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영광을 보았다」마사아끼사마 성언 2021년 12월 신곡감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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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88회 작성일 22-02-04 17:17본문
신곡감사제 마사아끼사마 성언
2021년 12월 1일
「주의 영광을 보았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12월 1일이네요. 어젯밤에는 비가 꽤 내렸습니다만, 저희 집에서는 천둥소리도 들렸는데 오늘도 아직 바람이 꽤 부네요.
그런 가운데, 올해도 드디어 한 달 남았습니다. 여러분께 있어서, 올해 일 년은 어떤 해였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일이 많았던 분들도 계실 것이고, 안 좋은 일이 꽤 많았다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반반이었다는 분이 가장 많을지도 모르겠네요.
혹은 굉장히 나쁜 일이 있어서, 그 문제를 내년에도 마주보고 가야만 한다든가, 혹은 오랜 시간 병을 앓고 있어서
그 병과 계속 마주보고 가야만 한다든가, 그리고 아무도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오늘을 맞이한 분도 계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신앙인이기 때문에, 이 일 년 간 있었던 일에 대해 역시 신께서 그 배후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 적어도 이것은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 눈에는 좋은 일이거나 나쁜 일이라고 해도, 역시「그 배후에는 신께서 활동하고 계시네요.」라는 것은 인정해야만 하며, 그리고 역시 감사입니다. 「신께 감사드립니다.」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있어, 좋고 나쁜 것 모두 신께서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런 여러 가지 일을 일으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인인 이상,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역시 신께 감사의 마음을 바치는 것, 적어도 이것은 우리에게 부과되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감사」라고 해도 그 정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나쁜 일에는 좀처럼 감사할 수 없으니 좋은 일에만 감사하자 라든지, 혹은 좋지 않은 일에 감사하자 라는 정도의 감사도 있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나쁜 일도 양육해 주고 계시는 것이니, 그것에 감사하자 라는 감사도 있습니다.
미국 곡입니다만, 찬송가는 아니고 일반 노래로 제목은 영어로「Drinking from my saucer」. Drinking이라는 건마시고 있다. from my saucer의 saucer라는 것은 커피 잔 같은 것을 놓는 받침을 말합니다. 요는「나의 받침 접시에서 마신다.」라는 제목입니다.
그리고 이 가사는 간단히 말하면 「인생 많은 일이 있으며, 돈이 어려울 때도 자주 있지만, 나는 신의 축복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만, 그「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이, 가득 채워진 정도가 아니라, 신의 축복이 컵에서 쏟아져 나올 정도로 많아서, 받침접시까지 흘러넘치고 있기 때문에, 컵을 들고는 마실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받침접시에 흘러넘친 것을 후루룩하면서 신의 은혜를 마시고 있다, 그런 가사입니다.
저는 이 곡을 만났을 때, 대단한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다. 부족하다」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인데, 이 사람은 신의 은혜가 이미 컵에서 흘러넘쳐버렸으니, 받침접시에서 후루룩하며 마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만약, 신께 감사를 한다면 이런 감사를 드려야만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컵의 상황은 어떤가 하면, 거의 채워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안 채워졌다, 더 부어 달라,
왜 더 채워주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께 대해서.
근데 잘 생각하면, 사실 신께서는 우리를 100% 채워주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신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충분히 채우고 있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근데 우리는「부족하니까 더 더」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더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 일을 개선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컵은 완전히 텅 비어 있다고 더 따라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의 입장에서는「아니, 나의 축복은 이미 너의 컵은 물론, 받침접시에서도 쏟아지려 하고 있으니, 이 이상 축복할 수 없다」 「지금, 충분히 축복을 주고 있다」인 것입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의 상황을 (지금의 상황입니다. 5분 앞도, 1시간 앞도, 10일 앞도, 1년 앞도 아닌) 지금의 상황을,「아, 신께서는 지금, 나를 충분히 채워주고 계시는군요.」라고 하고, 그리고 「받침접시로 흘러내린 신의 축복을 전부 받겠습니다.」하며 그것을 마신다면, 신께서는「아, 받침접시가 비었으니 조금 더 부어주겠다」라고 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신께서는 완전한 형태로 활동하고 있지 않다, 더 부어 달라 라고 하기 때문에, 신께서도 우리를 축복하기 어려운 것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선 인생에 있어서 지금의 상황을 「신께서 지금, 제게 있어 가장 좋도록 인도해 주고 계시네요.」라고 하며, 받침접시로부터「신의 은혜를 받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신께서는「그럼, 더 주겠다.」라고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의 상황을 100% 받아들이지 않고 「신께서는 주무시고 계시는 건가.」「내 목소리를 안 듣고 계시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면, 신으로서는「적어도 먼저 그 받침접시에 있는 걸 마셔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감사한다.」고 말해도, 어중간한 감사가 아니라 「넘치도록 채워주고 계시네요.」「완전히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그런 감사를 우리 메시아교 신도들은 신께 바쳐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신은 누구인가 하는 얘기가 되겠네요. 그것은 물론「스신나루 와레라노 카미」이시고 「스신나루 센조노카미」가 되겠지요. 작년까지는「미로꾸 오오미카미」.
