장히 관대한 상태이지요. 미온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걸고 예수님을 속죄주로서 신앙해 온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목숨을 걸었다고 할까요, 실제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각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일본에서조차도 수백 명이나 처형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복이 많은 것입니까? 결단을 하는가 마는가의 유예도 있습니다. 결단을 하지 않아도 처벌당할 일도 없으며, 결단을 한다고 해서 처형당하는 일도 없습니다. 옛날에는 예수님을 속죄주로 받아들이면 처형당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예수님을 속죄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런 분들의 토대가 있었기에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그런 분들에게 너무나 죄송스럽습니다.
우리는 지금 목숨 걸고서까지 믿으라고는 안 합니다만, 하지만 그런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그런 분들이 목숨을 걸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고, 또 일본에서 조차도 주로 나가사키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왜 처형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 처형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이「죄 없음」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면(예수님께서 속죄주라는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역시 황송함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믿어볼까 라든가, 믿고 있는 나는 훌륭하다 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분들을 생각하고, 그리고 크게 삼가 황송함을 가지고「예수님을 속죄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속죄주로 받아들인 그 앞에, 이번에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저「예수님을 속죄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가 아니라, 그 앞에 있는, 전 인류 신의 자식인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나는 길. 이것이 명주님의 사명이었지요. 명주님의 사명. 전 인류에게는 무려 큰 두 번째 걸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것입니다.
명주님의 신업은 예수님의 신업과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토대, 예수님을 믿은 분들의 많은 피와 죽음이 있어서, 지금 우리는 명주님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신으로부터 맡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교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이 큰 두 번째 걸음의 구원의 복음의 길을 완수하는 것이, 나가사키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이 정말 보답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 그때 목숨을 걸고 이 신앙을 지키길 잘했다」하며 보답을 받습니다.
예수님도, 예수님 제자들도 정말로 보답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신의 마음을 성취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많은 죽음을 의미있는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단한 일을 지금 맡고 있는 것입니다. 1935년 명주님께서 입교하신 후 시작된 인류 역사가 아니라, 신의 더욱 장대한 계획을 지금 우리 손으로 성취한다는 곳에 와 있습니다. 그것이 맡겨져 있습니다. 세계메시아교인 우리에게.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순교자들은 모두 헛된 죽음이 됩니다. 우리가 만약 이대로 어중간하게 간다면 모두 헛된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헛된 죽음이고, 예수님 제자들도 헛된 죽음이고, 예수님 믿고 순교한 사람들도 헛된 죽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의 유일한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하지 않나요? 어째서 예수님만이 특별합니까? 어째서 명주님만이 특별합니까? 그렇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특별합니다. 신께 있어서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전 인류가 사실은 대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우리의 선구자들을 생각하고, 크게 삼가 황송함을 가지고, 또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덮쳐 와 있습니다. 세계메시아교에 덮쳐 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인류의 지금까지의 행보가 덮쳐 와 있습니다. 역시 그것에 어떻게든 보답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이야기 같습니다만, 그 열쇠는 실은 우리 일상생활 하나하나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으로는,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는 대단한 스케일의 이야기인데, 나는 오늘 아침에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해 버렸다든가, 쇼핑갔을 때 그 점원의 태도가 어떻다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든가 라고 하시겠지만 아닙니다. 그런 일상 속에서야말로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것을 통해서「아, 이것을 속죄해 주셨군요」「죄갚음을 해 주셨군요」「이것을 저는 구원하러 왔군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일상생활이라는 것은, 지금 언뜻 보면 큰 이야기와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돌멩이 같은 인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돌멩이 같은 인생 안에서야 말로, 신께서 빛나는 것을 준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이것을 나는 구원하러 온 것이다」「구원을 위해 나는 온 것이다」라고 하는 그 앞에「멋진 세계」를 신께서 계속해서 준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리고 우리 일본에 있는 사람들끼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 신도들과 하나가 되어, 서로 돕고 같이 생각하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자매이니까요. 신 이외에는 형제자매입니다. 신께서만이 특별한 지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니 메시아교 형제자매 모두가 손을 잡고 즐겁게 희망을 가지고 걸어갑시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