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야기」마사아키사마 성언 2025년 3월 1일 풍양기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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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16회 작성일 25-04-14 20:06본문
풍양기원제 마사아키사마 성언
2025년 3월 1일 본부신전
「사랑 이야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날씨가 좋고 따뜻하네요. 하지만 3일 후에는 눈이 내릴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일기 예보를 봤더니, 3일 후 화요일에 눈 모양이 있더군요. 그래도 오늘은 따뜻해서 다행입니다. 오늘 눈이 왔더라면 큰일이어서(일동웃음). 우와지마 분들이 오셨네요. 멀리서 감사합니다.
이 장소에서 쿄-슈사마께서 출좌하셔서 제전을 하는 것도, 오늘 풍양기원제와 5월 월례제 두 번이겠네요. 6월에는 이미 이곳을 떠나고, 7월에는 저는 유럽에 가기 때문에 신도 여러분이 모이는 월례제 때는 제가 없겠네요. 8월은 조령대제이고 다음은 9월.
5월 이후, 쿄-슈사마 출좌의 월례제는 9월. 어떤 모습을 메-슈사마께서 준비해 주실지 지금 저는 설렙니다.
본부에 모셔져 있는 이쪽의 조령사 미타야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제의(祭儀)관장은 쿄-슈사마께서 하시기 때문에, 앞으로는 교주 관저 안에 잘 모시고, 쿄-슈사마 아래서 매일 예배드리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년 12월 24일의 화해로 확실히 한 것은, 향후 세계구세교의 제의를 관장하는 것은 와타세 노부유키씨라고 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구세교는 이 분이 교주. 지금의 세계구세교 교주는 토우까이 대학 명예교수인 와타세 노부유키 씨. 오카다가의 허가 없이「오카다 노부유키」라고 칭하고 있습니다만(일동웃음), 뭐, 좋습니다 그것은.
하지만 분명 와타세 씨는 제의 관장을 하지 않으니 임원분들이 할까요? 어느 쪽이든 그런 방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메-슈사마 손자인 쿄-슈사마 아래에서 제대로 조령님을 모실 것인가, 그 어느 쪽이 좋은지는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조금 무거운 이야기가 됩니다만, 오늘은 마미가 와 있어서 일어서서 인사드리겠습니다(마미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심, 일동박수). 감사합니다.
마미가 이런 공무에 나선 것이 얼마 만인가 하면, 2022년 메시아 강탄 본축전 이후로 3년 만이네요.
단, 그 전에도 또 그 후에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집안일이나 가족일, 아이들 일, 봉사도, 저는 모든 일을 다 아내에게 상담하기 때문에, 이제 아내 없이는 살 수 없어서 아내에게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잠깐 아내로부터의 포인트를 벌었습니다. (일동웃음).
그래서 메시아강탄 본축전에 임했을 때「이 이야기를 언젠가 신도 여러분에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아내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당시 메시아강탄 본축전이라고 하는 것은 일생에 한번이라고 할까요, 역사상 한 번밖에 거행되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들 대단히 이 제전에 무게를 두고 향해 가는 중에(지금은 그 때의 공기감을 우리들이 조금 잊어버린 면도 있을지 모르지만) 제전은 6월 15일이었습니다만, 그 3일 전인 6월 12일에 아내의 임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미코또입니다.
이 임신에 대해 우리는, 메시아강탄 본축전을 향하는 중에 길조라고 할까요, 뭔가 매우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메시아강탄 본축전을 향한 열기의 마음과 매우 일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6월 15일날, 이것을 여러분께 말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 있었습니다. 「이 뱃속에 있습니다」「임신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만(일동웃음), 안정기에 들어가지 않으면 만일의 경우 무슨 일이 있으면 좀 문제가 되기 때문에 둘이서 꾹 참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무사히 아이는 태어나서, 오늘 이렇게 여러분께 마미와 저의 3년이 넘은 소원이 이루어져서 다행이다, 여러분께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단지「마미와 나의 자식이다」라는 것 뿐이라면 이것은 여러분과 관계가 없지만, 오랫동안 세계구세교는 또 당연히 세계메시아교는 메-슈사마께서 2대 쿄-슈사마께 유언으로 쿄-슈의 자리를 맡기신 후에는 오카다가문 바탕에 있는 쿄-슈제를 깔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아이라는 것은 신도 여러분에게도 소중한 존재이고 신도 여러분의 아이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우리의 아이는 당연히 신으로부터 맡고 있는 것입니다만, 그뿐만 아니라 신도 여러분으로부터 맡고 있는 고귀한 아이라는, 그런 심경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심경은 물론 장남만이 아니라, 우리의 처음 두 명의 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제가 생각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따라온 구세교의 규정 중에, 교주를 계승하는 것은 남자가 우선된다 입니다. 일본 황실도 아직 그런 상황이지요.