「미륵(미로꾸)」이라든가「주신」이라는 표현이 되면, 왠지 우리들만의 신이라든가, 명주님만의 신, 일본만의 신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오늘의「만능의 힘을 가지신 분은 여호와이다」라는 찬가도 있고, 또 성언에도「메시아교의 신이라고 하면 이상합니다만, 이것은 기독교의 여호와입니다」라고 있듯이, 기독교의 여호와(야훼라는 호칭도 있습니다만) 이 여호와라는 신께서 우리의 신앙대상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체는「대광명」이라고 쓰여 있어 언뜻 보면 일본의 신처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들의 신앙대상이 여호와라는 것은, 이「대광명」문자에「여호와」라는 음을 달아도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올리는 대상도 여호와이며, 오늘 제전도 여호와 아래서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명주님께서 메시아교의 신은 기독교의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 이것은 대단한 것이라고, 최근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당연히 기독교 신이기도 하지만, 유대교의 신이기도 하지요. 이른바『구약성서』나『신약성서』에 그려져 있는 신입니다. 그 신이 우리의 신앙대상입니다.
그 말은, 이른바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분이고, 그리고 아브라함(그런 위대한 분이 있지요)을 쓰신 분이며, 혹은 모세. 바다를 반으로 가르고 십계명을 하사했다고 하지요. 그것을 하신 분이며, 또 다윗이라는 왕이 나오고, 그 다윗의 혈통이라고 하나요. 계열이라고 하나요, 거기서 예수를 등장시키고, 그리고 예수의 12제자를 모으시고, 바울이라는 선교사를 쓰신, 그러한 일을 하신 신을 우리는 신앙하고 있습니다.
아니, 저는 지금까지 여호와는 어쨌든 알고는 있었습니다. 명주님께서도「신 여호와」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렇지만, 다시 생각하면, 이 여호와라는 분이 우리의 신앙 대상인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최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명주님께서는 신을「대단한 분」이라는 표현도 하시는데, 정말 대단한 분이 우리를 쓰고 계시며, 우리는 그 존재를 신앙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또 여호와는「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도 하지요. 명주님의「그리스도의 아버지 신이란 주신이심을 알아야만 하노라 신도여 나와 함께」라는 찬가가 있습니다. 명주님께서는「내가 말하는 주신은 예수가 말하는 아버지 신, 하느님 아버지와 같다는 것을 나와 똑같이 알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찬가를 일부러 만드신 것은, 우리가 그 인식이 적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기독교 신이며,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신과는 다르겠지」라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에, 명주님께서는 이런 찬가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그렇다면 신이라는 것은, 유난을 떨 것도 없이 간단히 말하면「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대광명에 깃들어 있는 것은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진짜의 아버지.
사실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송구스럽지만, 하지만 아버지입니다. 틀림없이. 우리 몸보다 더 소중한, 우리의 영혼 그 자체를 만드신 분이니까요. 그러니까「아버지」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또, 기독교에서는「주(主)」라는 말도 사용하지요. 예수를「주」라고도 하며, 신께도「주」라고 합니다.
「주」라고 하면 뭔가 기독교적이다, 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부 현관에 걸려 있던 서체를 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을 현관에서 맞아 준 서체는 명주님 서체인데 「주의 영광(主之榮光)」입니다. 「주의 영광(主之榮光)」
지금까지 우리는, 누군가가「주의 영광을 받겠습니다.」 「주의 영광을 함께 받읍시다.」라고 한다면 「뭔가 기독교적인 말을 하는구나.」라고 느끼지 않았나요?
