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지금」마사아끼사마 성언 2022년 11월 월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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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66회 작성일 23-01-05 20:12본문
11월 월례제 마사아끼사마 성언
2022년 11월 1일
「때는 지금」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참배석에서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다가 연단에 나오면「어? 뭔가 잊은게 있나?」라고 항상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아, 괜찮구나. 여기서는 마스크 안 써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요 며칠 아타미는 해가 나서 좋은 날씨였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흐리고 저녁부터 비도 조금 내릴 것 같은데, 그런 가운데 참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도 아직 추계대제의 여운이 남아 있는 듯 합니다. 추계대제에서는 물론 교주님께서 중심이시지만, 그 가운데 여러 발표도 있었고, 또 최근에는 코러스 메시아의 음악도 있었지요. 그리고 퇴장곡이,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브라질의 유명한 곡이었는데 굉장히 흥이 나서(흥이 난다는 표현이 부적절할지도 모르지만) 엄숙한 의미에서의「제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즐거운 축제라는 의미의「제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운이 아직 제 몸에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바쁘시겠지만, 역시 참배하러 오셔서 처음으로 느끼시는 것도 있을 것 같아서, 가능한 한 여러분과 직접 만나 신의 위력을 함께, 그리고 또 즐겁게 찬양하고 싶다고, 추계대제의 여운에 잠기면서 저는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추계대제 날에「교단의 제일(祭日)에 대하여」라는 문서를 교주님과 연명으로 냈습니다만, 그것은 명주님의「그리스교와 호응한다」거나「메시아교는 상당히 그리스도교에 가까워진다」라고 말씀하신 마음을, 더욱더 정면으로 받고자 하여, 올해 2022년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인「이스타」, 그 약 50일 후(49일 후이지요 정확히는)에 행해지는 성령이 내려온 것을 축하하는「성령 강림절」, 그리고 예수의 성탄을 축하는「크리스마스」. 이 그리스도교의 3대 축하일을 우리도 축하하자는 취지의 문서인데, 그 첫 번째로 먼저 올해 크리스마스부터 시작한다는 것으로,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본부 현관에도 포스터가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도 붙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부활절로 여겨지는 이스타가 가장 중요한 축제인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보다. 우리 느낌으로는 크리스마스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이미지도 있지만요.
이 새로운 움직임에 대해, 여러분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만, 여러분 한 분 한 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 이라고 할까요, 여러 목소리가 있는 가운데「이렇게도 생각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몇 분인가가 말씀 하셨는데,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어떤 목소리였냐면, 그것은, 지금까지 크리스마스는 즐기는 것으로 축하해 왔다, 그것을 그리스도교인도 아닌 우리가 종교적인 의미에서 축하해도 될까 하는 내용.
확실히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본래는요, 본래 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인도 아닌 사람들이 단지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성스러운 날인 것입니다.
일본으로 말하면, 정확한 수는 모르겠지만, 최근 수십년 간 그리스도교인은 크게 증가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 전역에서 크리스마스 장식 같은 것은, 매년 점점 늘고 있지요.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그 배경에 상업적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분명 거기에는, 크리스마스 라는 것을 통해서 예수의 존재를 전 인류가 받아들이게 하겠다는 신의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지금 말한 것처럼 상업적인 이유로 그리스도교인도 아닌 많은 일본인이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크리스마스를 즐겨온 것은 좋았지만, 앞으로 그리스도교인도 아닌 우리가 종교적인 의미에서 축하를 해도 되나 라는 발상은, 사실은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교인도 아니었는데, 상업적인 이유나 인간적인 즐거움으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해 온 것이 이상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입장에서는「여러분은 전혀 나를 믿지 않는데 이건 아니지 않은가?」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크리스찬 분들도 어떻게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래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한 종교의 교조인 예수가 탄생한 날을 축하하는 것인데, 그것을 지금까지 개인적이라고 할까요, 종교적 의미 없이 인간적인 기쁨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즐겨왔다면, 그것에 대해 우리는 죄송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또「올해부터는 제대로 하겠습니다.」「본연의 뜻대로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그리스도교인도 아닌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축하해도 될까?」라고 하는 것, 이것도 잘 생각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우리는 순전한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명주님께서 교조이시기 때문에. 명주님은 믿지 않는다, 예수님이야말로 믿는다면 그 사람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가톨릭이나 여러 개신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보통「그리스도교인」이지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 오늘 성언「천국 예언의 구체화」. 천국 예언의 구체화라고 하니까, 먼저 뭔가를 구체화하려 하는 것이지요. 무엇을 구체화하려는 것이냐면, 그것은「천국의 예언」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예언이냐 하면, 명주님께서는 이것은 예수의 예언이라고 하십니다. 명주님께서는「예수께서 예언한 천국을 구체화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는 것은 명주님께서는 예수의 예언을 믿고 계신 것이지요. 왜냐하면 믿지 않는 것을 그렇게 열심히 돈을 들여 구체화하는 것은 이상하니까요. 우선 이 점을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인들도 예수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실현하려 합니다.
