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에 돌아가는 건 지금」마사아끼사마 성언 2024년 12월 15일 세계메시아교 특별축전 및 크리스마스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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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32회 작성일 25-02-21 18:47본문
마사아끼사마 성언
「세계메시아교 특별축전 및 크리스마스 콘서트」
2024년 12월 15일
「에덴동산에 돌아가는 건 지금」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있었는데, 노래로 전부 말해 주었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 자리로 돌아갈까 합니다(일동웃음) 농담입니다. 코러스 분들 연습 하시느라 힘드셨을텐데,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드립시다(일동박수).
제가 앉아서 느낀 것은, 오니즈카씨의 색소폰 때, 여성분들 눈이 하트가 되어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일동웃음). 멋있었습니다. 저도 넋을 잃고 보았습니다. 남자이지만 넋을 잃었습니다. 참배석 맨 앞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넋을 잃고 보았습니다.
여러 일이 있었던 올해도, 이것이 마지막 제전으로 이렇게 화려하게 한 해의 마지막을 마무리해 주셔서 감사히 생각합니다.
올해를 돌아보면, 제 자신 안에서 이 말이 가장 상징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신앙의 순수성」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의 순수성.
이것은 아프리카 앙골라에서「흙의 성지」의 지진제·성별식을 하여, 그곳에 아프리카 전역에서 2만 명이 모였는데, 그때 아프리카 분들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한데도 불구하고(실은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아프리카 분들의 신앙심, 신앙의 순수함이 대단하셔서 이 말을 여러분께 전해드렸습니다.
아프리카 분들은「나의 피에는 쿄-슈사마의 피가 흐르고 있다」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데「쿄-슈사마를 메-슈사마로 받아들인다」라는, 그 신앙의 순수성, 이것이 대단하여서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일본이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풍족하기 때문에, 뭔가 신께 대한 순수한 신앙심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도 옛날 메-슈사마 시대의 선배 분들이 가지고 계셨던 것과 같은 그런 맑고 순수한 신앙을 되찾자 라는 것이었지요.
이렇듯 아프리카 신도의 신앙의 순수성이라는 것은 있습니다만, 또 하나, 신앙의 순수성이라는 것에서 우리가 기억해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메-슈사마의 신앙의 순수성입니다. 우리의 교조인 메-슈사마의 신앙의 순수성.
순수라는 것은 보통 아이들에게 쓰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메-슈사마라고 하면 순수라기보다는 뭔가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셨고, 세상적으로 말하면 어렵다고 할까요, 복잡한 일을 하시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계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저는 메-슈사마의 신앙의 순수성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2주 전 본부 신곡감사제 때도 말씀드렸듯이, 농업이라는 것에 관해서 메-슈사마께서는 언뜻 보기에는 아주 단순한 생각입니다만, 흙이라는 것은 애초에 그 흙으로 만들어지는 농작물을 통해 인류를 양육하기 위해 신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것 아주 간단한 생각입니다. 단순한 생각.
하지만 메-슈사마께서는 한결같이 만약 흙을 신께서 만드셨다면 농약이나 비료는 쓰지 말아야 한다, 신께서 흙을 만드신다면 흙 그자체에「무한한 비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한한 비료입니다. 무한한 비료가 흙, 그 자체에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메-슈사마께서는 신께서 인류를 양육하시기 위해 흙을 만드셨다면 그 안에 반드시 무한한 비료가 있다고 믿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신께서 흙을 만드신 것이라면, 이것은 존귀하고 맑은 것이다, 그러니까 더럽혀서는 안된다 라고 해서, 닭똥이나 소똥, 말똥등, 그러한 것을 흙에 넣는다는 것은, 인간 주제에 신을 경멸하고 있다, 신께 대한 반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흙에 똥을 넣는다(모두 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메-슈사마가 보시기에 신께 대한 반역입니다. 굉장히 강한 말입니다. 반역이라는 것은.
