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마사아끼사마 성언 2021년 9월 월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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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41회 작성일 21-11-18 15:23본문
9월 월례제 마사아끼사마 성언
2021년 9월 1일
「있는 그대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교주님께서, 교주님으로 취임되시고 명주님의 새로운 신앙을 우리에게 교도해 주시기 시작한 것이 2003년인가 2004년 무렵입니다. 그리고 나서 약 17년, 18년이 지났습니다.
그때그때의 대제 말씀, 또 국내각지뿐만이 아니라 해외도 포함한 순교에서는, 말씀을 주심과 동시에 신도 여러분의 질의에도 직접, 시간을 내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한달에 한번「교주님 찬가」라고 하여 찬가를 발표해 주고 계시며, 또「귀로」라든가「어메이징 그레이스」「이별의 곡」등의 노래 가사 등, 교주님께서는 그런 여러 가지를 통해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는, 기본적으로 교단의 간행물에 개제됩니다. 게다가 글을 읽기 힘든 분들에게는 유튜브도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실제 말씀의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이 부자유한 분과 귀로 정보를 얻고 싶은 분은『글로리』낭독판이라는 것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교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시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해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교주님 한 분이십니다만, 여러분이 마유미 부인이라고 부르시는 저의 어머니가, 항상 교주님을 받쳐주셔서 두 분이 일체가 되어, 우리를 위해 노력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당연히, 명주님께서 남기신 진실, 구원이라는 것에 우리가 눈을 뜨길 바라는 것이기도 하며, 그리고 또 우리가 무엇인가 알아야만 하는 것이 있고 삶의 태도를 바꿔야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교주님께서는 그야말로 분골쇄신, 생명을 태워서 우리를 위해 노력해 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는 그런 교주님의 오랜 시간의 노력에 대해, 17년, 18년 전의 자신과, 2021년 오늘의 자신을 비교했을 때, 무엇이 바꿨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만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17년 전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은 무엇이 바꿨나요? 교주님 말씀은 여러분의 삶의 태도에 어떤 영향이 있었나요? 교주님 교도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 대답이 있을 꺼라 생각하는데, 사람에 따라서는「대단하지만 어렵다」「열심히 이해하려고 애쓰는데 어렵다.
그래서 이제까지 배워온 것을 중요시 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대답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는「말씀은 훌륭한데, 교주님이라는 존재는 구름 위의 존재이시기 때문에, 도저히 나 같은 존재는 간단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지금까지 해온 신앙을 계속하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이렇듯 본심을 말한다면, 이런 대답을 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17년, 18년의 긴 시간동안 크게 노력해 주고 계신 교주님께 말씀이「어렵다」라는 한 마디로 끝내거나, 또는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지만「구름 위의 존재」라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잠깐 예를 들겠는데, 예를 들면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는 재혼입니다. 내가 아내이고, 재혼하는 쪽은 남편이라고 합시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열심히 요리를 해서 남편에게 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와~ 대단한 정성이 들어간 요리네」
「최고로 좋은 재료를 사용했네.」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할 만큼 다해놓고, 결국 식사시간이 되면 그 요리는 먹지 않고, 전처에게 가서「역시 나는 이 익숙한 맛이 좋다」라고 하며, 전처의 요리를 먹어버립니다.
또한 이런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은「정말 맛있어 보이네.」「최고의 재료를 사용했네.」「아니 이것은 너무 근사해서 입에 넣는 것도 아깝다」라고 하고는, 그것을 먹지 않고「그럼」하며 전처에게 가서, 결국 전처의 요리를 먹습니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이런 모습이, 교주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어렵다」「훌륭하다」라고 하면서, 결국 지금까지의 신앙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모습이.
또는 아내가 요리를 하면 남편이「정말 맛있겠네.」라고 하며 먹어 줍니다. 간신히 먹었습니다. 지금까지 먹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먹었습니다. 하지만 먹는 모습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젓가락을 놓고「아직 먹고 싶은 것이 더 있어서」라고 하며, 결국 전처에게 가서「이 익숙한 맛이 나는 좋다」라고 하며 그것도 먹습니다. 양쪽 다 먹는 것입니다.
