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사명」마사아끼사마 성언 2023년 풍양기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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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212회 작성일 23-04-17 23:01본문
풍양기원제 마사아끼사마 성언
2023년 3월 1일
「맡겨진 사명」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금 전, 여러분께서 아들 미코또의 탄생을 따뜻하게 축복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축하해 주신 것은, 저와 제 아내의 자녀때문이라기 보다는 미코토는 명주님의 현손(玄孫)이기 때문에, 명주님과 이어지는 존재로서 여러분들이 축하해 주셨다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그런 의미에서 명주님의 마음(그것을 지금 교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여러분과 함께 어디까지나 명주님의 마음 이 한 점, 이 한 점을 구해가고자 합니다.
저와 제 가족은,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는 것이고 우리 가족이 있는 것이므로, 교주님 아래서 앞으로도 여러분과 함께 명주님 마음을 구하며 함께 걸어가고자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풍양기원제이므로, 이 신전에 올려진 것은 씨앗입니다. 오늘은, 이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는 풍성하게 열매를 맺기를 기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세계메시아교와 관계가 있는 농가분들이 올해도 수확의 시기를 향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그리고 뿌린 씨앗이 풍성한 결실을 맺기를 우리 모두가 기원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성언에도 있었듯이, 명주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광옥은 2대 교주님께서 계승하셨고, 그리고 지금은 현교주님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요는 명주님께서는 지금, 바로 교주님을 통해서 활동하고 계시며, 교주님께서 계신 곳이 명주님께서 계신 곳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현재, 전 세계에서 명주님 아래에서 자연농법을 하고 있는 분들은, 교주님 아래에 있는 세계메시아교와 이어지는 농가 분들뿐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이 농가 분들의 사명과 책임은 막중하며, 또 평소에 그런 것들과 그다지 관련이 없는 농가가 아닌 여러분도, 오늘은 풍양기원제이니, 명주님 아래에서 우리를 대표하여 자연농법을 해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갖고자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풍양기원제라는 제전이 농가 분들에게 한정된 제전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3월이면 연도는 끝나고 4월부터는 새로운 해가 시작되지요. 이 단락의 때에, 일이 바뀐다든가 이동이 된다든가, 학교가 시작된다든가, 아니면 뭔가 나름대로 목표를 가지고 이것을 해보자 하며,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4월부터 걷게 되는 새로운 연도, 여러분의 목표라든가 꿈, 그러한 것도 풍성하게 결실을 맺기를 저는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농가이든 아니든, 4월부터 특별한 새로운 일이 있든 없든, 이 풍양기원제라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의 하루하루 삶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사실 신께서는, 우리에게 씨앗을 깃들게 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씨앗을 깃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마음」입니다. 마음. 신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음이라는 씨앗을 깃들여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풍양기원은 아니지만, 이 마음이라는 씨앗을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려고 남을 심판하지 말자,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하자 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 마음이라는 것은, 이제부터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신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깃들게 하시고, 그리고 그것은 이미, 지금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 중에는 그야말로 사과나 복숭아처럼 먹고 싶다, 맛있다고 느끼는 기분 좋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기쁨이나 긍정적인 생각 같은 그런 마음입니다.
반면에 자연계에는 너무 써서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열매도 있듯이,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은 원하지 않는다 라는 마음도 있지요. 분노라든지 질투를 한다든지 열등감이라든가, 가능하다면 자신이 느끼고 싶지 않은 부정적인 마음, 이런 것도 우리 안에는 있습니다.
그야말로 버섯처럼 종류에 따라서는 먹으면 죽어버리는 버섯도 있듯이, 우리의 마음이 표현되었을 때,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람을 해친다든가 자기 자신을 해칠 수 있는 것으로 이어지는 마음도 우리 안에는 있습니다.
그런 여러 마음이 지금,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이제부터가 아닙니다. 이미 지금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사과나 복숭아만이 신의 창조물이냐고 하면 그렇지 않지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쓴 열매도, 죽음에 이르는 버섯도 모두 신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신의 창조물. 먹으면 죽는 버섯 따위는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필요없는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신께서는 뭔가 필요가 있어서 그것을 창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마음도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이미, 지금,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신께서 마음이라는 씨앗을 깃들게 하셔서 기분 좋은 복숭아나 사과 같은 마음이 들 때도 있고,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쓰거나 매운, 기분 나쁜 마음이 들 때도 있으며, 또는 폭발하면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농가분들이나, 새로운 연도가 시작되어 올 한 해는 이것을 하자 라든가 하는, 그런 것들은 시간의 경과가 있지요. 일단 씨를 뿌리고 열매가 맺기를 기다리자, 이렇게 시간의 경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인 것입니다. 이미 지금 우리 안에서 열매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명주님 찬가에「긴-세상을 계획하여주-신 대신님께서 수확하실때-가 다가오고있도다」라고 있습니다.