이렇듯 신께서 흙을 만드셨다면, 그리고 흙이 깨끗한 것이라면 이것을 가공의 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자연농법이라는 농법에 의해 당신의 신앙을 형상화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또, 이것도 2주 전에 이야기했듯이, 예술이라는 것에 관해서도「아름다-운 꽃을볼때마-다 생각하노라 신-의능란하고 뛰어난-기술을」라는 찬가가 있습니다.
꽃을 보실 때마다 입니다. 꽃을 보실 때마다 신을 생각하신다는 이 메-슈사마의 순수함은 대단합니다. 이 한결같음. 메-슈사마께서는 꽃을 보실 때마다「아, 신께서는 대단하시다」라고 생각하셨습니다.
확실히 우리도 뭔가를 보고 설레는 일은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렇게 멋있었는데, 몇 년 동안이나 함께 있으면 더 이상 얼굴도 보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일동웃음), 하지만 메-슈사마의 신에 대한 마음은 일종의 연애심입니다. 꽃을 보실 때마다 설레고 신을 생각하셨습니다.
이것도 간단한 생각입니다. 창조주는 신이시며 꽃도 신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생각. 이것은 입으로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꽃을 보실 때마다「신께서는 대단하시다」라고 생각하시거나 예술품을 보셨을 때도「진짜 창조주는 신이시네요」라고 생각하십니다. 이 신께 대한 메-슈사마의 순수함, 한결같음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메-슈사마께서는 신의 최고 예술품은 인간이며, 인간의 몸에는 자연치유력이 있다, 그래서 비료가 흙을 더럽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약은 독이라는 약독을 호소하셨습니다. 신께서 모처럼 만드신 이렇게 대단한 신체에 약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께서 절대 좋게 해 주신다 라는 것으로, 그 신앙심의 표현으로서 약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약을 섭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는 인간의 몸도 흙도 신이 만드시듯이, 여러 비료나 닭똥이나 약도 신께서 만드신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사용해도 되지 않는가 하는 사고방식도 있습니다. 모두 신께서 만든 것이 아닌가 라는 논리이지요. 뭐, 확실히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버젓이 통한다면 뭐든 좋습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을 가져도 좋다는 얘기가 됩니다. 사람을 해친다든가, 위해를 가할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실행했다 하더라도, 그것도 신께서 하시니까 괜찮다 라는 것이 됩니다. 뭐, 신께서 모든 것을 하시는 건 확실히 사실이긴 하지요.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메-슈사마께서 종교단체를 시작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러 생각도 신께서 생각하게 한 것이다, 그러면 되지 않은가, 모두 신께서 만드신다, 그러면 되지 않은가 라고 한다면, 어째서 종교단체를 시작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신을 세상에 알릴 필요 없습니다. 신을 안 믿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신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도 좋은 것이다, 응, 그렇다 로 끝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역시 기준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이야기하는 약이나 농약의 메-슈사마의 기준이며, 그런 것을 통해서 신을 알아라, 신을 사랑하는 길을 걸으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최소한 그 메-슈사마께서 보여주신 기준은 존중해야 합니다.
그 기준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신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려는 것은 일종의 무브먼트(movement)입니다. 세계메시아교라는「종교」라고 하면, 종교에는 교의가 있고 이런 제의(祭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께서는 살아계시기 때문에 신업의 모습은 항상 바뀝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려는 것은 무브먼트입니다. 무브(move), 움직이다이기 때문에 항상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사아끼사마 추기: 저는 이것을「메시아 무브먼트 Movimento Messias」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신념을 호소하며, 약독이나 농약, 비료, 닭똥 같은 것은 전부 넣지 않는다고 하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고 좀처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메-슈사마 시대는 더 엄격했습니다. 그래도 메-슈사마께서는 이 일을 호소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약 사용을 반대하는 의사들도 있으며, 또는 메-슈사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농작물을 생산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 도달해 계십니다.