아내로서는 남편이 자신의 요리를 먹고 배가 부르길 바라는데, 남편이 저런다는 것은 슬픈 일이며, 또 만든 보람도 없습니다.
이것을 교주님 말씀에 옮겨놓으면「교주님 말씀은 대단하다」라고 하며 공부하지만, 지금까지의 신앙에도 일종의 미련 같은 것이 있어서, 그쪽도 계속해 가겠다는 그런 모습이지요.
교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명주님의 진정한 신앙을 전달하고 싶으신데 우리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지금까지의 신앙도 계속해 가겠다는 것은 노력을 해 주고 계신 교주님께 죄송한 일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전처의 요리」로 예를 든 이「지금까지의 신앙」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제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결국 이「지금까지의 신앙」이 좋은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이치를 뛰어넘어 전처의 요리가 좋으며, 지금까지의 신앙이 좋다는 그런 마음이 본질적으로 우리 안에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들어도 아무래도 미련이 있습니다.
그럼 이「지금까지의 신앙」이란 도대체 어떤 신앙인건가? 우리가 아직껏 미련을 가지고 있는 이「지금까지의 신앙」이란 어떤 신앙인가 하면, 이것이 이른바「이타애」라든가「감사」라는 말로 상징되는「남을 사랑합시다.」「이타애 실천을 합시다.」「무슨 일이든 감사합시다.」「안 좋은 일에 감사합시다.」「누구든 차별 없이 사랑합시다.」「이런 행위를 합시다.」「악행을 해서는 안 된다.」「순수한 사람이 되거라.」「물건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라는 것이지요.
행동과 자신의 마음을 써서 감사라든가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려 한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온「지금까지의 신앙」.
그리고 우리는 이 신앙을 좋아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나는 이런 노력을 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다. 라는 식으로 자신을 타인보다도 나은 존재로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이런 것은 좀처럼 할 수 없는 일이다」하며, 겸허한 자신이 훌륭하다고 마음속으로 자만하기도 하지요 우리들은. 이렇듯 이런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고 있다, 사랑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라고 하며 자신의 덕을 높이는 것은, 자신의 모습과 타인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확실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신앙이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이상한 이야기이다, 이타애도 감사도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냐. 라고 우리는 말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타애나 감사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타애라도 해도 신의 사랑인 것이며, 또 감사라도 해도 본래 인간의 힘으로 감사의 마음이라는 것을 간단히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명주님의 성언을「인간세계의 이타애」「인간 세계의 감사」라는 차원으로까지 떨어뜨리고,
그것이 명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라고 해 버리고 있습니다. 굳게 믿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런 전처의 식사에 예를 드는 것이 실례가 아닌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명주님께서는 그런 종류의 일은 그저 도덕입니다, 종교보다 아래인 도덕입니다 라는 것을 여러 장면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명주님께서는 인간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좋은 마음을 가져라, 나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부모에게 효행하거라, 물건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이런 것은 모두 도덕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것은 종교라고 생각해 왔지만, 명주님께서는 그것은 도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보다 아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명주님 자신은 종교를 하고 싶다, 도덕을 뛰어넘은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오늘의 성언「관음신앙」에도, 소승신앙이나 계율신앙이라는 것이 있었지요. 우리는 계율이라고 하면 뭔가 하루에 5번신께 기도를 드린다. 라든가 그런 것만 생각합니다. 계율이라는 것은 규칙이기 때문에. 하지만 예를 들면 이타의 행을 해라 하는 이타행이라든가, 감사행, 뭔가의 실천, 참배, 조레이, 봉사하시오 라든가, 좋은 마음을 가져라, 나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이러한 것들도, 사실은 전부 계율입니다.