수확할 때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이 찬가는 1948년경의 찬가이기 때문에, 벌써 75년 정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 수확할 때가 왔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신 신께서 수확하러 와 계십니다.
이렇게 신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수확하려 하십니다. 아니, 이미 지금 수확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맡긴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이 나쁜 생각도 맡기겠다든가 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맡기기 때문에 신께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수확하려 와 계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과이고 신께서 농부라고 합시다. 이렇게 가정했을 때, 사과인 우리로서는 농부가 와주지 않는 한, 나무에 매달린 채 꼼짝 못하지 않습니까?
농부가 와서, 우리를 보고「이제 수확할 때가 되었구나」라고 해야 비로소 수확이 되는 것이지요. 사과 속에서 갑자기 손이 자라서, 스스로 자신을 잘라낼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결국 아래로 떨어지고 말겠지만요.
그렇듯 주체성은 우리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주체성은 신이시며 신께서 받으려 하십니다. 받아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맡기든 맡기지 않든, 신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든, 신께서는 우리 안에서 항상 수확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를 들면, 오늘 희로애락의 여러 감정을 느끼며 하루를 보내지요. 신께서는 매일매일 우리 안에서 그런 여러 마음을 계속 거두어들이시고 수확해 주시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풍작인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풍작으로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여러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을 우리가 맡기든 맡기지 않든 신께서는 거두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면 10살의 어느 날 기쁨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80살 죽을 때까지 계속 그 마음만을 느끼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또는 10살 때,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해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물론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형태를 바꿔서 그 마음이 나타나기는 해도, 그 마음밖에 못 느낀다 라고는 되지 않지요.
맡기지 않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맡기든 맡기지 않든, 마음은 하루 종일 계속해서 바뀌지 않습니까? 그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그런 마음을 신께서 거두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되었네, 이것도 되었네, 수확할 때구나, 이것도 수확할 때다」라고 하시며 신께서 수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맡긴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만, 인간의 주체성으로 맡긴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맡긴다는 것은「아, 신께서 거두시고 수확해 주셨네요」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맡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사실「이미 베었다. 이미 수확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가 아직 잘리지 않은 것처럼「이제부터 제 스스로 알아서 가겠습니다」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미 거두어 주고 계십니다. 사실은 신께서 거두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이런 너의 생각을 지금 내가 받았다」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도 포함해서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체성을 가지고「맡깁니다」가 되면「당신은 맡기고 있습니까? 맡기고 있지 않습니까?」라든가「나는 실천하고 있다, 실천하지 않고 있다」가 되어 버립니다만, 그게 아니라「아, 받아주고 계셨네요」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맡긴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맡겼다고 해도 자신이 느끼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수확하고 싶으시기 때문에. 전 인류의 여러 마음을 모아 수확하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여러 마음이 매일 든다.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하며 80년, 90년 살아서 그것으로 일생을 끝내는가? 아니면 신께서 수확해 주시는 것을「아, 당신이 수확해 주시는군요. 저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있나요?」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가, 어느 쪽으로 할 것인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싶은지 아닌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이신 신께서는 여러 가지를 수확하고 싶고, 매일 풍작이고 싶어하십니다. 나도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그 신의 일의 일부가 되고 싶은지 아닌지, 그것만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런 말을 들어도「좀처럼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라는 마음도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지요. 천국이 내 안에 있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여러 일로 힘들어서 좀처럼 맡길 수 없습니다, 라는 마음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명주님의 성언「본교 구원의 특이성」, 이 성언의 시작은「본교의 사명은..」으로 시작됩니다. 「본교의 사명은..」입니다. 성언「본교 구원의 특이성」의 명주님의 첫 말씀은「본교의 사명은」으로 시작됩니다. 그렇다는 것은「우리의 사명은」이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명.