한편 우리는 EM이라고 해서 타협하여 메-슈사마의 기준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메-슈사마께서는 엄격하십니다. 그런 약이나 비료, 닭똥, EM 등의 부자연스러운 것을 사용하는 것은 신께 대한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메-슈사마의 기준을 전달한 결과, 그런 이상한 사고방식이 있나요 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에서 그런 것들을 호소해 주시는 의사의 생각 등을 우리가 좀 공부할 필요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전달할 때, 반대를 해도 아니 이런 생각도 있다, 의사도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라고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메-슈사마 시대에는 그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역풍은 더 강했습니다.
우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세상에서는 메-슈사마께서 말씀하신 여러 일을 우리보다 먼저 호소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부터 배워야 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든 메-슈사마께서는 관철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해, 뇌일혈이라는 병에 걸리셔서, 보통이라면 병원에 가시지만 메-슈사마께서는 가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뇌일혈이 되시고 나서 10달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즉, 신에 대한 애정을 관철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서는「병원치료를 받았으면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신거야」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메-슈사마께서는 신께의 사랑을 관철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신께 내 몸을 맡기겠다고 하시고, 병원치료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하는데, 의료에 의존하여 약이나 수술 등을 하면, 10개월은 커녕 더 빨리 승천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의료에 의존한다고 해서 반드시 오래 살 수 있을지 어떨지, 그것은 모릅니다. 미국의 연구에서는 의원병이라고 해서 의료개입이 원인으로 사망하는 것이 심장병이나 암에 이어 사인의 3위(마사아끼사마 추기: 적게 잡아도 3위로 알려져 있습니다)라는 연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의료가 원인으로 사망하는 분들이 뇌졸중 같은 병으로 사망하는 분들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릅니다. 메-슈사마께서 병원치료를 받으셨다면 정말 더 오래 사셨을지 어떠셨을지는 모릅니다. 더 일찍 돌아가셨을 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든 세상에서 보면 메-슈사마가 이상할지도 모릅니다만, 그런 병에 걸리셔도 신께서 좋게 해 주신다는 신께 대한 사랑을 관철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신께 대한 사랑을 관철하시고 돌아가신 분이 또 한 분 계시지요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은 성서가 있어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며,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합니다만, 2천년 전에 태어나셨을 때는 그냥 목수의 아들입니다. 그저 목수의 아들로 툭 태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전 인류의 죄를 속죄한다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죄는 형체가 없는 것이지요. 아니, 뭔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을 없앤다고 하고 그것을 실행하면, 응, 대단하다 라고 하는데, 전 인류의 죄를 제거한다니 이런 추상적인 일은 없지 않습니까? 사실은 가장 구체적인 것입니다만.
그래서 이 목적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 권력자들에게 싸움을 거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나는 이런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 이런 행위도 하고 있으니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전 인류가 예외 없이 죄인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지도자들은 곤란해지지요. 종교적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는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 헌금도 하고 있다, 이것을 하고 있다, 저것도 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일반 민중보다 자신들은 위에 있는 존재이며, 종교를 지도하는 입장에 있다 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전 인류 모두 죄가 있다고 말을 하니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뭐냐 하면, 그건 유대교를 파괴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십계명을 바탕으로 많은 계율로 이루어져 있던 유대교를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지금으로서는 대단한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막강한 조직에 대해 혼자 맞서서 인류의 죄를 속죄한다고 하면, 이 사람 무슨 말을 하는거야,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뭔가 대단한 힘이 있을 것 같았는데, 싸운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30살 조금 넘어서 십자가에서 죽어버려서, 뭐야 결국 죽었잖아 라는, 그 정도의 일입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도로 여겨지는 그리스도교인은 많이 있지만, 당시는 이단도 이런 이단이 없습니다. 인류의 죄를 제거한다고 해서 유대교에 싸움을 걸고, 그러더니 곧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대단히 완전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한 일은 보통이라면 머리가 이상하다고 하는 일입니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신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그 일념을 관철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신앙의 순수성이지요. 왜냐하면 도망가려 하면 도망가실 수 있었습니다.