그리고 명주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결국 너희들은 못하지 않은가 라고 오늘 성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내세워도 실천을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허위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는, 표면적으로는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만, 우리 마음 안을 보면 좀처럼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명주님께서는「표면은 선이고, 내면은 악으로 된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중에, 저는 누구라도 차별 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함부로 쓴 적은 한번 도 없습니다, 부모에게 불효를 한 적은 한번 도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는「노력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하게 행할 수 없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그 세계에 칭칭 묶여서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신이라면 가능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자기 자신을 계율에 묶어놓고 살아갑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명주님께서는 허위가 있기 때문에 과시하고 싶어 한다. (과시하고 싶다는 것은 자랑스럽게 남에게 보이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훌륭하게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역한 냄새가 나고 보기 흉하며, 그것은 소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계율신앙으로 설할 경우, 훌륭해지면 질수록 자신의 훌륭함은 계율을 지키고 있는 것에 의한 훌륭함이라는 식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타행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훌륭한 입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라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명주님께서 과시하고 싶어 한다고 하신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나는 이것을 할 수 있다, 저것을 할 수 있다. 라는 식으로 되는데, 그것이 훌륭하게 보이는가 하면, 명주님께서는 그것은 역효과가 된다, 소인이 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은, 물론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며, 또한 명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그런 모습으로 빠져 버린 사람이 교단에 많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명주님께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틀을 만들고, 그리고 스스로 그 틀에 틀어박혀 괴로워하고 있다고 하신 것처럼, 자신이 틀을 만들지요. 이런 행을 해야만 한다, 감사해야만 한다, 이렇다 저렇다 하며 틀을 만듭니다. 하지만 결국 좀처럼 완벽하게 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몸부림치며 괴로워합니다. 게다가 그것만이라면 괜찮지만, 우리는 타인도 자신의 틀 안에 밀어 넣고 괴롭힌다고, 그렇게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자신이 잘한다고 생각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예를 들면 나는 이런 병에 걸려 처음에는 어째서 신께서는 나를 이런 일에 당하게 하는가. 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병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듣는 쪽은, 이 사람 훌륭하다, 나도 무슨 일이든 감사할 수 있도록 되어야겠다. 라고 하게 됩니다.
또는 겸허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전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아 이 사람은 겸허하고 훌륭하다, 나는 좀처럼 겸허해지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을 그 사람에게 들게 해 버리면서, 무심코 자신을 뽐내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계율이라는 틀을 자신이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이 들어가서, 그 세계에서 사는 것에 의해 주변 사람도 그 틀에 밀어 넣어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삶의 태도, 본인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계율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그럼「계율신앙이 아닌 신앙」을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계율신앙이 아닌 신앙은, 실제 세상에는 거의 존재하고 있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종교라도 대부분, 제대로 인사를 합시다, 매일 신께 참배합시다, 이런 실천을 합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계율이라고 하듯이, 어느 규칙을 따라 사는 것이 종교라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율신앙이 아닌 신앙을 모르게 되어 버렸습니다.
명주님께서는 다르셨다고 생각합니다. 「관음신앙」의 성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지만 일단 명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우리는 명주님께서 남기신 것을 계율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타애라는 말이 있으면「주위 사람을 사랑해야만 한다.」라고 하고, 감사라는 말이 있으면「감사가 중요하다」라고 하며, 명주님 성언을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떨어뜨려 왔습니다. 명주님께서는 애써 계율신앙이 아닌 것을 말씀하시려 하셨는데.
하지만 지금 교주님께서,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관음신앙이라든가 대승신앙이라는 새로운 신앙이자, 계율신앙을 뛰어넘은 신앙을 전달해 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구세교, 메시아교로 말한다면, 명주님과 그리고 교주님께서 이 계율신앙이 아닌 새로운 신앙을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는 기독교도 예수도 그것을 설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이라는 사람이(이 분은 신약성서의 대부분의 문장을 쓴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그것을 호소하였지만, 결국 지금의 기독교도 거의 계율신앙에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은 해도 된다, 그렇게 되어 버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도.