그런데 요점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예수를 믿고 하려 하는 것과, 명주님께서 예수를 믿고 하려 하는 것, 이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명주님께서는 최종적으로는「메시아로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 메시지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예수 단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명주님께 있어서는, 보통의 그리스도교인은 진정한 예수 예언의 실행자가 아니라「나야말로 예수 예언의 진정한 실행자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실행한다는 의미에 있어서 명주님께서는 당신을「나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이다」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만약 이 성언이 존재하지 않고, 그리고 만약 교주님께서「나는 지금부터 예수 예언을 실행한다. 명주님 신도는 모두 그 사명이 부과되어있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모두 교주님께서 이미 그리스도교인 되셨다고 할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예수의 예언을 실행해야만 하나요 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이 성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정도로 명주님께서는 이 성언 속에서 과감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예수의 예언을 실행하고 구체화하는 것은, 명주님만의 사명이 아니라 그「사명을 부과받은 일원으로서의 우리들」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예수 예언의 실행자입니다. 그렇게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나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니까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이 맞나?」라고 생각하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예수를 믿고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교 단체에 소속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명주님조차 예수가 속죄주라고 하시고, 그 예수의 속죄가 없으면, 명주님도 우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성지(聖旨)」의「예수 없이는 명주님도 없다」는 것은,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역시 신의 신업에는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이렇다 저렇다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확실히 받아들여가자, 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스도교의 축하일을 축하하게 되면, 그리스도교처럼 돼 버리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충분히 알고 계시겠지만, 교주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에서는, 뭔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그 기적을 교회가 정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목적은, 요는, 여러 사람이 이것도 기적이다, 저것도 기적이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방치하면 수습할 수 없으니까, 일단 교단으로서, 이것은 기적입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라는 식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죽었다고 여겼던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이건 기적이다 라고 했을 때, 기적이라고 인정하기 위해서는「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라는 것이여야만 하기에, 몇몇 의사들이 와서 조사하고 그리고 이것은 과학적,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의상으로도 문제가 없다든가, 그러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기적으로 인정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을 인정하기 위해 조사하는 의사를 살리는 분, 과학을 만든 분, 의학을 만든 분, 이분은 누구인가요? 신이십니다. 신이시고 의학도 과학도 신의 일입니다. 신의 일이라면 사실은 그것도 다 기적입니다.
의학에 의해 병이 나았습니다 - 이것은 기적이 아닙니까? 이것도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의학을 만드신 것도 신이시지 않습니까?
대체로 의학이 좀 더 진보하면, 어쩌면 예전에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 지금은 의학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게 된다면, 그러면 그때 기적으로 인정을 해 버린건 어떡하지? 이제 와서 철회할 수 없나? 라고 하게 되는 건가요?
의사를 살리는 것도 신이시며, 의학을 만드신 것도 신. 그 하나하나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신의 일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렇게 특정 기적을 인정함으로써「이때는 신께서 활동하셨다」고 하며, 신의 활동을 한정적으로 해 버리는데, 우리가 가르침 받고 있는 것은, 기적은 그저 첫걸음이며 실은 두 번째 걸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걸음은 무엇이냐면, 그것은 어떤 때이든 모든 일에 있어서 신께서는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한 순간 한 순간이 기적, 모든 것이 기적이다, 그런 것입니다.
병이 낫는 것도 기적이고, 병이 낫지 않는 것도 필요해서 신께서 그렇게 하시는 기적.
사람과 화해할 수 있게 되면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화해하지 못한 채 상대방과 그냥 소원해지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 아닙니다. 실은, 그 둘 다 어느쪽도 전부 신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에 신께서 활동하고 계신다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라서 어디까지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더 테레사라는 분이 계시지요. 마더 테레사.