최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기도하실 때, 도망가려 하면 도망가실 수 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결국 유다가 그 지도자들을 데려오고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시지 않았습니까? 왜 도망가시지 않았나요?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순수성을 관철하신 것입니다.
메-슈사마의 인생중에 메-슈사마의 신앙의 순수성을 나타내는 에피소드 중 하나로,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즈산 신사에 참배하러 가신 일이 있습니다.
실제로 도중까지 가셨는데, 컨디션이 나빠져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 참배를 시키셨습니다만, 요는 뇌일혈이 되시고 메-슈사마께서는 그것을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즈산 신사에 참배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 보통이라면 머리가 이상하다 라는 에피소드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71세의 할아버지가 이즈산 신사에 갑니다. 주변 사람들이「할아버지, 오늘 뭐하러 오셨나요?」라고 하면「오늘 신사참배하러 왔다」라고 하지요. 그러면「신사참배? 아 손자가 태어났네요」라고 합니다. 보통이라면. 그것에 대해「아니, 내 안에서 신의 자식인 메시아가 태어났기 때문에 참배하러 왔다」라고 하면, 들은 사람은 멍하니 있을 뿐입니다.
메-슈사마, 엄청난 순수성입니다. 이것을 형태로 나타낸다는 것은 대단하지요. 나는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났다, 어떠냐? 대단하지? 라면 이해하겠습니다만, 그것이 아니라, 그럼 이즈산 신사에 참배한다 라는 것이기 때문에, 이 아이 같은 순진성, 순진함은 대단합니다.
신앙의 순수성이라고 해도,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신과 자녀의 부모 자식 관계니까요.
메-슈사마의, 나는 새롭게 태어났으니 그것을 의사표시하자, 신사에 참배하겠습니다 라는 그 순진함은 대단합니다.
신께서 살아계신다 - 이것을 입으로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메-슈사마처럼 자신의 삶으로 나타내며 살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생각하면, 우선 애초에 신께서는 살아계시지 않는다, 신이라는 존재는 안 계신다고 하면, 더 이상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습니다만, 하지만 사실 신이 없다거나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생각조차도 신께서 들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무신론처럼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생각조차도 신께서 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 인류, 사실은 누구도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아무리「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라고 해도 믿지 않도록 시키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도망갈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신께서 살아계셔서 지금 우리에게 신께서「내 자녀여」라고 말을 걸어오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요?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살아 계시기 때문에. 신께서 갑자기「내 자녀여」라고 말씀하실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먼저「네, 아버지」라고 하게 되지요.
그 후에 무슨 말을 하냐면, 여러 대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중 하나로는「아버지는 일본어를 하실 수 있나요?」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어를 하실 수 있나요?」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신께서는 여호와라든가 야훼라고 불리는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신이지요.
그러니까「어, 아버지, 일본어를 하실 수 있나요?」라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 신께서는「할 수 있다」「게다가, 일본어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언어도 할 수 있다」라고 하시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아버지 대단하시네요」라고 하면, 신께서는「맞다」「왜냐하면, 내가 모든 언어를 만들었으니까」. 그것에 대해「아버지가 모든 언어를 만드셨나요?」라고 하게 됩니다.
이런 대화를 신께서는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신으로서는 자랑하고 싶으십니다. 아들에게, 딸에게「나 대단하지?」라고 자랑하고 싶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배워서 이 언어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설마 언어를 말하는 힘을 신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신께서 말을 걸으셨을 때「어, 신께서는 일본어를 할 수 있습니까?」라는 것조차 생각나지 않습니다. 어떤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나에게는 이 능력이 있다, 지혜도 있다 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메-슈사마께서 메시아로 새롭게 태어나셨다는 것은, 메-슈사마께서는 점점 점점 순수해졌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난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고 싶지요? 새롭게 태어난다고 하니까, 그것은 다시 한 번 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슈사마께서는 신사참배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신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아기가 되라, 순수한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메-슈사마를 그저 높은 곳에 두고, 그리고 뭔가 세상의 여러 생각이나 종교, 철학, 과학, 환경문제, 윤리, 도덕, 세상의 상식이라든지, 그런 것들에 칭칭 얽매여 완전 순수함을 잊어버리지 않았나요? 메-슈사마께서 가지신 순수성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만약 우리의 목표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면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할 것은, 만년에 신과 메-슈사마께서 하셨던 대화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목표로 해야 합니다.
