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교를 숨기지 않는다, 절대로」마사아끼사마 성언 2022년 조령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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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89회 작성일 22-10-13 14:34본문
「세계메시아교 조령대제」마사아끼사마 성언
2022년 8월 7일
「우리는 종교를 숨기지 않는다, 절대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종교」를 믿고 있지요.
세계메시아교는 종교이며, 우리는 그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종교라는 것이, 일본에서는 신도(神道)나 불교라는 기성종교는 비교적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전쟁 후 발생한 이른바 신종교, 신흥종교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모종의 비판적인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말 그 자체가, 이미「저 사람은 종교를 하는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신앙을 야유하는 듯한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 어떤 종교단체가 문제를 일으키면 많은 사람들은 어느 종교나 오십보백보로 여기며「다른 신흥종교도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실이지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장소를 임차하려 해도, 신흥종교의 교회로 사용한다고 하면 그곳을 빌리기조차 어렵듯이, 종교단체는 부당한 대우를 넘어 이제는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서는 종교단체에 대해 엄격한 눈으로 봅니다.
하지만 종교는, 이곳 일본에서는 국가가 종교법인이라는 법인격을 부여하여 활동하는 것을 허가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옛날에 일본은 국가신도(神道)로서, 모두 신도(神道)를 믿는 것이었지만, 전쟁 후 사실상 신교(信敎)의 자유가 확정되고, 그리고 국가가 종교를 추진하는 게 아니라, 일본 국민이 종교활동을 하는 걸 국가가 인정하고, 그리고 그런 종교단체를 통해서 인심을 교화해 간다는, 그러한 것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종교를 굉장히 비판적인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오기 같은 게 생겨서, 아무 문제 없을 종교에 대한 비판이 커질수록 오히려 그걸 더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물론 패션상의 문제는 있습니다만,「나는 종교를 믿습니다」라는 글자를 인쇄한 티셔츠, 아니면 머리띠 같은 걸 착용하고 거리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왜냐면 우리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오히려「신앙한다」는 것은 존귀한 활동인데, 그 일에 대해 이유 없는 비판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제 안에서, 이렇게는 되고 싶지 않다, 멋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세상의 비판의 목소리에 견디지 못하고, 종교색을 지운 듯한 활동을 하거나, 또 작게는 누군가가「직업은?」하고 물으면,「MOA 미술관과 관계있는 일입니다」라든지,「문화활동을 하고 있다」라든지 해서, 종교를 화제로 내놓는 것을 피하는 듯한, 종교를 숨기는 듯한, 그런 식으로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또 일본의 경우는「종교」라고 해서 꺼리는 경우가, 결국 유일의 신이라는 이유가 많지요. 일본인은 신도(神道)의 수많은 신이나 불교에 대해서는「종교」로서 거절은 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언은「신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도록」이라는 것이었는데, 일본인은「인연의 신」「축구의 신」「야구의 신」이라고 하는 식으로, 신도(神道)적인 의미로 신이라는 말은 사용합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유일의 신이신「신」, 그런 의미로「신」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유일의 신이라는 것에 대해, 일본인은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어서, 그것이 종교에 대한 거부감으로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명주님께서 자주 일본과 비교하셨던 미국은 어떤가 하면, 오늘 성언에도 있었듯이, 명주님께서는 미국 대통령 취임식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것을 보시고 대단히 감동하셨습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훌륭하다는 느낌이 드셨습니다.
지금 현재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일의 신을 믿지 않으면 당연히 당선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으면 미국 대통령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는「나는 신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것입니다.
또 미국의 돈입니다. 돈. 이것은 지폐에도 동전에도 영어로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것이「IN GOD WE TRUST」, 「IN GOD WE TRUST」, 그러니까 「우리는 신에게 의지한다」라는 식의 의미, 그것이 돈에 인쇄되어 있습니다. (의지한다= 신뢰한다, 믿는다)
삶의 양식인 돈, 그 돈에 보통 우리는 의지합니다만, 그 돈에 「우리는 신에게 의지한다」라고 찍혀져 있습니다.