이렇듯, 우리는 모두 이 계율신앙의 틀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명주님께서는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역한 냄새가 나고 보기 흉하다. 라는 강렬한 표현을 쓰고 계시는데, 우리가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계율신앙이 아닌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명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신을 인정하고, 신께서 환히 들여다 보신다는 것을 알면 이미 그것만으로 좋습니다, 다른 일은 그다지 필요 없습니다. 그것을 까다롭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리고 중요한「신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명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까다롭게『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해 온 것이 아닐까요? 안 좋은 일에 감사하시오, 이런 실천을 하시오 하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해 왔습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인간은 신을 인정하고, 신께서 환히 들여다. 보신다는 것을 알면 그것만으로 좋다, 다른 일은 별로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신께서 환히 들여다보신다는 것은,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관음신앙」의 성언에도 있듯이,「표면은 선이고, 내면은 악으로 된다.」라고 한 것처럼, 할 수 없는 자신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환히 들여다보시기 때문에,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께는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벌거숭이가 되어 있습니다. 신께서는 우리의 속마음, 혼의 깊은 곳까지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간파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명주님께서, 관음신앙은 대승신앙으로 표리가 없다고 하셨듯이, 자신의 그대로, 있는 그대로로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율 같은 것을 잘 지키지 못해도, 그것을 무리하게 감추는 것이 아니라「안 된다.」라는 내 자신이 있는 것뿐입니다.「아, 나는 안 되는구나」라는 내가 있을 뿐. 그것을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허위에 빠질 필요도 없으며, 과시할 필요도 없고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주님께서는 간단하게 말씀하시지만, 실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신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내 마음을 바라본다면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말로 감추고 싶지만, 신께서 환히 들여다보고 계신 내 안에 있는 마음을.
명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감출 필요가 없어지면 명랑해진다고 하십니다. 확실히 지금까지처럼 감출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밝아지긴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평소「악취가 나는 것에 뚜껑을 덮자」는 아닙니다만, 그것을 감추고「나는 열심히 이런 행을 하고 있습니다.」「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직면할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가 아는 사람이나, 친구, 가족, 지인과 차를 마신다든가, 어딘가로 쇼핑을 간다든가 그럴 때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의 생각이 마음속에서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그것입니다. 그 마음을 신께서는「나는 환히 들여다. 본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을 정말로 알아차렸다면,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든 틀에 들어가 열심히 해 왔지만, 실은 여러 계율적인 것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나는 더 이상 구원받을 방법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내 안에는 이런 마음이 있었구나, 신앙자로 있는 것도 부끄럽다. 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렇듯, 나는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고, 그러한 구원될 수 없는 나야말로, 어쩌면 신께 있어서는 구원의 재료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본교 구원의 특이성」. 대단한 제목의 성언이지요. 메시아교의 구원의 특징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 적혀 있는 성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본교의 사명은 지옥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구원한다.」라고 되어 있지요. 그럼 그것을 어떻게 해서 실현하는가? 그것은「사람들을 천국으로 구원함에는, 먼저 자신이 천국에 올라 천국 인이 되어, 대중을 구원해 올리는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대중을 구원해 올린다는 것은 힘듭니다. 아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고 어렵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은 내 안에 있지 않을까요? 구원될 수 없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까? 명주님께서는「대중」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만,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선조님이기도 한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들은 지금 살아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이겨 온 것입니다. 당연히 누군가를 죽여 온 것입니다.
죽임을 당했다면 살아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엄청난 것을 안고 있다는 그런 것입니다. 만일 온화하고 사람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살아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고 싸워서 이겨 온 것이 남겨진 우리들 인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그 분들이 우리 안에서, 지옥에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해도, 명주님께서는「먼저 자신이 천국에 올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가장 먼저 천국 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천국 인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한다.」「열심히 해서 천국 인이 되고 싶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먼저」입니다. 명주님께서는 가장 먼저 천국에 올라가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용기를 가지고 먼저 신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리고 내 안에 솟아나는 그 마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신께 바치면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감추고「괴로웠지만 어떻게든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께 있어서는 그「괴로웠다」라는 쪽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는「저 사람에게는 증오의 마음밖에 없었지만, 가까스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며, 우리는「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쪽에 주안을 두고, 자신의 향상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든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라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시간을,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만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 안에 있는 추한 마음, 괴롭다 라든가 밉다 라든가, 그런 마음을 우리는 구원하러 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설마, 갑자기 천국 인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 내 안에는 여러 요소가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는 여러 마음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나는 좋은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라고 하며, 우리는 매일 계속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본교의 사명은(그것은 명주님 신도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지옥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구원한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기를 가지고 먼저 천국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그 사명을 완수하는 것은 일생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바로 앞의 일초를, 지금까지처럼 자신의 향상을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내 안에는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나의 시간을 쓰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어느 쪽인가. 그것을 정해야만 합니다.