하지만 명주님께서「주의 영광」이라는 서체를 실제로 쓰셨기 때문에「주의 영광을 받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명주님 신도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명주님께서 쓰신 서체의 내용을 받는 것은 명주님 신도로서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만일 그것에 위화감이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명주님께서 나아가는 방향과,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화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주의 영광」이라는 서체를 실제로 쓰셨기 때문에「주의 영광을 받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명주님께서「주의 영광」이라고 쓰셨으니까요.
「주의 영광」.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난 울림입니다. 주의 영광스러운 빛.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주의 영광을 받겠습니다.」라고 어쨌든 말해보고자 한 적이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올 한 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우리를 써 주신 건 누구인가? 우리가 감사를 드리는 것은 누구에게인가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호와이시며, 하늘의 아버지이시며, 주이시며, 주의 영광을 나타내 주고 계시는 존재에게 입니다.
아니, 그 분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존재입니다. 인지를 훨씬 뛰어넘어선 분이며, 유대교 쪽에서는 그 이름조차 부르는 것도 황공하다고 할 정도니까요.
우리는 감사를 한다면, 그 위대한 분께 감사를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전혀 다른 신의 모습을 마음대로 만들어서, 그 신께 열심히 감사해도,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신께 감사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감사해도 들어주지 않으며, 명주님께서도 「감사를 하고 있는 방향이 다르다」라고 말씀하실 테니까요.
그래서 만약 올 연말, 이 일 년의 모든 것에 대해 신께 감사를 드린다면, 그러한 위대한 신의 품에서 신앙을 하고 살려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바쳐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12월이라고 하면, 명주님 신도인 우리에게 있어서는, 23일이 있지요. 명주님께서 탄생하신 날. 명주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인연을 맺고 오늘도 이렇게 만나고 있으며, 명주님께서 태어나신 것에 의해, 모든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명주님께서 태어나신 것으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제전을 열고, 함께 신께 마음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2월 23일은 축하해야 할 날입니다.
그리고 그 이틀 후, 12월 25일. 이날은 예수님 탄생일입니다. 지금 세상에서도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축하를 하고 있지요. 기독교 신도는 물론, 일본 내에서 크리스마스 축하를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광 장식이나 백화점에 가면 큰 크리스마스트리가 있거나 해서 거리가 화려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까지는, 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과 명주님의 탄생, 이것은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축하를 하고 있구나.」로 끝이었습니다. 「우리는 명주님.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축하를 하고 있구나.」로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예수는 우리에게 있어서 중대한 토대라는 것을 점차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죠? 메시아교는 기독교와 호응하여 인류구제를 추진하겠다, 예수의 예언을 실행하는 것이 메시아교 라고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 때문에.
조금 전에 소개한「Drinking from my saucer」라는 곡의 가사에서는, 나는 돈은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의 존재를 안 것에 의해 이미 충분히 부유하다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가 용서된 것에 의해 나는 이미 만족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전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는 속죄주이기 때문에. 근데 우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나의 죄가 용서되었다. 예수는 대단하다. 그것이 최고의 부(富)다」라고 하며, 거기서 끝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그냥 예수님은 대단하다, 신은 대단하다, 배례 드립니다. 신앙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만이 아니라, 아까 얘기했던 대단한 신의 혼, 그 자체가 우리 안에 있고, 그리고 우리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 이제 신이라는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자식이라고도 하는데, 신이라고 해도 됩니다. 교주님께서도 전에 말씀하셨는데 「인간의 자식은 인간」이기 때문에「신의 자식은 신」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는 예수가 유일한 신의 자식. 아니, 확실히 예수라는 존재는 정말 위대합니다. 근데 우리는 그 예수하고 동등한 「신의 자식」,「신」이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메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신의 혼이 있고, 그 신과 하나가 되어 정말로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주님께서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나심으로써 몸소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에서 이루지 못한 다음 단계, 이것입니다. 그냥 인간의 입장으로, 예수님은 대단하다, 이 교주는 대단하다, 신은 대단하다 가 아니라, 이제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도 물 위를 걷곤 했다고 하지요. 우리도 그런 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신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예수의 이름을 알고, 그리고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안 것에 의해, 진정으로 기뻐하고 이제 이것으로 충분히 풍요롭고 채워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은혜도 고스란히 받을 수 있고, 하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그것 플러스,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인류에게 있어서의 마지막 구원, 다음 단계의 구원, 제 2단계의 구원, 이것을 신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신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풍부히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수의 속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미에 있어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와, 또 거리 등에 화려하게 장식한 것들을 이제 마음껏, 우리는 즐겨도 되는 것입니다. 즐길 권리가 있으니까, 중요한 사람을 만나도 좋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든지 하셔도 됩니다.