그것이 뭐냐면「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구하는 것이므로, 그로 인하여 사회를 천국화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구함으로써, 사회를 천국화한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었습니다. 큰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냐면, 명주님께서는 먼저 라고 하시지요. 먼저 자신이 천국에 올라가서 천국인이 되고 그리고 대중을 구원해 올려라, 그리고 그것은 마치 천국에서 지옥으로 사다리를 놓고, 우리는 천국인의 입장으로서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한 계단 한 계단 그 사다리를 올라가게 해주는 것이다 라고,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오늘날까지의 모든 종교와 다른 점으로 그것은 오히려 반대이기조차 하다」라고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본교의 사명입니다. 명주님께서는「먼저 천국에 올라가서」라고 하십니다. 먼저 자신이 천국에 올라가서 천국인이 된다는 것은 애초에 내 안에 천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올라갈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명주님 신도들에게 있어서는「좀처럼 천국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좀처럼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라는 것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천국에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자신 안에 천국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천국에 올라가도 된다 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천국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먼저입니다.
때문에 명주님께「좀처럼 내 안에 천국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내가 천국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라는 변명은, 일절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먼저」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엄격합니다. 명주님 신도라면「그런 말을 들어도 여러 가지 세상 일이 있어서 좀처럼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라는 것은 통용되지 않으니까요.
「모든 종교와 다른 점으로 오히려 반대이기조차 하다.」라고 되어 있지요. 세상의 종교나 세상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차츰 생각하게 되면 좋겠네요 라든가, 조금씩 노력해서 천국인이 됩시다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그 반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령 무슨 문제인가를 안고 있든 여러 가지 일이 있든, 그런 중에서 먼저 천국으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즉, 다른 종교에서는「좀처럼 생각되지 않습니다」라는 것은 통용되지만, 본교의 사명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천국으로 구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먼저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이기에, 본교에서는「천국인이라고는 좀처럼 생각되지 않습니다」라는 식의 변명은 통용되지 않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이미 천국은 있다는 것입니다. 없는데 먼저 천국으로 올라가라고 명주님께서 말씀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천국에 올라가면 내 안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그것은 똑같습니다.
「천국이 있다고는 좀처럼 생각되지 않는구나」「맡기는 것이 좀처럼 안되는구나」「아무리 들어도 생각되지 않는구나」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 대해서 계속「나는 아직이다」라고 생각하고 생을 마치느냐, 아니면 나는 이미 천국에 오른 입장이라고 믿고, 그 위에서 지금 말한 것처럼 신을 거절하고 천국을 거절하고, 천국이 내 안에 없는 것처럼 방황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 이 마음을 나는 구원하러 왔다고 생각하는가? 어느쪽인가 하는 것입니다. 느끼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에.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라는 것은, 천국이 없는 존재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하면「내 안에 신이 계신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천국이 있다고 들어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천국인으로는 되기 어렵다」이런 마음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원하러 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마음을, 천국에 올라가는 것을 미루는 재료로서 계속 쓰고 있습니다. 일단 자신이 천국인이라는 결단을 하지 않고.
하지만 명주님께서는「먼저」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명주님께 변명은 통용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것은 너희는 사실 이미 훌륭한 존재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구원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미 너희 안에 천국이 있지 않은가,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 인생의 일생 동안, 가끔 생각되었다, 생각들지 않는다, 좀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생각들었다 라고 하면서 끝내버리는 것인지, 아니면 먼저 천국에 올라가겠다고 결정하고, 그리고 자신 안에서 생겨나는 천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마음이나, 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지옥에서 괴로워하고 있으니까, 그런 마음이 듭니다) 또는 신을 믿을 수 없는 마음이나 그것을「나는 이것을 구하러 왔구나」「지옥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내 안에 있구나」라고 하는가, 어느 쪽인가 밖에 없습니다. 매일 실제로 느끼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천국에 돌아가겠다고 결단을 하든, 하지 않든.