하지만 잘 생각하면, 원래 구세교는 지금까지 네 분의 교주 중 두 분이 여성입니다. 2대 쿄-슈사마와 3대 쿄-슈사마는 여성입니다. 그런데도 교주는 장남이 계승해야 한다고, 그렇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분명 남성과 여성의 활동은 다릅니다. 그것은 완전히 똑같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야기하고 있듯이, 남성 안에 여성이 있고, 여성 안에 남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남성도 여성도 평등한 것인데, 그런데도 장남이 계승한다는 규정으로 지금까지 되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남성 우위의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한 규정이 아닌「남녀는 평등하다」라는 견해가 반영된 규정, 규칙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서, 이것은 만약 교주제가 존속한다면의 이야기입니다. 3대 쿄-슈사마 때도 교단 정화가 일어났고, 4대 쿄-슈사마 때도 일어났고, 이번에 저의 때에 완전히 쫓겨난다면 더 이상 전혀 관계없기 때문에(일동웃음).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 쪽에서 교주제를 존속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계승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선택할 권리는 첫째인 장녀가 가져야 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차녀. 이것에 남녀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니, 만약 교주의 일이 엄청나게 격렬한 육체적인 무엇인가 따르는 것이라면 이해합니다만, 교주라는 것은 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남녀의 차이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마침, 새로운 여러 규정을 국가에 등록해야 해서 이것에 대해서도 바꿀 기회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사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모습이 앞으로의 시대에 적합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압니다. 남자가 가지고 있는 그 의의를 압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장녀와 그리고 차녀가 태어나자 저에게, 다음에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좋겠네요 라고 하시거나, 미코또가 태어나자 이번에는 남자 아이가 태어나 다행이네요 등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물론 옛날이라면 저도 뭔가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사고방식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그런 말을 듣고 생각한 것은, 만약 이런 분들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저는, 장녀와 차녀를 뭔가 한 발 뒤떨어진 존재로 보고 있거나, 남자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을 100이라 한다면 장녀와 차녀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은 99로 하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 됩니다.
저는 그것에 모순,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만약 그런 발언을 인정해 버린다면, 장녀와 차녀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가 느끼는 것 자체가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라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교주제가 존속한다고 해서, 물론 결과적으로 남자아이인 미코또가 계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처음의 권리는 첫째 아이인 장녀가 가져야 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듯 본래 구세교라는 것은, 오카다 가문을 중요시하며 걸어오는 중에 지금 이 재판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쿄-슈사마께서 벽운장을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구세교 쪽은, 재판으로 나오도록 정해졌다는 것을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신년제 때에도 말씀드렸듯이 만약 우리 메시아교 측이 화해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판관이 제시한 각하 판결이 나왔을 경우, 벽운장에서의 쿄-슈사마 퇴거청구 재판을 구세교는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 퇴거청구도 틀림없이 각하 판결이 되었습니다. 종교적 내용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법원에서 판단할 수 없다 하여 각하. 그래서 쿄-슈사마를 벽운장에서 쫓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즉, 세계구세교의 교주추대 취소의결은 적법하지 않은 위법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화해의 대화의 과정 속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 땅은 우리들의 것이다, 이 건물과 교회는 우리들의 것이다 라는 것으로 우리가 다투지 않도록, 쿄-슈사마께서 벽운장에서 나오시겠다는 판단을 해 주신 것입니다.
화해를 하지 않고 법적으로 다툰다면 판결은 각하로 나오기 때문에 쿄-슈사마를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즉 구세교의 교주추대 취소의결은 사법부에서는 적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지금 우리가 모여 있는 세계구세교의 성지 내에 있는 이 장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화해에서 메시아교 측은 나오기로 합의했지만, 화해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각하 판결이 나오면, 우리는 계속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눈에도 명백해집니다. 요점은 세계구세교 주의 빛 교단(지금은 세계메시아교)을 포괄 피포괄 관계를 끊고 쫓아냈다 라는 세계구세교의 의결이 적법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구세교 쪽의 아는 분들이, 메시아교가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한 일은 옳았다 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만, 법원은 각하의 방침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 설명은 법적으로는 사실이 아닙니다.