의지한다 라는 것은 신뢰한다는 의미이지요. 우리는 신이야말로 신뢰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IN GOD WE TRUST」라는 것은, 찾아봤더니 미국 국가 전체로서의 모토라고 할까요, 표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미국의 국가적 표어는「우리는 신에게 의지한다」.
물론 이런 미국의 상황은 앞으로 바뀔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런 문자를 인쇄하지 않게 된다든가. 여러분도 미국의 모습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고 계실지 모르지만, 적어도 명주님께서는 신을 전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미국은 매우 좋다고 여기셨습니다.
명주님께서는, 미국에서는 한 집안에 한 권의 성경이 있는 것은 부럽다 고도 말씀하십니다(「일본인과 종교심」).
그래서 만약 지금 미국에서「IN GOD WE TRUST」라는 말이 돈에 찍힌 것을 알게 되셨다면, 명주님께서는「부럽다. 일본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라고 분명 말씀하실꺼라 생각합니다.
그런 신을 드러내고 싶으신 명주님의 기백에 대해, 우리는 오랜 세월 어땠을까요? 물론 메시아교가 된 이후로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농법에 대해서도 신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대자연의 힘」이라든가, 그런 말을 써오지 않았습니까?
「신」에 대해 조금은 말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오히려 어떻게 해서 신이라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을까 였지요. 발상으로서.
MOA 미술관이든, 조레이든 신을(종교를) 어떻게 드러내지 않도록 할까, 그것을 생각해 오지 않았나요?
조레이로 말하자면, 뭔가 과학적인 데이터를 모으거나, 또 예술에 관해서도「진정한 창조주이신 신을 생각해내기 위해 예술을 접하는 것입니다」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 온 적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오늘 찬가는 여덟 수 입니다만, 한 수 한 수 모두 훌륭한 찬가라고 생각하는데, 그 첫 번째 찬가에서「나는지-금 유신론을 내세워 무신론-의 잘못된-생각을 때려부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신께서 계시다는 것을 주장하며, 신이 안계신다는 그 잘못된 생각을 깨뜨린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명주님께서는 신이라는 존재를 세상에 내놓으려 하고 계십니다.
오늘의「신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도록」이라고 적힌 성언도, 그것은『도쿄 니치니치 신문』이라는 당시의 일반 신문에 명주님께서 쓰신 것입니다. 신도를 대상으로 한 성언이 아니라, 일반 신문에 명주님께서는 정치가도 신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은 훌륭하다고 그렇게 쓰셨습니다. 전혀 숨기고 있지 않으십니다. 종교이자 신을.
오늘 두 번째 찬가는 제가 좋아한다고 할까요「신을두려이 바른길을지키는 인간만듦이 나의소망이-요 사명인것이로다」.
명주님께서는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신앙 계승」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신앙을 계승하길 바라십니까?
명주님께서는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만들고 싶으신 것이기에, 만일 신앙계승을 한다면, 그런, 신을 두려워하는 신앙이야말로 계승해야만 합니다. 또 만약 메시아교에 들어오게 하실꺼면 신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전하시고, 그것으로 들어오게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을까요? 오히려 신체를 봉제할 수 있고, 조레이를 실천할 수 있다는 기준이지 않았습니까?
세 번째는「잘-못-된 문명을-나-는 바로세워서 신-의공적을 빛나게-하리라」.
신의 공적. 이상한 표현입니다. 신의 공적.
신의 공적이니까「신께서 이루신 공적」이라는 의미이지요. 신께서 이루신 공적을 나는 빛나게 하고 싶으시다는 찬가.
그렇다면 잘못된 문명이라는 건 뭐냐 하면, 그건 인간의 공적을 찬양하는 것이 잘못된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세워 신께서 이루신 공적을 빛내고 싶다.
이것은 신기한 찬가입니다. 왜냐하면 신의 공적입니다. 신의 공적. 신께서 뭔가 이루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이루신 것일까? 그것은, 우리 안에 완성된 세계를 이미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닐까요? 그 공적입니다. 그것을 지금 교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다음「그—어떠한 비난과헐뜯음도 오라고하라 나에게는깨뜨릴 양날검이있노라」.