「저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신사참배에 다녀오겠습니다」「그렇구나」라는, 부모와 자식의 순수한 대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전혀 거기에 도달할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를 짊어지고 있어서.
우리는 내키지 않는 세상의 지혜도 생겨버리기 때문에, 전혀 아기 로 돌아갈 수 없지 않습니까? 나에게는 지혜가 있다, 지식도 있다, 고생도 해 왔다 - 그런 것을 갑옷처럼 입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가는 방향이 반대인 것입니다. 메-슈사마께서는 높은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일단 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깨서 눈이 떠졌습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흔히「오늘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것을 말하는데, 그런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침에 일어난 순간「아,나는 호흡하고 있다」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호흡은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요. 호흡도 신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지금 저는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볼 수 있습니다,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라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아, 지금 저는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지 않지요. 아니 드물게 생각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호흡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쉬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혀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는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호흡도 할 수 있고 눈도 보이고 뇌도 아무 이상없이 일하고 있고, 뭔가를 맛볼 수도 있고, 언어도 보통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그런 말을 들어도 나는 그런 것은 다 내 힘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하게 됩니다. 자신으로서는 그다지 신의 필요성은 느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신께서 전부 그 힘을 주시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요는 자신의 육친을 앞에 두고「나는 나의 힘만으로 살아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은 없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어리광 부리는 아이의 모습입니다. 나는 대단하다, 나는 대단하다 하며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신께서 보시기에는 그저 독립을 하지 않는 존재로 보여집니다. 아직도 너는 응석부리고 있구나 라고 말씀하십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세상에 나오면 여러 사람이 있지요. 눈이 안 보이는 분도 계시고 귀가 안 들리는 분도 계시고, 맛을 느끼지 못하는 분도 계시고, 좀 더 구체적으로 손발이 없는 분도 계십니다. 아니면 사고로 그렇게 되신 분이라든가. 우리는 그런 분들을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을 하나요?
그저「아, 불쌍하다」라고 생각하나요? 「나에게는 보는 힘도 듣는 힘도 있는데 이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저 사람은 귀가 들리지 않는다. 불쌍하다」라고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게 아니라, 실은 신께서 그런 분들에게 그 신업을 맡기고 계신 것은, 신께서 우리에게「사실 너의 눈이 보이지 않았던 것을 내가 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너는 사실 장님이지 않았나? 내가 너에게 보는 힘도, 듣는 힘도 주고 있지 않느냐?」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호흡도, 그런 말을 들어도 나는 호흡할 수 있다며 기껏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호흡법 정도입니다. 이런 호흡법이 좋다든가. 하지만 호흡법을 운운하기 전에 애초에 신께서 호흡할 힘을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없이는 어떤 호흡법을 열심히 한들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는 호흡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뇌나 심장이 잘못되면 한방에 호흡을 빼앗깁니다. 신께서 우리를 끌어올리려 하시면 우리는 바로 죽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여러 사람들-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리고 팔다리가 없는 등, 이런 분들과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런 것에 대한 인식이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께서「너희가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조금은 알아라. 지금 내가 너희에게 크게 사랑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아라」라는 것을 우리에게 전하려 하고 계십니다.