오늘 월례제 찬가, 다섯 수가 있었지요.
첫 번째가「감옥을 자신이 만들어 내가 나를 가두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으니」
감옥을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행을 해야만 한다.」「사랑해야만 한다.」라고 하며 자신이 감옥을 만들고, 그리고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감옥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것을 감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훌륭한 것이라도 생각했습니다. 여러 계율이라고 할까요? 그러한 것을 내가 정하고, 제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을 사랑하고 친절하고 불효도 하지 않고, 물건을 함부로 쓰지 않는, 그런 멋진 성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명주님께서는 그것은 감옥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감옥을 만들고 있지 않느냐 라고 하십니다. 자신도 들어가고 다른 사람도 그곳에 밀어 넣고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 찬가는「아주 작은 목소리는 들려도 크디큰 언령은 들어가지 않는 인간의 귀
「아주 작은 목소리」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목소리는 정말로 귀에 잘 들어옵니다. 누군가 남의 이야기나 소문을 말하면, 무슨 일인가 하며 귀가 커진 것처럼 잘 들립니다. 그건 저도 포함입니다만, 그런 목소리는 너무나 잘 들립니다.
그럼「크디큰 언령」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당연히 신의 말입니다. 신께서는「그런 것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너라.」라고 항상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우리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인간의 세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만나, 친구에게 무슨 고민이라도 듣고 있는 중에 신의 목소리가 들리면「신이시여 잠깐 조용히 해 주십시오. 이 사람은 큰 문제를 안고 있으니!」라고 하며, 우리는 그런 것을 열심히 하고 있지요.
그것은 확실히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께서 항상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 찬가는「수정의 세계가 되면 그 어떠한 숨기고 있는 일도 훤히 드러나리라」
이미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보통은 이 현상의 세계, 지상에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그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마음이 나타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얄밉다」라든가 질투의 마음 같은 그런 것들이.
영계에서는 이미 야주전환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 안을 신의 빛이 찬연히 비추고 있지 않습니까? 빛이 비춰지면 그림자가 생기듯이, 우리는 그 그림자를 보고 있습니다. 자신 마음 안의 많은 것들이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정 세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비밀이라든가 부끄러운 것이라든가, 그런 마음속의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주위에 죄다 내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신께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신께서는「감추지 않아도 된다.」「나는 환히 다 들여다. 본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리고「너의 부끄러움은 이미 전부 없애 주었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성경에도 있듯이, 신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이미 닦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수치스럽다, 감추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울고 싶어지는 나 자신, 부끄러운 과거, 그런 여러 가지를 없애주셨으며, 우리의 눈물을 신께서는 닦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께는 그 어떤 것도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네 번째 찬가는「매우 쉬운 신의 진실의 길을 무시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
신께서는 있는 그대로로 좋다고 하시므로 이런 간단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있는 그대로의 너를 나에게 바치거라.」라고 신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아직 신 앞에 나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먼저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되고나서 라든가, 이런 행을 할 수 있게 되고나서 라고 하며, 계속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좀처럼 잘 안되지만 언젠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하며 계속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찬가는 결국「지옥 길도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든지 선택하는 대로 되는 이 세상이리.」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것도 천국으로 가는 것도, 결국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다. 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사실은 선택권은 없습니다. 사실은. 하지만 신께서는 자비의 마음으로「네가 결심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라고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계율신앙이 지옥으로의 길로 통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계율신앙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주체로 한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행을 할 수 있었는가, 무엇을 이 지상에 남길 수 있었나 라는 발상, 그러한 삶의 태도, 인간 세상을 주체로 한 태도로 간다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죽음」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미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므로, 그것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을 앞으로도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천국의 길인,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신께 보여드리고, 그리고 신께로 돌아가고 싶다, 신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삶의 태도로 갈 것인가? 그 길을 걸으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그래서「죽음」을 택하는가,「영원한 생명」을 택하는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겨져 있다는 찬가입니다. 이 5번째 찬가는.