물론 그것을 그저 즐기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그「다음 단계」를 알고 있는 우리들이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충분히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의 화려한 거리를, 최대한 여러분이 맛보고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주님께서는 헨델의「메시아」는 신께서 메시아교를 위해 준비하셨다고 말씀하시지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 거리에서 화려하게 여러 장식을 하며 축하를 하는 것은, 물론 기독교인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건 역시 우리 메시아교를 위해서 신께서 그렇게 해주신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 꼭 그런 생각으로 최대한 이 화려한 계절을 즐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랄까, 저는 일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를(물론 일본만이 아니라 전 세계입니다만) 일본전체에서 받아들이고, 축하를 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이른바 한 종교의 교조입니다. 그 인물을 위해서 학교 같은 곳에서도 크리스마스 모임을 하고있지요.
그러니까, 그건 분명 많은 사람들은 의식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예수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인류에게 있어서 뭔가 관계가 있는 중대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기독교인이 아닌 일본인조차 거의 모두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일본인은 기독교 교회에서 결혼하는 것도 거부감 없이 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예수를 속죄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명주님만이 유일한 메시아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본 사람이 이상하다는 것이 됩니다. 거리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일본 전체가 이상하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교주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속죄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명주님만이 유일한 메시아이다. 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있는 일본인 전체, 세계 전체가 이상하다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메시아교인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많은 일본인들은 예수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의식적으로 예수를 속죄주로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업의 제 1단계를 완수하신 위대한 존재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올해 저는 이런 자리에서「회개」라는 것에 대해 몇 번인가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일에 관해 요즘, 뭔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해를 넘길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결국「회개」라고 들으면, 바로「나는 회개의 마음을 거기까지는 좀처럼 가질 수 없다」「좀처럼 생각할 수 없다」라는 식이 되지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제로서, 회개한다는 마음을 내가 가질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죠. 내가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아직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다.」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노력을 하면 인간의 힘으로 회개할 수 있는 것인가, 할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명확히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에게는 본래 그런 힘이 없습니다.
아니, 확실히 회개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단,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인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 힘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사실은 그런 힘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세계이지요. 저 사람은 회개하고 있다, 이 사람은 회개하지 않고 있다, 나는 좀처럼 회개할 수 없다, 는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을까요? 받아들이기는커녕 인간은 호흡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일어서는 것도, 걷는 것도 신의 힘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말은 하면「아니, 인간은 분명히 작고 하찮은 존재이지만, 그래도 제법 꽤 쓸 만한 존재이다」와 같은 말을,
우리는 간단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오늘 명주님 성언에도 있었듯이, 뭘 그리 자만하고, 뭘 그리 지껄이고 있느냐(명주님께서는 지껄인다는 말을 쓰고 계십니다.) 고 말씀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명주님 찬가에「대신님 눈으로 보면 인간은 개미보다 작은 존재임을 알거라」 신의 눈으로 보면, 인간은 개미보다 작은 존재인 것을 알아라. 라는 것이지요. 이 경우의 “작은” 이라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인간이 본 개미의 크기, 그 정도로 작은 존재라는 찬가.
인간의 작음을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개미처럼 작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며 분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미이기 때문에 그래도 인간의 눈에 비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신께서는 확실히 위대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개미라 해도 그것을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개미도 힘을 합치면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찬가도 있지요. 「대신님 눈으로 보면 인간은 세균보다도 더 작도다.」(일동웃음). 육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세균이니까요. 현미경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세균보다 더 작다」이기 때문에 세균보다도 더 작습니다.
우리는 명주님이라 하면, 정말 위대한 존재이며, 우리 인간은 명주님을 뭔가 이런 인간적인 의미로 높은 곳에 두는 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명주님께서 이런 찬가로 표현하신 신께 대한 겸허함은 대단합니다. 인간인 나라는 존재는 세균보다 더 작다고 하십니다.