세계구세교는 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쿄-슈사마를 벽운장에서 쫓아낼 수도 없었고, 세계메시아교를 자신들의 성지에서 쫓아낼 수도 없었습니다.
원래 세계구세교에서는, 비교하는 것도 송구스럽습니다만, 요점은 천황제와 비슷한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벽운장은 말하자면 황궁이지요.
세계구세교 사람들은 쿄-슈사마를 벽운장에서 쫓아냈다, 벽운장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천황 폐하 필요없다, 하지만 황궁은 대단한 장소이다, 그렇다면 천황 폐하를 쫓아내고 황궁을 우리들의 것으로 하자 라고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해봤자, 그 빼앗은 황궁은 어떤 가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쿄에 있는 황궁은 천황 폐하가 살고 계시기 때문에 황궁이고 존귀한 것입니다. 천황 폐하가 사시는 곳이 황궁. 살아있는 몸을 가진 존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존귀한 황궁이 되는 것이지, 천황폐하를 말하자면 쿄-슈사마를 벽운장에서 내쫓고 이곳은 우리들의 것이다 라고 한들, 그것은 천황 폐하가 없는 황궁과 마찬가지이며 단지 역사적으로 뭔가 가치가 있는 건물이네요 라는, 그 뿐인 것입니다.
뭔가 역사적인 건조물을 손에 넣었습니다 라는 것 뿐입니다.
왜냐하면 벽운장에 앞으로 와타세 노부유키 씨가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산다면 미안합니다만(일동웃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메-슈사마 찬가에도 있었듯이, 역시 가장 존귀한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사람으로서 정말로 옳다는 것입니다.(「가장높-고 존귀한-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사람이 진정한사람이리」).
확실히 이 세계구세교의 자세는 완전히 우리의 자세입니다만, 하지만 그들이 표현하고 있는 이 실상은 결국 사람보다 물질인 것입니다. 물질.
세계구세교는 쿄-슈사마를 업신여긴 것인데, 세계구세교 교칙에서는 쿄-슈사마는 신자 통합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쿄-슈사마 즉 신도」인 것이지요.
그런 중에 쿄-슈사마를 업신여기고 물질을 우러른다는 것에 대해, 오늘 메-슈사마 찬가에도 있었듯이, 물욕이라든가(「물욕이외에 소망이-없-는 사람들-을 볼때마다신을아는 사람존귀하도다」), 물질에만 의지하거나(「물질에-만 의-지하는것의 어리석음을 세상사람깨달을 때가오는것이리」), 달아나는 행복이란 두 글자(「물질에—만 의지하여오로지 붙잡으려고 애써도달아나는 행복이란두글자)입니다.
물질. 미술품. 벽운장. 쿄-슈사마는 미행·도청·도촬을 해서 많은 부담을 줘도 된다, 어쨌든 제거하자, 어쨌든 물질, 벽운장이라는 건물이 손에 들어오면 된다, 미술품이 우리 손에 들어오면 된다, 성지가 우리 손에 들어오면 된다 인 것이지요, 세계구세교의 사고방식은. 물욕입니다. 그러니까「달아나는 행복이란 두글자」라는 말씀처럼, 그 걸음 속에 진정한 행복이 얼마나 있을까 하고, 그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 한편, 쿄-슈사마께서 벽운장을 나가시고 또 성지 등 여러 일이 있지요. 이 사태에 대해 쿄-슈사마께서는 어떻게 느끼고 계실까를 생각하면, 저는, 쿄-슈사마께서는 지금 슬퍼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벽운장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슬프다 라고 하는 슬픔이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 물론 앞으로 세계메시아교로서 나아갈 수 있다는 기쁨, 메-슈사마의 마음에 보답하고 계신 기쁨은 느끼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쿄-슈사마께서는 동시에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어떤 슬픔이냐면, 그것은 2024년 12월 24일까지 쿄-슈사마께서는 세계구세교의 교주이셨습니다. 그러나 12월 24일 이후 세계구세교는 이제 완전한 별개의 단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쿄-슈사마께서는 그날 이후 세계구세교 신도를 생각하며 기도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슬픔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생각할 때, 공간은 관계없습니다. 원거리 연애 같은 것도 있듯이.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면 자신의 상념 안에 연결되어 오지요. 영선이라는 메-슈사마의 성언도 있습니다만.