이분은 사랑의 사람이라고 해서, 정말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분에 대해 제가 들은 이야기는, 어떤 환자가 있는데 그 환자가 굉장히 이상한 냄새를 풍겨서, 모두 외면하고 싶고 한 발짝 물러나고 싶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 발짝 물러서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마더 테레사만은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앞으로 나와 그 병자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사랑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1000명이 있는데 999명은 한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만은 한발짝 앞으로 나와 사랑의 손을 내밀었다. 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온 한 사람을 칭찬한다는 것입니다. 신의 사랑이 마더 테레사를 통해서 나타났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 그 나머지 999명, 한 발짝 물러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신의 사랑은 그 999명 안에는 나타나지 않는 건가요?
그 한 발짝 앞으로 나온 한 사람이「나를 통해 신의 사랑이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 나머지 999명 중 누군가가「아,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다니 사랑이 없는 인간이구나.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런 모습도 신께서는 용서해 주셨네요. 저는 완벽하게는 못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이런 나조차도 당신은 사랑으로 채워주고 계시네요. 감사합니다」라고 한다면, 신께서는 그 어느 쪽 마음에 기뻐하실까요?
어쩌면 오히려 999명이 뒷걸음질 쳤기 때문에, 누군가 한 명이 그런 역할로 한 발짝 앞으로 나오는 힘을 신께서 주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한 발 앞으로 나온 사람에 대해서「이 사람의 사랑의 힘은 크구나」라고 보지요. 저 사람에게는 사랑의 힘이 있다, 훌륭하다, 나는 할 수 없다 라고 하며, 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있다,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다, 라고 하지요.
그렇듯 그리스도교에서는, 예를 들어 사랑이 있는 사람이 되라, 한 발짝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교주님 아래에 있는 우리는 무엇을 말하냐면, 그것은 어떤 행동이든지입니다. 한 발 앞으로 나가든, 언뜻 보기에 마이너스라고도 보이는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모습, 그 모든 것을 들고 신께로 돌아가라,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시는 것이 신의 사랑이라고,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교와는. 메시아교에서 설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설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진실에 눈 뜨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제가 생각하는 것은, 자주 교주님 말씀은 어렵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은 쉽다 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에 우리의 일종의 착각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쉬운 가르침이라고 느끼는 것은, 어떤 사람도 사랑합시다 라든가,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자든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자든가, 그것을 우리는「이해하기 쉽다」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오늘 제가 아까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나 뭔가를 인용해서 마더 테레사처럼 됩시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라고 하면 알기 쉬운 이야기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훌륭한 이야기다 라고 할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살아가자, 이타애로 살아갑시다 라고 한다면, 그렇다, 그렇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아가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 제일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모두를 사랑합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삽시다 라는 것은 가장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는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께서는 가능합니다. 신의 사랑이 이타애이기 때문에.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가장 어려운 이야기를「쉽다」고 느끼는가, 그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그런 걸 쉽다고 느껴왔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편하고 듣기 좋지요. 그런 이야기에「아 그렇다」라고 해오지 않았나요?
교주님께서는「있는 그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흙투성이로 와라」라고 하십니다. 「신께서는『진흙투성이로 나에게 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런 간단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타애를 실천합시다. 남을 위해 힘씁시다 - 이런 어려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교주님께서는 이타애라든가 남을 위해 힘쓴다든가, 그것이 되든 안 되든 좋다, 있는 그대로 신께로 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교주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간단한 것을 왜 우리는 어렵다고 느끼냐 하면, 이것은 우리는 그것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간은(우리는) 있는 그대로 신께 간다는 것이 사실 무서운 것입니다. 자신의 주체성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자신이 우두머리, 자신이 왕. 그래서 그런 우리에게 있어서는 누군가를 사랑합시다 라든가, 남을 위해 힘쓰자는 것은 굉장히 듣기 좋은 것입니다. 「아, 이 이야기는 내가 신께로 가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이다, 나의 노력으로 나의 덕을 높일 수 있는 이야기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신께 진흙투성인 채로 가는 것의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에게는 굉장히 편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훌륭한 이야기라고 느끼는 것이지요.