물론 지금 말한 마음만은 아닙니다. 내 안에 솟아오르는 부정적인 마음 전부입니다. 질투라든지 적대심이라든지. 자신이 잘하고 있을 때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심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혼자 차를 운전할 때라든지 그럴 때입니다. 운전할 때 금방 짜증을 낸다거나 그런 마음. 일할 때는 괜찮은데 그러지 않을 때, 집이라든지 가족 관계라든지 그런 데서 많이 나옵니다. 우리의 진짜 모습은.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것을 꾸미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큰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도 안 볼 때라든지, 혼자 차를 운전할 때나, 나의 가족의 일이라든지, 아니면 직장이나 이웃이라든지 자신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생각, 저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는 마음, 그런 것에 대해 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런 마음으로 온갖 고생을 하는 인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을 구원하러 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명주님께서「본교의 사명」이라고 말씀하시기에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쭉, 자신을 받는 쪽에 두어 왔습니다. 어떻게든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수호를 바란다, 기적을 바란다며, 계속 받는 쪽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받는 쪽이 아니라 구원하는 쪽입니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구원하는 쪽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신혼닦기」라는 말로 상징되듯이, 더 맑아져야 한다, 조금이라도 신께 다가가야 한다, 천국인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며, 자신을 계속 받는 쪽에 두어 왔습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가 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본교는 그와는 반대이기에, 이제 우리는 구원하는 쪽의 입장입니다. 받는 쪽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오는 쪽.
그래서 거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우리 같은 죄인이 받는 쪽에서 구원하는 쪽의 입장이 될 수 있었는가? 왜냐하면 천양지차 아닙니까? 구원받는 쪽에 있는가, 아니면 구원하는 쪽에 있는가, 천양지차 아닙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명주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주, 속죄하시는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말로는 간단하지만, 하지만 죄로 얼룩진 우리가 어떻게 천국의 구원하는 쪽에 쓰임받을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에 의해 우리의 죄는 이미 속죄되고, 그리고「너희는 이미 천국에 가도 된다」라고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애매하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많은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아 이런 조상님들이 내 안에 계시는구나, 맡기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게 우리 인생에 고통이나 괴로움이 온다는 것은, 사실 우리는 기쁨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될 수 있는데, 이전에 신께 뭔가 등을 돌린 죄가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께 죄를 진 분들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가득 계십니다.
때문에 그것을, 그저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졌던 조상님이 제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맡기겠습니다 라는 것만으로,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 마음이 정말로 해소되는 일도 없으며, 또「나는 천국인으로서 쓰임받는다」라는 결심을 하기는 좀처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상님들의 총합체이지요? 총합체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를 들면 오카다 마사아키라든가 누구누구라고 할 때의「자신」, 그「자신」과는 다른 존재로서 죄를 지었던 조상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죄를 짊어진 조상님이「내」 안에 통합되어있는 것입니다. 선조의 총합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나에게 많은 죄인들이 맺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말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우리 모두 죄인이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죄인입니다 라고 책망할 목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말하려는 것은, 당신들은 그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그 기쁨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뭔가 느꼈을 때, 나는 아직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존재이다, 맑혀야 한다 가 아니라 우리는 그런 마음을 구원하러 왔습니다. 신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과거형입니다.
뭔가를 느꼈다면「아, 이것으로 용서해 주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생각을 제가 느끼고 있는 것이네요」라는 삶의 방식, 우리는 그런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보통은, 당신이 나쁜 짓을 했으니 이런 것을 해라, 죄갚음을 해라, 조금이라도 죄를 가볍게 하라 라고 말하면서, 100년 정도 지나면 인생은 끝입니다. 그런 인생이다 라는 그것만의 이야기. 하지만 명주님의 바람은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애초에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용서받았다, 속죄되었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죄인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거나, 조금은 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심하지 않다거나 한다면, 더 이상 속죄주를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거기서 해방된 기쁨을 느낄 일도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우리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기쁜 일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만일 그것을 받아들인다면(예수님의 속죄를 받아들인다면)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의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가 사하여졌다, 이 기쁨은 대단한 것이지요.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기쁨으로 포교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전 인류의 죄는 용서되었다, 그 기쁨이 있어서 지금의 그리스도교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보다 더한 기쁨,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명주님께서 최만년에 나타내주신「신의 자식인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 기쁨입니다.
이것은 속죄의 다음 단계입니다. 더 큰 기쁨. 하지만 먼저 첫걸음인 예수님의 속죄의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 거기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명주님께서는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나셨을 때, 이렇게 기쁜 일은 없다고 하시며, 2대 교주님과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기적 이상의 기적이다, 지금까지 기뻤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기뻐한 적은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명주님께 있어서의 기쁨이고 행복이며 기적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명주님의 기쁨이고 행복이며 기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실문제, 우리는 체적으로도 여러 가지를 받고 싶지요. 그런 중에, 기뻐하면 기쁜 일이 온다고 한다면, 그럼 기뻐하면 수호를 받을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기뻐하면 지금 안고 있는 이 문제도 해결되는 건가요, 이 병도 가벼워지는 건가요 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체적인 수호라고 하여도, 먼저「아, 지금까지 나의 기쁨이나 기적, 행복은, 이 세상을 주체로 한 기쁨이며 기적이며 수호였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쁨, 진정한 행복, 진정한 기적은, 신, 당신의 자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는가」라는 그것이 납득되지 않으면, 이 세상의 기적도 절대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영주체종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리, 이렇게 하면 체적인 문제도 좋아지는가, 이건 어떻다 저건 어떻다 해도, 명주님의 기쁨과 행복과 기적이 납득되지 않으면, 이 세상 쪽도 신께서 정돈해 주신다는 식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물질에—만 의지하여오로지 붙잡으려고 애써도달아나는 행복이란두글자」.