이렇듯 쿄-슈사마는 설령 세계구세교 측으로부터 터무니없는 처사를 당했어도, 지금까지 그것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나의 모습이다」「이런 제 모습을 용서해 주셨네요」「메-슈사마께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시며 계속 세계구세교 신도들을 위해 기도를 해 오셨습니다. 「이것은 제 모습이네요」「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지난해 12월 24일까지 세계구세교 전 신도를 위해 이런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쿄-슈사마께서는.
쿄-슈사마께서는 물론 앞으로도 전 인류를 위해 기도를 하십니다만, 앞으로 직접적으로 세계구세교 신도를 위해 더 이상 기도를 드릴 수 없다는 그 슬픔을 가지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 세계구세교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이 중요하고 벽운장이 중요하고 미술품이 중요하고 성지가 중요한 세계구세교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쿄-슈사마께서 설마 그런 것에 슬픔을 느끼고 계실꺼라는 것을, 갑자기는 믿을 수 없습니다.
세계구세교 사람들은 벽운장을 떠나는 것이 쿄-슈사마께 있어 가장 큰 슬픔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물질이 손에 들어오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와, 우리 것이 되었다 라고, 그 정도밖에 생각할 수 없고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쿄-슈사마의 이 깊은 사랑을 이야기해도 그런 것은 거짓말이다, 좋게 포장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쿄-슈사마께서는 일종의 그런 슬픔 속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후에 사랑은 이깁니다. 최후에 사랑은 이깁니다(마사아키사마, 눈물을 글썽이며 눈을 감으심) 언젠가 그런 분들이, 쿄-슈사마의 사랑을 깨달아 주길 바라는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울 생각은 아니었는데(일동웃음), 이야기하는데 왠지 감동스러워서, 죄송합니다.
그런 쿄-슈사마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의 근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쿄-슈사마라는 존재는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지요. 이사회가 체(体)라고 한다면 쿄-슈사마는 영(靈)이며, 쿄-슈사마께서는 이 세상의 여러 현실적인 일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계속 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러한 영적 존재인 쿄-슈사마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이른바 신이라든가 메-슈사마라고 하는, 이미 몸이 없는 존재, 영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쿄-슈사마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우리의 영에 대한 자세, 우리의 신·메-슈사마에 대한 자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구세교 사람들이 한 일은 두려움도 모르는 자세와 방식이지요. 미행을 한다든가 쫓아낸다든가 하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자세의 근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오늘의 메-슈사마 찬가 첫 번째(「신을두려이 바른길을지키는 인간만듦이 나의소망이-요 사명인것이로다」)에도 있었듯이「신을 두려워한다」라는 것의 결여.
신을 두려워한다는 감각이 역시 우리 전체로서 희박합니다. 그것은 구세교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도 그런 점에서 매우 희박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르지요, 신을 두려워하라고 해도. 하지만 메-슈사마께서는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오늘 찬가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배독한 성서. 노아의 방주 부분을 선택했습니다만(「창세기」제6장~ 제9장) 신께서는 한 번 인류를 완전히 멸하시려 하셨습니다. 신께서는 우리를 만든 것을 후회하셨다고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신께서는 처음에는 사랑으로 인간이자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인간의 생각이 악한 것뿐이니 신께서는 우리를 만든 것을 후회하시고 전원 멸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신께서 우리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는 것입니다. 큰일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멸한다, 지구도 멸한다, 그것은 왜인가, 우리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아만은 살리자 라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초 신의 계획은, 신께서는 모든 동물과 전 인류를 멸하시고, 남은 노아와 그 자녀들과 남은 동물, 그것들은 최종적으로 천상에 끌어올려, 그것으로 인류의 역사는 이미 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신께서는 세찬 홍수를 일으키시어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자, 그 후 마음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노아가 제단을 만들고 기도를 드렸고, 그래서 신께서는 더 이상 인류를 멸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바꿔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 남은 것은 노아 덕분입니다.
신께서는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존재이신 신께서 우리의 소행이 너무나 심해서 우리를 만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요점은, 당신께서 낳으신 당신의 자식이 너무 말을 듣지 않아서「왜 이런 아이를 낳았나」라고 후회하시고, 인간을 멸하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노아가 중재해 준 덕분에 신께서는 마음을 바꿔주시고 인류를 멸하는 것을 그만두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자손으로 다시 인류는 번영해도 된다 라고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신께서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좋아졌기 때문에「자, 앞으로도 살아도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신께서는 인간이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것은 어차피 악한 것이기 때문에 멸해도 방법이 없다고 성서에 쓰여 있습니다. 요점은 신께서는 이미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두번 다시 멸하지 않겠다」로 해 주신 것은, 너희가 마음을 바뀌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되었으니 멸하지 않겠다 가 아니라, 신께서는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에, 이제 멸하는 것은 포기했다는, 그런 것입니다.