그래서 지금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은 이야기로서는 알겠지만 계율이라는 것이 없어지면 이 세상의 질서는 어떻게 되어 버리는가, 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규칙, 상식적인 것에는 물론 따라야만 합니다.
하지만 계율 같은 것이 없어진다면, 누구도 남에게 감사하지 않게 되고 엉망진창인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지요. 계율신앙 쪽이 좋다, 감사와 사랑에 가득 찬 사람이 더욱 늘어나야 한다. 라는 마음.
물론 그것은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우리에게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명주님 찬가에「오로지 신의 커다란 마음에 부합하여라. 사람의 이목에는 마음 끌리지 말라」라고 하듯이, 우리는 신보다도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신경이 쓰입니다. 또한 우리는「신이시여. 신이시여」라고 하면서, 남에게 무슨 말인가 들으면 우리의 마음은 한순간에 그 말에 마음이 끌려버립니다. 내 마음이 즉시, 신보다도 지상 쪽에 주체성을 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비슷한 찬가로「오로지 신의 커다란 마음에 부합하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참다운 사람이리.」
「오로지 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저 오로지, 신의 바람대로 살아간다, 그렇게 애쓰는 사람이 참다운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사람」까지도 아니었던가 하게 되지요. 정말로. 명주님께서는 우리를「짐승」이라고 표현도 하십니다만.
이 두 찬가는, 찬가로서는「와 대단한 찬가이다」하게 됩니다만, 하지만 이것은 내용으로서는 엄합니다. 사람의 눈이나 입에 마음 쓰지 말고, 그저 오로지 신의 마음에만 마음 쓰며 살 거라.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사람」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참배를 하는 것도 결국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요. 「참배하는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찬가를「지금까지는 인간 중심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신의 큰마음에 부합하도록 열심히 살아가자」라는 식이나, 이 찬가를 계율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불가능했습니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커다란 마음에 부합한 삶의 태도는 불가능했습니다.」「사람의 이목에 마음을 쓰는 저였습니다.」「무슨 일이든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평등한 사랑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제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 입니다. 우리는 바로 뭐든지「교육화」「계율화」하려 하지요.
교주님 말씀도, 예를 들면「숨」의 교도가 있으면, 바로「나는 실천하고 있는가?」「몇 사람이나 하고 있을까?」
「당신은 하고 있나요? 하지 않나요?」하게 되며,「맡기는」것도 바로「당신은 맡기고 있습니까?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게 되지요. 「참배합니까?」「신께 회개합니까? 회개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나는 아직 진심으로 회개가 안 됩니다.」 라든가,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 정도로 뭐든지 계율 쪽으로 가지고 가 버립니다만, 그렇지 않고 역시 먼저「불가능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제 일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리고「그래도 이런 저라도 신께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신 곁에서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그리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정한 뒤에도 많은 생각이 들 겁니다. 결심했다고 해서 갑자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장밋빛이 되는가 하면, 그것은 형태상으로는 바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정한 후의 시간(천국의 신께 돌아간 후의 시간)은, 이번에는 구원의 시간이 아닐까요? 어떤 마음을 가지든「아, 이것은 지옥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명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며, 또 지금 교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진정한 신앙이며, 새로운 신앙인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낡은 신앙」「새로운 신앙」이라고 합니다만, 사실은 그것에 구별은 없습니다.
「낡은 신앙」이라고 하면「그럼 지금까지의 시간은 뭐였지?」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고, 지금껏 쭉「지옥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구원해내자」라는 것에, 우리의 마음은 쓰여 져 왔습니다. 「노력해야만 한다.」「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감사하려하지만 안 된다.」라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려 하는 우리의 모습, 또 우리의 미흡함을 신께서는 인류 역사의 집약된 모습으로서 예외 없이 전부 받아들여 주시고,
구원의 신업을 위해 우리를 써 주셔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의 의지로 구원의 신업에 쓰임 받는다. 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앞으로도 자신을 구원되는 측에 두고, 구원되어야만 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표현해 가는가? 아니면 용기를 가지고 자신은 천국에 올라, 앞으로의 시간을 신과 하나가 되어 구원의 신업에 쓰임 받는가?