뭐, 좋습니다. 나는 눈이 보이지만 이 사람들은 눈이 보이지 않아서 불쌍하다, 뭔가 자선사업이라도 할까, 그런 생활 방식으로도 좋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서 하는 일이지요. 물론 그 자체는 존귀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하지만 우리「사실은 모두 신의 것이었던, 보는 힘도, 듣는 힘도, 맛보는 힘도, 호흡하는 힘도, 생각하는 힘도, 몸을 움직이는 힘도 모두 나의 것으로 해 버렸기 때문에, 신께서는 이런 분들을 쓰셔서 제가 어떤 것에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가르쳐 주시려 하시네요」라고 하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의 마음의 고통을 알 수 있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나는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할 수 없어서 불쌍하다 라는 배려는 사실 배려가 아닙니다. 아, 나를 위해서 이런 신업에 쓰임받고 계신다, 내 탓이었다, 이런 부분을 함께 구원해 주셨구나 라는 자세, 그것이 진정한 상냥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순수한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일 순수한 건 사실은 신이십니다, 신.
오늘은 2024년 12월 15일, 2024년도 끝이고 21세기도 이제 사반세기를 끝내는 지점에 돌입했는데, 우리 인류는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앞으로도 인류가 번영하고 점점 과학기술이 진화해 가는 것, 그것을 신께서는 원하실까요? 물론 번영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 계신 신 없이는 번영한들 아무 의미도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신의 순수성을 생각하면, 신께서는 원래 단 한 분이셨다는 것,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살고 싶으셔서, 모든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 없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나요?
이것 엄청 간단한 것입니다. 신께서는 멋진 가족과 함께 행복한 세상을 살고 싶어하셨다, 그것뿐입니다. 혼자 사시는 것보다 많은 가족과 - 이렇게 계시잖아요(마사아끼사마, 회장 안에 계신 분들을 의미하는 제스처를 하심) - 모든 자녀와 가족이 되어, 대가족이 함께 행복한 세상에 살고 싶다,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 그런 순수한 생각을 신께서는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께서는 에덴동산에서 하시려 했지요, 아담과 이브를 통해서.
아름다운 에덴동산이라는 천국에서 그것을 하시려 했습니다. 당신의 자식을 낳으시고. 성서 맨 처음에 적혀 있습니다.
신께서는 혼자 계셨는데 가족이 되기 위해 인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선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어버렸습니다. 신께서「안 돼」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먹어 버려서, 그것으로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그 일로 인해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노동을 해야만 하는 길고 괴로운 인생이 기다리는, 그러한 인류의 활동이 기다리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원죄이지요, 원죄. 원죄라고 하면 왠지 그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든가 그리스도교에는 원죄라는 교의가 있으니까 우리는 뭔가 복잡하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만, 원죄라고 해도 그런 복잡한 것이 아니라,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것인 호흡,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는 힘, 듣는 힘, 맛보는 힘, 생각하는 힘, 움직이는 힘, 말하는 힘, 언어 - 전부 자신 것으로 하고 있지 않나요? 이것이 나무열매를 따서 먹은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담과 이브의 원죄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어떤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원죄는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우리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문명을 구축하려 하고 있지요. 우리의 힘으로 대단한 문명을 구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았다고 해서, 거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삶의 방식, 모습에서 벗어날 방법이 우리는 없습니다.
모든 일에 대해 항상 신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여러가지를 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구원받을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버려서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없애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늘 들은『무상의 사랑』가사에도「나의 자유를 위해 죽으셨다」라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그런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것을 가져가서 먹고,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서 자랑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그 모습 그 자체를 용서한다. 만약 용서를 받아들인다면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신께서는.