저는 그러한 명주님이시기에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태어난다.」라고 하면, 뭔가, 좋은 일을 해서, 점점 위대한 존재가 되어 비로소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신께 대한 겸허함(인간에 대한 겸허함이 아닙니다.) 신께 대한 겸허함, 이것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에 우리의 큰 착각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신께서「만능의 힘을 가진 것은 나다.」「네, 말씀하신대로 입니다.」「목숨이 네 것이냐?」「아닙니다. 저는 세균보다 더 작은 존재입니다」라고 명주님께서는 생각하시고 신께선「그런가. 그렇다면 내 목숨을 주겠다」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신에 대한 명주님의 신앙심. 신 앞에서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여기셨는지 이것을 잘 봐야만 합니다.
유명한「나라와 나라 사람과 사람 간의 다툼이 없고 투쟁 멈추게 함은 신밖에는 없으리.」 이것은 대단한 찬가입니다. 보통,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있으면(눈 앞 에서 여러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저「신께서 멈추신다」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멈추는 것은「신밖에 없으리.」이기 때문에, 신 이외에는 없다, 인간의 힘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굉장한 찬가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힘은 주신 밖에는 없다는 걸아는 커다란 행운이여」 우리들은 지금까지 무심코, 이것은 대단한 찬가라고 생각해 온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께서 모든 힘을 가지고 계시다면, 우리는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
신께서「너에게는 구원의 힘은 없다. 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다」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반항하는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그것을「커다란 행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아무 힘도 없다, 신께서 모든 힘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이다, 큰 행복이다. 라고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명주님의 모습은 우리와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가 활약하고 싶다, 나의 공적으로 하고 싶다, 열심히 봉사를 해서 내가 평가를 얻고 싶다, 그리고 나의 노력에 의해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주님께 있어서는 신께 모든 힘이 돌아가는 것이「큰 행복」입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 아무리 이런 말씀을 하셔도, 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신이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명주님께서「인간은 작다」라는 걸 말씀하셨다고 해도 「아니, 확실히 인간은 작은 존재이지만, 작은 인간끼리 힘을 합치면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우리는 바로 말하지요.
물론 협력해서 여러 가지를 해야 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의 힘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온갖 말을 생각해 내고 있지요. 대체로 그것을 뭔가 좋은 일처럼 세상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작은 존재이지만, 그래도 제법 꽤 쓸만한 존재이다, 모두가 힘을 합치면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런 것을 세상에서 우리는 좋은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척척 더 나아가서 문화를 발전시켜도, 명주님께서는「문화만이 아무리 진보해도 인류 사회의 행복은 없으리라 신을 외면하고는」이라 하셨습니다.
문화가 발달해 가는 것은 우리에게는 행복한 일이라고 느낍니다. 대단한 스마트폰이 생겼다, 이것이 생겼다, 저것이 생겼다고 하며, 그것은 우리에게는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인류의 행복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신 없이는 인류의 행복은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인류의 행복이 신의 행복이라고 여겨왔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행복한 것을 신께서 지켜보시는 것, 그것이 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해 온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신의 행복이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의 행복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은, 신의 행복이 인류의 행복이다. 라는 것이지요. 이것에도 우리 인간의 큰 착각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신의 행복은 무엇인가 하면, 신께서는 부모이기 때문에, 인류가 신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계신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다, 인간끼리 힘을 합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며, 전혀 신께 마음을 향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모두 신의 힘이네요」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께 있어서의 행복입니다. 잘 알아주었구나. 라고
말씀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인간의 힘은 약하기만 하단걸 알고부터 마음에 깃든 살아있는 신은 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찬가는 어떤 의미일까요?