그 어떠한 비난도 헐뜯음도 와라, 나에게는 깨뜨릴 검이 있다 라는 찬가.
「깨뜨릴 검」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신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힘이 있다.
지금 일본에서는 종교에 대한 비판,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면「신앙을 반대하는 가족에게 많은 말을 들을 것이다」라든지,「남에게 전하는 것은 그만두자」「교단은 어떻게 되어 버릴까?」라는, 그러한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이 신앙이 인간에게 필요한가 어떤가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와 이 세계메시아교라는 종교를 신께서 필요로 해주시는가 어떤가 입니다.
신께서 필요로 해주신다면, 설령 어떤 비판이 있더라도(아니,나쁜 일이나 세상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신께서 필요로 하신다면, 그것은 어떤 비판이 있더라도 어떤 비난이 있더라도 절대로 그것으로 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오로지신의 커다란—마음에 부합하여라 사람의이목에는 마음끌리지말라」.
우리는 계속 남의 이목에 마음이 끌려 왔습니다. 종교라는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어떻다느니 종교에 대한 비판이라느니, 그런 것에 마음이 끌려 왔습니다.
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신의 마음에만 보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는 주변 사람의 눈, 주변 사람의 입, 그것을 두려워하고, 사실 종교는 숨길 것이 아닌데 그것을 남에게 숨기는 마음의 움직임이 생기기도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신으로부터「너희는 더 이상 내게 필요하지 않다」라는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는 편이 좋습니다.
찬가로 되돌아와서 다섯번째 찬가. 「모든사람이 어둠속을헤매는 가운데에서 빛의길을용감히 나아가는우-리」.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종교를 하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어둠속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하지만 유일의 신을 믿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래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여기, 명주님께서는「용감히 나아가는 우리」라고 하셨지요. 이것은, 우리에게 겁이 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용감히 나아가거라 라고,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빛의 길을 용감히 가거라, 비난도 있을 것이다, 헐뜯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길을, 빛의 길을 나아가라 라는 것입니다. 「용감히 나아가는 우리」라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본래 우리는, 다음 찬가에 있듯이「칠흑같-은 어둠밤길헤매는 세상사람을 이끌어안내하리 광명의-이길로」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는 종교를 하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살고 있다, 나는 방황하지 않는다 라고 여기고 있지만, 사실은 신을 모르면 그것은 미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미아의 사람을 빛의 길로 안내하거라, 네가 걷고 있는 길로 안내하거라 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신을 아는 쪽, 세상은 모르는 쪽이라는 식으로 되지 않도록, 다음 찬가는 경고의 찬가이기도 합니다. 「무신론-과 유신론을묶-는 것이야말로 진정한-문화의 토대가-되리라」.
이것도 신기한 찬가입니다.
하지만 무신(無神)의 요소, 신을 믿지 않는 요소는 우리 안에는 없나요?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신을 모르는 사람. 저는 신을 압니다」라는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입신하기 전에는 신에 대해 그다지 알지 못했고, 신께 반발하는 마음은 지금도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면「신이 어디 있느냐?」가 되지 않습니까?
신이나 종교라는 것에 관해서, 지금 세상과 우리 안에 여러 마음이 생겨나지요. 신을 믿는 마음도, 신을 믿지 않는 마음도, 종교를 비난하는 마음도,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무신론자처럼 연기하고 싶은 자신이나, 혹은 신을 믿는다고 자신을 우위에 두고 싶은 마음의 움직임이나, 그러한 인간 마음의 모든 마음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라고 할까,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묶는다. 어디에 묶나요? 신께입니다. 그것을 신께「아, 이런 모습을 용서해 주셨군요.」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문화의 토대가 된다는 그런 찬가입니다. 이 찬가는.