느끼고 갖는 마음은 지금까지와 똑같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아 나는 이것을 구원하기 위해 온 것이다」라고 여기고, 신과 함께 걷는가. 걷지 않는가. 이것을 결정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이야기 자체가 잘 이해가 안 될지도 모릅니다. 만일 제가 오늘「무슨 일이 있든, 어쨌든 여러 가지 일에 감사 합시다」라고 한다면,「그 이야기 잘 알겠다!」할 것입니다. 「평등하게 여러 사람을 사랑해 갑시다.」라고 한다면「그 이야기는 잘 알겠다!」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 안에 명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조대대로부터 이어지는「막대기」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막대기에 따른 이야기라고 하며「잘 알겠다!」라고 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새로운 신앙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명주님께서는 그 누구도 한 적 없는 신업을 하시려 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렇듯 사실은 간단하게 알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교주님에 의해, 진정한 신앙을 아는 길에 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은 간단한 것입니다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게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예를 들면 오늘도 신께 많은 공양물을 올리고 있죠. 모두다 너무 보기 좋습니다.
이것은 형태로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것을 신께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선도 가장 예쁜 생선, 과일도 상처 없는 것으로 최고의 것을 신께 올리며 성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고 – 이것은 무엇이지요? (신전으로 뒤돌아보시고 공양물을 보시면서) 이 천도 복숭아 같은 이것. 그리고 이 배도 좋습니다만 – 이러한 것을 우리는「나는 감사가 되는 훌륭한 인간이 되고 싶다」라고 하며, 신께 좋은 배를 보여드리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신이시여. 이 좋은 천도복숭아는 어떻습니까? 제가 열심히 노력했습니다.」라고 하며 오른 손을 내밉니다. 하지만 자신의 왼손은 등 쪽으로 가져다 놓고, 신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는 상한 생선, 상한 복숭아, 상처가 있는 배를 많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끗한 것만을 신께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신께서는「그 뒤에 들고 있는 것을 내 봐라」「지금 감추고 있구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형태상으로는 깨끗하게 해야만 합니다만, 하지만 우리 마음 안에서는, 모든 것을 삼보에 올리고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신께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께서는 정말로 기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수확하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주님께서는 신의 그런 사랑을 17년간, 여러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려 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의 자식이 된다」라는 것도, 부모에게 숨기고 있는 일이 있다면 진정으로 그 부모의 자식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버지에게 매달려라,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어렵게 생각해버리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교주님께서는 제 어머니와 일체가 되셔서, 우리를 진정한 기쁨의 길로 데려가시려 해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의 마음 안에 어떤 마음이 있든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신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분명 교주님께서는 기뻐해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주님께서는 이 17년간, 18년간 열심히 우리의 마음을 해방시켜 주시려 해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쭉 감옥에 살았습니다. 계율이라는 감옥. 교주님께서는 그 감옥의 열쇠를 열기 위해 와 주셨고「이제는 나오거라.」「언제까지 죄인처럼 있을 거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신께 바칠 수 있다면, 교주님께서도 기뻐하시고, 교주님께서 기뻐하시면 교주님께서는 명주님의 성업을 계승하고 계시기 때문에 명주님께서도 기뻐하시며, 명주님께서 기뻐하시면 신께서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신께서 기뻐하시면, 신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느낀 적 없는 기쁨, 행복을 우리 안에서 반드시 활활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말로 칭칭 얽매인 듯 한 인생이었습니다만, 신께서는 그것을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의 인생을 크게 열어주신다 라는, 대단한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눈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나는 살날이 얼마 안 남아서 괜찮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선택하는 대로 되는 이 세상이리.」라고 하는데, 이 선택은 지상을 떠난다면 더는 하지 않아도 좋은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죽어서 지상을 떠난 후에도, 신께서는「너는 어느 쪽으로 할 것인가?」라고 계속 물으십니다. 그러니 이것은 오늘 결정하는 게 좋습니다. 신께「어느 쪽으로 할 것이냐?」라고 매일 질문 받고 싶지 않으시지요?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는 쪽이 분명히 좋습니다. 그것은 신께서도 기뻐하시며, 인류를 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을, 오늘부터 용기를 가지고 함께 걸어갑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