내가 신이라는 존재와 싸우려 하며 인간도 제법 꽤 쓸만하다. 하고 있으면, 그것은 신께서 보신다면「너는 세균보다 더 작은 존재이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균만큼 작은 제 몸의 세포조차도 신께서 자유자재로 쓰고 계시네요.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하면, 이번에는「세균보다 더 작기는」커녕 「전부 너의 것이다」라고, 신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세균보다 작다」,「예,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신이시여」하면, 이번에는 실은「모두 너의 것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 눈도 귀도 코도 입도 그러하며, 내가 너의 안에 있어서 보고, 듣고, 손을 움직이거나, 일도 하고, 호흡을 하고 있다, 그 전부가 너의 것이다. 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신으로 채워지면, 이번에는 그 완전 반대로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신께 채워 받는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위대한 존재가 있어,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있는 작은 인간처럼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신앙하는 마음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으로는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전부를 내드리면 이번에는 대단한 존재인 것입니다. 세균은 커녕, 이미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는「신앙, 신앙」이라고 말해왔지만, 내가 위대한 신을 열심히 신앙하고 있다고 한다면,
계속 작은 그대로입니다.
세균보다도 더 작다고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이젠 포기해라」라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힘으로 뭔가를 하는 것은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 또한 이론으로 파악하여, 그럼 신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이번 교단 정화에서도,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되었지요. 성지라든가 늘 다니던 교회 등의 선택을 해야만 했으며, 그것은 정말로 존귀한 선택이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이 결집해, 지난해 세계 메시아교가 부활했습니다. 명주님께서 명명하신 교단명이 부활했습니다.
하지만 신 입장에서 말씀하신다면, 인간 측에 공적이 있는가. 어떤가?
확실히 우리는 여러 어려움을 딛고, 진정한 명주님 신앙의 길인 교주님의 길을 선택해서, 지금 영광스러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신께서 정말로 크게 축복해 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럼, 우리한테 어떤 공적이 있어서 그렇게 됐느냐,
사실은 우리의 공적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오늘 성언에서도「자유자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께서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쓰신다, 자유자재로 뭔가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쓰여 지고 있는 쪽의 의사는 제로입니다. 오히려 쓰고 계신 분의 의사가 100.
지금 왜 우리가 이런 길을 걷고 있는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신께서 수천 년 전에「2020년에 세계 메시아교를 부활시키겠다.」고 일방적으로 정하셨고,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공적이 없어도 우리를 쓰시기로 신께서 정하셔서, 우리를 모으셨습니다. 일방적으로요.
반대로 사람에 따라서는 교주님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일단 신께서 그렇게 하시면, 그것을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신께 마음을 여는 것도, 또 반대로 완고하게 신께 반발하는 것도, 인간의 의사는 실은 일절 관계없습니다. 신앙심을 갖게 하는 것도 신이시고, 신앙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도 신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찬가에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가 신을 얕보고 있으면, 신께 어떤 식으로 쓰임 받을지 정말로 모릅니다.
그리고 명주님 찬가「신을 두려이 바른 길을 지키는 인간 만듦이 나의 소망이요 사명인 것이로다.」「바른 길」이라는 것도, 우리는 그것은「제대로 신앙하는 것이다」「제대로 참배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신을 두려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는 여러 일에 대해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신앙하는 마음도 제 마음이 아닙니다.」「받아들이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도 당신의 것이네요」라고 하면, 그것이「바른 길」입니다.
보통은「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라 하면, 제대로 회개가 되고 제대로 참배를 하고, 제대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 같지만, 그게 아니라 모든 것을 신께 되돌려드리는 사람이「바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바른 길」이라고 해도 그것은 「신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신을 두려이」라는 것도, 일본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나 유대교인은 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성경 등에도 있으므로 그런 말을 하지만, 일본인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신도(神道)에서 말하는, 자연계를 두려워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신을 두려이」는, 신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은「신 여호와나 하느님 아버지는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라고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원래「신을 두려이」라고 하면, 신이라는 것은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존재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러나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어떻게 신께서「사랑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감동이 있겠습니까? 신께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어떻게 신께 받아들여졌을 때의 기쁨이 있겠습니까? 회개해도 용서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없이, 어떻게 신께서「너를 용서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기쁨이 있겠습니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무(無)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만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고독의 절망을 모르고서, 어떻게 신께서 함께 쭉 있어 주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말로는 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날까지의 우리의 신앙은 정말 미지근한 신앙이었습니다. 실감이 있다니 없다니 하며.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신께 대한 진정한 신앙을 우리가 갖기를 바라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닙니까?
그럼 고독의 절망 같은 것을 그렇게 쉽게 맛볼 수 있는가 하면, 그건 꽤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란다.」거나「지금까지의 나는 미온적인 신앙이었구나」하는 것은 인정해야만 합니다.