반대로「너희들은 이미 원래부터 신 곁에 있지 않았는가?」「그러니까 이제 지금 그곳으로 돌아가세요」라고 한다면, 실은 우리에게 불편한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의 상사가 좋은 상사면 좋겠지만 싫은 상사라면, 그 사람이 계속 쭉 출장을 가면 좋겠다 고 하지요. 출장가서 쭉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사 없이 동료들과 이렇게 즐거운데 왜 돌아오는 것이냐 하는. (일동 웃음)
신께 대한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잠재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있는 그대로 돌아오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떻게든 회피해야 한다, 하며 여러 가지를 무의식적으로 자신 안에서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있는 그대로는 좀처럼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와 같은 식의 말을 하고, 그 순간에 신께 되돌아가는 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얼마나 늦추느냐 하는 것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교주님 말씀을 어려운 것으로 해 두고 싶은 것입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고 그런 식으로 해 두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잠재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은 진흙투성이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진흙투성이입니다. 우리 마음은. 아니 마음 중심에는 수정처럼 빛나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정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은 진흙투성이입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모든 행동과 행위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진흙투성입니다. 우리 마음은.
진흙투성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부끄러움」이 되어, 그것을 우리는 부끄럽다고 여깁니다. 진흙투성이로는 신께로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의 저는 부끄럽습니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실은 진흙투성이를 찾고 계십니다. 신께서는「그 진흙을 깨끗이 해주겠다」「그 진흙을 제거해 주겠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마사아끼님 추기 : 그리고 사실은, 이미 진흙은 깨끗이 해 주셨습니다. 진흙은 일절 없습니다. 부끄러움도 없애 주셨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진흙을 제거해 주 셨군요. 부끄러움도 다 없애 주셨군요.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을 함께, 메시아의 존명으로 신께 바치고 새로운 마음을 받았음을 여러분과 함께 확인하고자 합니다. 「문-명-의 낡-은-옷-을 벗어던지고 새로운-옷으로 갈아입는신-업」「새-로-운 세상은-새로운 땅-위-에 수립되어야-만 하는것-이니라」「평-온-한 아-름-다-운 천-국-은 수립될-것이리 맑혀진이땅위에」「내가 또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으리라. 내가 너희 육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 같은 마음을 주리라」(에스겔서 36장 26절).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내시며, 다시는 사망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이 없고 고통 또한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음이라」(요한계시록 21장 3절~4절).
교주님 말씀과 관련해서 조금 이야기는 바뀝니다만, 자주 듣는 목소리로「조상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조령사는 필요없지 않은가?」,「신께서 내 안에 계시다면 신체는 더 이상 필요없지 않은가?」,「교회가 내 안에 있다면 모이는 장소가 없어도 되지 않은가?」「명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면, 신영은 더 이상 필요없지 않는가?」라는 그런 말을 합니다.
이제 이 세상은 천국이 되었으니, 세상을 바꿀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되지 않은가 라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예를 들어 저희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좌반신이 마비가 되었습니다만, 그 재활 치료에 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까?
만약「내 안에는 완성된 영의 몸이 있으니까」라고 한다면 재활을 열심히 할 의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몸의 왼쪽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재활하시나요? 아니요 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는 영의 몸이 있기 때문에, 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움직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재활을 하지 않습니까?
만일「이제 모두 다 천국이니까」라고 한다면, 죽을 힘을 다해 재활할 필요가 있나요?
좌반신은 마비가 되었지만 영의 몸은 제대로 움직인다 라고 하며, 죽을 때까지 재활도 하지 않고 계속 누워만 있어도 됩니다, 라고 하나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도와주시는 교주님께서도 열심히 하십니다만, 만약 교주님께서「이 모습도 천국의 나타남이기 때문에,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시다. 바꿀 필요는 없다」「영의 몸이 있으니 괜찮지 않은가?」라고 하시며 그렇게 열심히 도와주지 않으셔도 되지 않습니까?