이것은 간단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은 어디에서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종교는, 우리는 믿는다, 저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우리는 용서받고 있다, 저 사람들은 아직 용서받지 못한다, 이것입니다. 세상의 종교 전부 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나는 믿지 않는다, 저 사람은 믿는다, 그 세계입니다.
하지만 우리 메시아교는 그 전부입니다. 전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이나 주위 사람들의 여러 반응, 그 전부가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말을 걸었더니 거절당했습니다. 심한 말을 들었습니다. 보통은 그러면「저 사람들은 모르는구나」가 됩니다. 하지만 메시아교는 무신론과 유신론을 묶는 것이기 때문에「아, 이런 모습이 신께 대한 내 모습이었군요」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신도라는 것을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다거나, 참배하면 무슨 말인가를 듣게 된다면, 보통은「가족이 이해해 주지 않는다」로 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아, 이런 가족의 모습을 신께서 용서하시고 나타내 주셨군요. 이것은 제 모습입니다」라는 것이, 메시아교입니다.
그래서 부정재료는 하나도 없습니다. 메시아교에 있어서는.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해도 좋으며, 상대방의 반응에 대해서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도 좋습니다. 문제는 나타난 상대방의 마음이나 자신의 마음을 신께 어떻게 하느냐? 그것입니다.
그냥「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다」「나는 이런 사람이다」로 끝낼 것인가, 아니면「아, 이것을 신께서 용서하셔서 나타내 주셨네요」라고 할 것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 경우는 매우 가까운 사람일 때가 많습니다. 친구라든지 남편, 부인, 아들, 딸, 할아버지, 할머니, 이웃이라든지, 그런 상대의 모습과 나의 모습. 그 속에서 나타나는 무신의 모습과 유신의 모습을 포함한 모든 모습과 마음, 여기에 부정재료는 없습니다. 부정재료는 제로입니다.
신께서는「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그 마음을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이렇게 생각해라, 저렇게 생각해라, 이렇게 생각해라 입니다. 하지만 메시아교는「이렇게 생각해라」는 없습니다.
분노나 우월감, 열등감, 부끄러움이니 하는, 그런 온갖 생각을 가지고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그렇게 신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온갖 마음에 의해, 이미 엉망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심판하는데, 실제로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모릅니다. 인간관계도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형태상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부과할 일이 아닙니다. 「맡겨야 하는데 신께 맡길 수 없다」는 식으로 되어 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은 사실 내 안에서, 명주님께서 그것을 신께 이미 바쳐주고 계시기 때문에「아 명주님을 받겠습니다」만으로 됩니다.
「맡기겠습니다 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라는 반발의 마음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명주님께서 그 마음을 맡겨주시고 신께서 그것을 받아주셨다는 사인이니까, 뭔가 얽매어진 상황이나 생각에 부딪혔을 때는「아, 이것을 받아주셨군요」하면 되는 것입니다. 「명주님!」만으로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찬가. 「이도저-도 못하는-이세상 메시아-교 나오지않았다면 미래는어찌되리」.
세상은 막다른 곳까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신앙 전부는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막다른 곳입니다. 인류 전부가 막다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메시아교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만이라도,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생활하시면 그것은 인류 구원에 있어서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세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어떻게 되어 버릴까 로 끝입니다, 세상은.
우리 자신 안에 선악의 기준같은 것이 있어서, 이런 건 생각해도 좋다, 이런 건 생각하면 안된다 라는, 그런 틀이 있어서 그것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과감히 걷어내고, 그리고 무엇을 느꼈든 무엇을 생각하든「아, 구원을 위해 이 마음을 느끼고 있군요. 이 상황이 있는 것이네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문제가 하루 만에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얇은 껍질을 벗기듯이, 아 조금 달라졌다, 조금 달라졌다 라고 하며, 예를 들어, 그것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남편의 모습이나, 아이의 모습이 조금 달라졌다, 조금 달라졌다 라고 하는, 그 조금의 것이 인류에게 대단한 구원입니다.
그것은 인류 전부 수십억 명의 구원입니다. 수십억 명의 인류 플러스, 그 조상님 모두의 구원.