이것을 듣고 우리가, 신이시여 죄송합니다, 돌려드립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을 때, 신께서는 그 돌려드린 것을 그대로 없애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약 그렇게 하면 다시 주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는 힘도, 듣는 힘도, 말하는 힘도, 호흡하는 힘도, 전부 또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궁극이 생명입니다. 메-슈사마께서는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신이시여, 저는 당신의 목숨을 제 것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바치시고, 그대로 목숨을 빼앗기시고 돌아가시는 줄 알았더니 돌아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신께서 생명을 다시 주신 것입니다, 관대하게. 그러니까 메-슈사마께서는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건, 예수님 덕분입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피가 없으면, 신께서는「너는 아직 내 것을 취한 죄 있는 모습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속죄주이시지요? 그렇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없애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을 믿을 자유, 믿지 않을 자유, 뭔가를 받아들이고 싶은 자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자유, 이것 다 신께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교(信敎)의 자유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실 신께서 보시면, 신교의 자유라니 무슨 소리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게 하는 마음을 내가 주고 있는데, 자신에게 믿을 권리가 있다느니, 믿지 않을 권리가 있다느니,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느니 무슨 말을 하고 있냐고 하십니다만, 하지만 신께서는 엄청난 관대함으로 그 자유를 주고 계십니다. 그 우리의 자유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말을 사용하고 호흡하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친구를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든가, 인생에 있어서의 그런 모든 자유입니다. 그 우리의 자유를 위해 죽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일본 전역에서 크리스마스 축하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리스도권인 서양 등의 사람들은, 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속죄가 있기에 축하한다 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다 라고 하는데, 사실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보면 바보취급 할 일입니다. 사실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축하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받아들이지 않고「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럼 왜 서양권 사람들이「일본인인 당신들은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받아들이지 않고 크리스마스 축하 같은 것을 하는데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말해 오지 않는가 하면, 그것은 돈벌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양권 문화를 수입해서, 일본의 1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 문화를 받아들이면, 그것과 관련된 것으로 경제적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인이 그리스도도 믿지 않는데, 와 크리스마스다 라고 하며, 크리스마스 디너, 크리스마스 선물교환을 하는 것은, 사실상 바보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거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실은 메시아교인 우리가, 일본인인 우리가, 미국인 등에게 「진짜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이렇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전혀 그런 기개가 없지 않습니까? 그저 주어진 것을 즐기자 하는 그런 모습은 사실 멋있지 않습니다. 일본인으로서.
하지만 적어도 세계메시아교인 우리는 서양권 사람들에게, 진짜 크리스마스 축하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세계메시아교이다, 세계메시아교가 진짜 크리스마스 축하를 하는 것이다, 원죄의 진정한 의미는 이렇다고, 예수님의 진짜 마음은 이렇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우리의 자유가 없다고 한다면, 먼저 그것이 우리의 첫걸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토대로 메-슈사마께서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설계도를 여러 가지 나타내신 것이지요. 예수님에 의해 죄가 전부 없어진 새로운 세계의 설계도는 이렇습니다 라는 것을, 메-슈사마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다음 단계입니다. 지상천국건설. 메-슈사마께서는 나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천국을 만든다 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천국이 가까이 온 것」은 이미 예수님으로 끝났습니다. 속죄가 끝났으니까요. 그 메-슈사마의 전제를 가볍게 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제를.
지금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았고, 메-슈사마의 탄생일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불교나 신도(神道)라든지 가족이나 회사, 이웃과의 관계라든지, 그런 것들을 많이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걸 전부 벗어 내던지고 신의 진리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신이시여,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받고 당신께로 돌아왔습니다, 라고 해야만 합니다.
적어도 크리스마스인 지금, 우리는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구축하신 토대를 바탕으로 메-슈사마의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활동이 있기에, 이것에 전신전령을 바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노래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메-슈사마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강하게 바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브라질에 갔을 때 신앙을 오래 하신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도 중요하지만 자신에게는 메-슈사마가 중요하다 라는 것을 저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과 악수를 하고 있는 사이 잠깐의 순간이었는데, 제가 그 후 생각한 것은「하지만 그 메-슈사마께서 지금 가장 바라고 계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먼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것을 메-슈사마께서 강하게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콘서트라고 해서 이런 곡을 많이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는「신앙의 순수성」의 한 해였습니다. 메-슈사마의 순수성, 순진함, 예수님의 순수성, 그리고 그 근원이 되는 신의 순수성.
즉,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신께로 뛰어들어 포옹하는 것입니다.
가공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길을 저는 걸어야 하며, 그것에 저의 행복이 있다는 것으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에 눈을 뜨겠다는 결의를 하고, 우리 일동, 올해 얼마 남지 않은 날과, 또 내년에도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 넘치는 희망으로 가득 차, 기쁨 가득 생생하게 함께 걸어 나갑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