저도 오늘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여러분 안에 신께서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러니 여러분께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고(일동 웃음)「여러분은 훌륭하십니다.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로 끝이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역시 그것에는 이른바 진보 향상이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교주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명주님의 마음을 함께 받고 그 마음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한 걸음이라도, 반 걸음이라도, 0.5걸음이라도 가까워지려는 노력, 이것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저는 인간적인 의미에서 교주님만큼 노력하시는 분을 잘 모릅니다. 명주님 마음 실현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주님 말씀의 일부를 나에게 편하게 이해하고 이용해서, 천국이 이미 만들어졌다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할 필요가 없다든가, 조상님이 내 안에 있다면 더 이상 조령사는 필요없다든가, 신께서 내 안에 계시다면 더 이상 신체가 필요 없다고 합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제 이 지구도 필요없습니다. 더 이상 물질 자체 그 무엇도 필요없지 않습니까? 지구도 필요없고 전 우주도 필요없으며, 영의 몸이 있는 것으로 괜찮다면, 육체도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조령사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계속 조상님을 생각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루종일 계속 신, 조상님, 명주님을 생각할 수 있나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의 일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가족 일이나, 집 관리나, 회사 일이라든지.
물질적인 것은 누구나 필요로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조상님을 생각하든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조령사도 신체도 신영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많은 일들이 있고, 거기에 시종 마음이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명주님 신도인 우리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것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이냐면 그것은 성지입니다. 성지.
그런데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성지라고 하는 곳은, 지금 아직 재판 중이여서, 그 결론이 날 때까지는 교주님 기도로 아슬아슬하게 싸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지요.
하지만 최근에는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만, 이곳의 성지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교주님에게 부끄러운 행위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장소는 아무리 생각해도 성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주님을 미행 도청 도촬하여 쫓아낸 사람들이 관리하는 곳이 어떻게 성지가 될 수 있나요. 정말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렇지요? 「여기는 성지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말로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런 행위는「성스러움」과 무관하지 않습니까?
또 그런 일을 한 집행부를 믿고, 그것을 좋다고 하며 많은 신도나 전종자들이 그곳을 성지라고 여기는 것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신에 대해 무지하고(불순종이라고 할까요) 따르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다 라는 것을,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최근 해외 영상 메시지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재판에 대한 건 별개로 하고, 지금 명주님 성지라고 불리는 장소, 이것은 이 지구상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행, 도청, 도촬을 실행하거나 용인하는 사람들이 관리하는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성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언에서도 명주님께서「유일한 오아시스」라고 말씀하시고, 엄청난 열정과 기백을 가지고 성지를 만드시려 하셨는데, 그것이 이제는 이 지상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만 구한다 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만든 목적은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성지가 더 이상 이 지상에 없다면, 명주님을 위해 그것을 만드는 것은 세계메시아교인 여러분밖에 없지 않을까요?
방문하는 분들이「아, 정말로 천국은 내 안에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 그것이 이루어지는 성지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명주님께서는「유일한 오아시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오아시스가 되어야 할 장소를 만드는 것은 세계메시아교의 여러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성언의 강화말씀입니다만, 명주님께서는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도대체 몇 번이나 돈이라는 말씀을 하시나 해서 제가 세어보니 여섯 번이었습니다. 여섯 번「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정직하셨습니다. 필요해서 돈을 모으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하시며, 좀만 돌려서 말씀하셔도 될텐데 라고 생각할 정도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돈, 돈, 돈, 돈, 돈,돈. 여섯번(일동 웃음).
이렇듯 당연히 성지를 건설하는 데도 필요하지만, 지상에서 신업을 진행해 가는데는 돈은 필요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냐하면 아무리「교주님 훌륭하다」「메시아교의 가르침은 훌륭하다」라고 해도, 여러분의 고귀한 헌금이 없으면 오늘 이곳에 모여 제전을 할 수조차 없습니다. 돈 없이 어떻게 이런 행사를 개최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모일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교주님께서 훌륭한 가르침을 가지고 계셔도, 물질의 뒷받침이 없으면(돈이 없으면) 교주님의 신업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단지「교주님께서는 자택에 가만히 계신다」라는 그것 뿐입니다. 정말로. 당연히 대제 같은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헌금이라고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으로는「나는 이것밖에」라고 합니다만, 그 여러분의 하나 하나의 헌금이 교주님의 신업을 힘차게 진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정말로 존귀한 것입니다.
명주님께서는 돈이 필요한 이유로「기관이 없으면 안되며」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듯 조직과 그 조직을 위해 진력하는 전종자를 위해서도 돈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전종자는 이 신업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을 걷어차고 사회로부터는「종교단체 직원」이라는 차별적인 시선을 받고도, 여전히 이 길을 걸어주고 있습니다. 그 전종자와 그 가족도 받쳐줘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걸 받쳐주시는 것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성지 건설도 그렇습니다만, 명주님 신업을 이 지상에서 거침없이 진행해 가는 것은, 문자 그대로 공동 작업입니다. 여러분과 교주님의. 정말로 문자 그대로 그렇습니다.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신업을 앞으로 진행시켜 나가기 위한 헌금도 있으며(헌금은 지금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또, 다른 종류의 헌금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애초에 돈을 포함한 모든 물질은 신의 것입니다.