이 세상의 기쁨을 주체로 하고 있는 한,「뭔가 상황이 나빠졌습니다. 뭔가를 했더니 좋아졌습니다」라고 했는데, 다시 또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났습니다 라고 하는 것처럼, 행복을 몇 번을 잡든 그것은 도망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로, 명주님께서 마지막에 보여주신 기쁨을 모범으로 하여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명주님께서「그럼 이 세상 쪽도 정돈해 주겠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식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바라던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며, 바라던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받을 때도 있고,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신 입장으로서는「너에게는 좀 힘들 수 있지만 네가 진정한 기쁨을 붙잡기 위해선 이것은 꼭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것을 너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일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바라는 대로 완전히 기적을 받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받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똑같습니다. 어느 쪽이든 신께서는 우리를,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명주님께서 기뻐하시며 흘리셨던 눈물과 같은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우리를 양육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천국. 물질과 생명. 어느 쪽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는 중에, 2대 교주님과 3대 교주님께서는 교주중심을 굉장히 강조하고 계시지요. 원래 이것은 엄청난 각오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말만 하면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역시 말한 이상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신, 명주님의 마음에 대한 책임이 부과되기 때문에, 그래서 2대 교주님도 3대 교주님도 엄청난 각오로 말씀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3대 교주님께서는, 교주를 업신여기면서 성지중심, 성지중심이라고 한들 명주님께서 그 성지를 축복하실까, 아니다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2대 교주님과 3대 교주님께서 살아계신 교주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은, 저는 이것은「물질이 중요한가, 생명이 중요한가, 어느 쪽인가?」라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단 정화가 일어나면, 나는 성지중심이다, 아니 나는 교주중심이다, 라고 하게 됩니다. 이럴 때에 성지중심이라고 하는 성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성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경우의 성지와 교주님, 어느 쪽이 물질이고 어느 쪽이 생명이냐 하면, 성지가「물질」이고 교주님께서는 살아계신 존재이기 때문에 교주님께서「생명」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니까 2대 교주님께서도 3대 교주님께서도, 교주중심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만일 선택을 해야 한다면 물질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 생명을 선택하라 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서 깨우치게 해 주시려 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당연히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이라면 죽으면 끝이니까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그 생명은 이 지상의 생명이 아니라 천국이며 신께 소속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은 천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이기도 하고, 신께 돌아가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천국에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배독한 성서「마태복음(10장 26절~39절)」에 있었지요. 「너희는 몸은 죽일 수 있으나 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몸은 죽일 수 있어도 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 요는 인간은 우리 몸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지만, 하지만 우리의 영혼, 영원한 생명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차라리 영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그 분을 두려워하라」, 신이시지요. 신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생명을 생각하라, 신께로 돌아가라 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후, 굉장히 엄격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나」라는 것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고 또 예수님을 통한 신이십니다. 신께서 이 검을 주시기 위해, 이 지상에 와 계십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것은 굉장히 엄격한 성서 말씀입니다.
신께로 돌아간다, 천국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 천국을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든 혹은 입으로 말을 하든, 결국 우리는 신보다 자신을, 신보다 이 세상을 주체로 하고 싶은 마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길입니다.
여기 성서에 있는 것과 같은 선택을 모두가 강요받지는 않겠지만, 만약 신께서「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너의 아버지를 선택할 것인가?」「너의 자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선택할 것인가? 어느 쪽인가?」라고 물어 오셨을 때,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그때 결국「신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세상을 소중히 하자」라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면, 그것은 검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 것을 지키려면.