엄연히, 엄하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애정도 신께는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라든가, 기쁨, 사랑에 접하지 않으면, 태어난 의미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 어정쩡한, 미지근한 마음을 신께 바친들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렇게 말해도 우리는 분명히 사랑을 원하지요. 누구나 사랑을 원합니다. 아기라면 엄마나 아빠의 사랑을 계속 원하고, 크면 이번에는 동성이라든가 이성의 사랑, 그리고 결혼하면 배우자의 사랑을 원하고, 아이가 생기면 나는 아이로부터 사랑받고 있을까, 좀 더 크면, 나는 손자에게 사랑받는가, 이렇게 계속 우리는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의 누구나가 사랑을 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나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고 충만하다, 친구들로부터도 가족으로부터도 사랑받고 충만하다. 라고 한다면, 우리가 신께 마음을 향할 일은 절대 없지 않을까요?
그 말은, 우리가 사랑을 구하고 구하며, 외롭다고 생각하거나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드는 것은, 그 순간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실은 신께서「인간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다」「그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내가 넘칠 정도의 사랑으로 너를 감싸주고 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만약에 항상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절대로 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떤 형태로든, 전 인류가 지금, 빠짐없이 사랑을 구하고 있다는 것은, 신께서 전 인류를 빠짐없이 넘치는 사랑으로 감싸고 계신다는, 가장 좋은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을 느끼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외로울 때는 외로우니까요. 하지만 만약 외로운 생각이 들 때「나는 인간 세상의 사랑만 구하며 살아왔지만, 실은 신께서는 신의 사랑을 알아주길 바라시기 때문에 내게 이런 외로운 마음을 느끼게 해 주시는군요.」「나는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하며「나는 신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신께서는 기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신께서는 전 인류 대부분에게서 하루 종일「부족하다, 부족하다」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만이라도 신께 「충분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신께서 기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돈도 있지요. 돈도 확실히 부족합니다. 물론 그것은 가능한 한 있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완전히 채워진다고 해서 마음이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돈이 모자라다」「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지금 신께서 저에게 충분히 베풀어 주셔서 풍요롭게 해 주고 계시네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富)일지 모르지만, 신께서는 기뻐하실 겁니다.
아니,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100년 후에도, 1000년 후에도 우리는 분명히「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을 겁니다. 사랑도 부족하고 물질적으로도 부족하다고 계속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하다고 갈망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사실 이미 신께서 넘치는 사랑과 부를 가지고 임해 주고 계시네요.」「저는 충만합니다.」라고 정할 것인가 정하지 않을 것인가. 만약 정하지 않는다면「부족하다」라는 인생을 계속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올해도 앞으로 한 달 남았지만, 해가 가기 전에 여러분께서, 이 삶의 태도로 전환할 결심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부족하다」라는 인생을 이대로 걸어 갈건가요?
물론, 그렇게 결심했다고 해서 금방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가 바뀔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상황이 똑같다 해도, 삶의 태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계속「부족하다, 부족하다」고 해 온 것이, 이번에는「있습니다, 있습니다.」가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러면 실은 신께서 「정말로 너에게 필요한 것을 더 주겠다.」라고 하시며,
물질적으로도 충족시켜 주실 지도 모릅니다.
「부족하다, 부족하다」라고 하며, 지금 신께서 주시는 것에 기뻐하지 않는데 어떻게 신께서 다음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우리는「새롭게 태어나는」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요.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생명에 눈을 뜨려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갈 것인가요? 인류 모두가「부족하다」고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삶의 태도로 앞으로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의 태도에서 크게 전환하여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꾸고, 그리고 신께「당신은 넘쳐흐를 만큼 채워주고 계시는군요.」라는 마음을 바치면서 살아갈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갈망하는 마음이 생길 때일수록 입니다.)
그렇게 걸어가면 당연히 신께서는 기뻐하실 거고, 신께서 기뻐하시면 우리가 인생을 잘 살아갈 게 분명하지요.
그래서 정말, 세계 메시아교 신도인 우리 모두는, 신께「가득 채워져 있습니다.」라는 마음을 바치고자 합니다. 아니, 정말 지금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하늘의 아버지, 여호와라는 존재로, 또 주의 영광과 축복과 부와 사랑과 행복으로 지금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를 하신다면, 그에 대한 감사를 우리 일동, 이 연말에 주신께 바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