일을 통해 보수를 받습니다. 그럼 그 일을 하는 능력, 보수를 받는 능력은 누가 주시는 건가요? 이런 특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든가, 이런 것을 하고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 힘을 주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런 힘, 살리는 힘을 주시는 분은 신이십니다. 신의 힘에 의해 우리는 일을 하고 보수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에 걸리면 더 이상 수입이 없습니다. 잘리면 수입이 없지 않습니까? 그럴 정도로 신께서 모든 면에서 은혜를 베풀고 계시기 때문에 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 수중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 우리 마음을 돈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세상에 없지 않습니까? 국가에 대해서는 세금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물건이나 서비스에 대해서는, 그 가치에 대해 물물교환적인 의미로 돈을 지불함으로써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께 대한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지요.
게다가 신이라고 해도 신도(神道)의 신사에 가서 돈을 바쳐도 의미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그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용하고 계신 분은 전지전능하신 신이십니다. 모든 지혜와 모든 힘을 가지신 분, 이분이 계셔야 비로소 우리는 돈을 손에 쥘 수 있습니다.
신께서는 모든 것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에 실은「전부 나의 것이다」라고 하고 계십니다만, 그래도 신께서는 대단히 관대하게 봐주셔서 너희들도 생활이 있으니 전부 다는 필요없다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으로는, 신께 모든 것을 되돌려드린다는 마음으로, 세계메시아교라는 단체를 통해 헌금하는 것을, 교주님을 통해 명주님, 그리고 명주님을 통해 신께서 우리의「모든 것은 당신 덕분입니다」라는 그 진심을, 돈을 통해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런 의미에서 세상으로부터 아무리 비판을 받아도 헌금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신의 덕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좀 전에 진흙투성이인 채로 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진흙투성이인 채로 좋다는 것은, 바로「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진흙투성이인 채로 괜찮다는 것은, 요는 나는 수십 년동안 신앙을 하고 있다든가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오늘 신도가 된 분이라도,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가지고「신이시여, 이런 저입니다」「진흙투성이지만 받아주시길 바랍니다」라는, 그것 뿐입니다. 그러니까「지금」인 것입니다. 지금.
앞으로 더 훌륭한 사람이 됐을 때 비로소 신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돌아오면 깨끗히 해주겠다」라고 신께서는 말씀해 주십니다.
거기에서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메시아의 존명」입니다.
「명주님과 함께인, 또 예수와 함께인 메시아의 존명으로 당신께로 가겠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지금입니다. 지금의 나입니다. 꾸미지 않은 자신.
돌아간 그곳에는, 문자 그대로「주의 영광」이 있습니다. 현관의 서체에도 있듯이. 주의 영광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습니다. 진흙투성이인 채로 가도 좋은 곳이 이미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과거형입니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대단한 구원입니다. 세상에서는 종교적 가르침은 곧 도덕과 같은 것이 되니까요.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하는, 까다로운 것은 필요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을 인정하고, 신께서 환히 들여다 보신다는 것을 알면, 이미 그것만으로 좋다고 하십니다. (「강화 1954년 2월 27일」). 그러니 이미 환히 들여다 보십니다. 진흙투성이인 것은.
명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 주의 영광인 빛남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 이 지상의 성지를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신성하고 존귀한 장소인 천국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지를 만드시려 하신 것은.
그러니까 오늘 제가 무슨 말을 하려 하면, 오늘입니다. 2022년 11월 1일. 오늘 2022년 11월 1일 교주님의 이름으로, 즉 명주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또 예수의 이름으로, 세계 메시아교 성지 건설의 개시, 이것을 선언하고자 합니다.
명주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도록 우리 손으로 어떻게든 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에는 더 이상 명주님 성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 여러 일이 있더라도, 명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힘차게 인도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 빛나는 미래를 준비해 주고 계신다고 그렇게 저는 확신하고 있으며, 교주님 아래에서 보다 더 여러분과 하나가 되어, 그리고 또 큰 희망을 가지고 걸어가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