하지만 신께서는 실은「내게 돌아오면 평화를 주겠다」라고, 그렇게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족간의 문제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로 오면 네 가족 안에 평화를 주는 것도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신께로 돌아가지 않고, 내 아이가 더 소중하다거나 내 가족이나 동료가 더 소중하다고 하면, 결국에는 그것은 크게 말하면, 전쟁입니다. 가까운 가족의 문제도 확대하면 전쟁이지요.
그래서 오늘 2대 교주님의 찬가. 「차별없-는 신-의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세계는하나이고 인류는형제이리」.
「돌아간다면」이지요. 그저 인류는 모두 형제자매이다, 인류 사이좋게 지내자 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것은 보통 다들 말하지요. 세상을 좋게 해 나가자, 우리는 형제자매가 아닌가, 우리는 하나이다, 보통 세상에서도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은, 신께로 돌아간다면 입니다. 신께 돌아가지 않고는 우리는 형제자매가 될 수 없으며, 세계는 하나라는 것도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2대 교주님께서는 가볍게 말씀하십니다만「신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이라는 것은 대단한 성언입니다.
동시에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똑같습니다. 명주님께서는「먼저 천국으로 올라가라. 천국에 오른다면 너는 천국인이고 구원의 신업에 쓰임받는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러니까 신이나 천국을 빼고, 우리의 인간관계만으로 이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 친하게 지냅시다 하면 영원히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먼저 천국이며, 신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의 지금 생활에 평화가 올 일도 없으며, 인류 미래의 평화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풍양기원제.
지금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최초에 기원했습니다. 오래전 옛날, 마음을 받았을 때.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그리고 당신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신께 기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씨앗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농부가 뿌리는 씨앗은「이 농부가 나를 소중히 해 주니까 어떻게든 열매를 맺어서 이 농부와 함께 기뻐하고 싶다」라고 생각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씨앗이 그런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만물과 우리는 일체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우리도「신을 위해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했으며, 그리고 지금 결실의 때가 왔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 가지 느끼고 있는 것 자체가 신께 도움이 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마음을 신께서 수확을 해주시고, 신께서 자꾸자꾸 더 풍요롭게 해 주시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회를 천국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천국인이 되지 않고서 어떻게 사회를 천국화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아직입니다」「아직입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사회가 천국화가 됩니까? 개인이 확대되어 사회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교인 우리의 사명, 명주님 신도인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도망갈 길은 없습니다. 변명은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받는 쪽이 아니라 구원하는 쪽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명주님께서는「먼저 천국에 올라가서 천국인이 되어라」라고 하시기에.
그렇다는 것은, 먼저 자신 안에 천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확의 가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지금 느끼는 마음 그 자체「좀처럼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느끼는 마음 그 자체를「아, 신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내게 와 있구나」「아, 신이시여. 이것을 받아주셨군요」라고 한다면, 그것이 조금씩 확대되어 사회가 천국화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천국이 된다는 것은, 이 세계가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미, 지금부터 가능합니다. 왜냐면 그것이「본교의 사명」이지 않습니까?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있어도 되며, 병에 걸려 있어도 됩니다. 젊은 사람이든 연로한 사람이든, 지금부터 할 수 있습니다. 사회를 천국화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도 언젠가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금 빛나는 존재로서 많은 것을 구원하는, 그리고 그로 인해 사회,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이것이 명주님 신도의 사명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미루는 것은 끝났습니다. 미루기는커녕 그런 훌륭한 신업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입니다.
분명 지금까지 결단을 하지 않고 질질 끌려온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우리」라고 해도, 사실은「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사명이 있구나」「지옥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구나」라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세상에 평화가 오고 세상이 천국이 됩니다.
세상에서 뭔가를 잘 하는 사람이 있지요, 형태상으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왠지 열등감을 느끼고「나는 저 사람처럼은 할 수 없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조차「아, 이런 생각 자체, 뭔가를 실행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네요. 그것을 구원해 주셨네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구원이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모든 생각이, 신께 있어서는 풍성한 수확이 되며, 예외는 없습니다.
때문에 풍양기원제인 오늘, 기원하는 건 고사하고 사실은 이미 우리의 기원은 들어주셨고, 이미 지금 풍성하게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니「신께로 돌아가겠습니다.」「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결심하고,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이야기한 신업에 쓰임받는 것이 사회를 천국화하고, 세계를 천국화하는 것이 되며, 그리고 그것을 맡게 된 것이 명주님의 신도인 우리의 사명이니까, 그 맡겨진 사명을 받고, 함께 걸어갑시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