그러니까 한 사람이 변한다면, 그 한 사람이 많은 걸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일 자신 가까운 사람이 아주 조금이라도 변한다면 그건 대단한 구원입니다. 그것이 메시아교 여러분에게 맡겨져 있는 구원의 신업인 것입니다.
우리는「우리는 선이다. 세상은 악이다. 그러니 선의 세계를 밀고 나가자」라는 구원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도 있었듯이「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이지요?
우리는 메시아교가 부끄럽습니까? 이 구원의 신업이 부끄럽습니까?
이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신의 힘입니다. 그럼 부끄럽지 않지요. 아니 부끄럽다고 여겨왔을지도 모르지만, 부끄럽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는「종교다」라고 야유를 받고 멸시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신의 신업을 맡고 있기 때문에, 부끄럽기는커녕 대단히 명예로운 것입니다.
저는 교주님을 통해 이 구원에 눈을 떴습니다.
제 인사가 길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겠지만요. 오늘 성경「로마서」는 바울이 썼습니다. 「완수할 책임이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간절한 소원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그렇게 적혀있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이 솟구칩니다. 교주님을 통해 알게 된 이 구원의 복음을 어떻게든 여러분께서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든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알아주시길 바란다고 할까요, 함께 그것을 받고 있는 것이긴 합니다만.
제가「알아주길 바란다」라고 하기 보다는, 제 안에서 명주님께서이 저에게「너 이것을 말하여라 이것도 말하여라」라고 재촉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니, 인사가 긴 것을, 명주님을 핑계삼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일동 웃음).
하지만 그 정도로, 교주님을 통해 알게 된 이 구원의 복음의 훌륭함, 이것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면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그리고 더 이상 이도 저도 못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교주님께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하냐면, 종교라는 것이 비판은 있는 것은 알지만, 참된 종교라는 게 존재한다,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참된 종교. 그리고 그것이 세계메시아교입니다.
저 자신도 무슨 인연이 있어 이 진실의 길로 인도되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공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인간관계를 통해 메시아교에 맺어졌습니다. 그것은 우연 같지만, 사실은 필연인 것입니다.
신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도 저도 못하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처음부터 여러분을 명주님과 함께 선택해주시고, 그리고「어찌될까」하는 미래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빛나는 미래로 만들고 싶으셔서 여러분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이 구원을 모른다면 편할텐데, 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 사람 너무해」「내 남편 너무해」「아들이 이해해 주지 않는다」「저 사람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라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하지만 이제 여러분이 알아버렸으니까요(일동 웃음), 그러니까 도망칠 수 없습니다.
말씀이나 제 이야기를 듣는 중에 반발의 마음이나 여러 가지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것 할 수 없다든가, 나 혼자만으로 살아가고 싶다든가.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신께서는「나는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도 몸도 모두 존귀한 구원의 업에 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확실히 지금 세상에서는 종교에 대한 여러 비판이 있어서, 여러분도 여러가지로 고생이 있으실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종교, 신을 믿는 자로서의 긍지를 갖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명주님께서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명주님께서도 온갖 박해를 이겨내셨습니다. 그 명주님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 신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 것 때문에 앞으로 사람도 떠나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는 관계가 있었는데 세상에서 일제히 종교 비판이 시작되면 떠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종교 간판은 절대로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떠나도, 아무리 업신여겨도, 야유를 받든, 바보 취급을 받든, 종교 간판은 절대로 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류 한 사람 한 사람, 빛의 길로 인도되기를 대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신변에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대해서「신께서는 이곳을 구하라고 하시는구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얇은 껍질을 벗기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얇은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세계가 조금씩 조금씩 신과 맺어져 갑니다. 그리고 빛의 길로, 라고 명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은「빛」입니다. 빛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심과 그리고 그 구원을 맡게 된 자긍심, 이것입니다.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자긍심을 가지고 세상을 빛의 세계로 만들어 갈 때가 왔으며, 신, 명주님께서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이런 세상이기 때문이야말로 더욱 앞길을 정정당당하게 숨기지 말고 함께 걸어갑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