이때부터 노아에게 육식을 허락하십니다. 그때까지는 푸른 풀을 주셨지만, 앞으로 육식도 주겠다고 확실히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졌기 때문에「그럼 너희는 육고기도 먹어도 된다」가 아니라, 이미 신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셨습니다. 너희가 육고기가 먹고 싶다면 먹어라 라는 것입니다.
그 우리의 악의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노아 이후의 시대의 어떤 인물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신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태어나면서 선으로 해 주시겠다는 것, 이것은 신께서는 노아 시대에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한 것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입니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인류는 한 번 노아 때 멸망할 뻔했지만 노아 덕분에 잃을뻔한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너희의 마음가짐이 바뀌지 않기에 이제 됐다 라고 포기하셨습니다. 그렇게 성서에 쓰여 있습니다. 낮도 밤도 아직 계속된다, 아직 힘든 시대는 계속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에덴동산 때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신께서는, 앞으로 너희들은 고생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노아 부분은, 앞으로 괴로운 시대는 계속되어 간다라고, 그렇게 신께서는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 육고기를 먹어도 된다, 허락한다 가 된 것은, 우리가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의 시대가 되었을 때, 예수의 십자가와 그 뒤에 내린 오순절 성령에 의해 신께서는 우리의 이 악의 마음을 선의 마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신께서 낡은 마음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신으로부터 버림받을만한 악한 생각밖에 가지고 있지 않는 마음이었는데, 신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겠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와 그리고 성령. 성령에 의해 새로운 마음을 주겠다 라고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의 상황으로 되돌려 주겠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는「노아 부분에서 신께서 인류에게 육식을 허가하고 계시니까 그럼 육식을 해도 되지 않은가?」로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노아 때 신께서는 노아가 바친 동물의 제물을 받으셨지만, 예수 때 신께서는 나는 제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시기 때문에, 신께서는 예수가 최후의 제물이다, 나는 예수를 받고 싶다라는 그 의사를 명확히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께서는, 인간의 악의 마음과 그것에 부수되는 육식이라는 것에 대해서 예수 때에 종지부를 찍어주시고, 그리고 채식, 비건 식을 허가했던 에덴동산인 시작의 천국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2025년 2월 3일 입춘제 마사아끼사마 성언「「새롭게 태어난다」의 진실」참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노아 부분입니다만「무지개의 계약」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창세기」제9장 10절~ 16절). 신께서는 더 이상 홍수로 살아있는 존재를 멸하지 않겠다, 그 계약으로서 무지개를 띄운다고 쓰여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동일본 대지진에서도 1만 5, 6천 명이 사망했고, 작년 브라질에서도 리오그란데두술(Rio Grande do Sul)이라는 곳에 큰 홍수가 있었는데 사망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하지만 우리로서는「이상하지 않은가?」「홍수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고 있지 않은가?」「신께서 무지개 계약을 하시며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는 멸하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홍수로 많은 사람이 죽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은 신께서 더 이상 인류를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의미는, 너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니면 모순이지 않습니까? 멸하지 않겠다 라고 하셨는데, 노아의 홍수 후에 인류의 걸음에 홍수나 해일 등의 물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고 있으니, 이것은 신께서 무지개 계약을 해 주셨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되어 버리지요.
이전에 동일본 대지진에 관한 뉴스에서 본 적이 있어 그저께 다시 찾아 봤는데, 그것은 2020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딱 지진 발생 시각에 유족들이 모여 위령제를 하고 있을 때, 딱 그 시간입니다.
유족들 앞에 무지개가 떴다는 뉴스, 이 뉴스를 기억하고 있어서 찾아보니, 이것은 2020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날은 동일본을 중심으로 다른 여러 곳에서도 무지개가 뜬 것 같습니다만.
신께서 유족들에게 이와 같이 무지개를 보여 주셨다는 것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너희의 가족은 죽지 않았다, 너희는, 나는 유족이다 유족이다, 우리는 남겨져 버렸다,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라고 하겠지만(물론 그것은 큰일입니다, 그것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딱 3월 11일, 게다가 딱 지진발생 시각에, 게다가 마침 유족이 모여 있는 눈 앞에 무지개가 떴다는 것은, 신께서는 우리가 무지개를 보고, 단지「앞으로 밝은 미래가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무지개 계약을 떠올려라, 나는 이 계약을 너희가 떠올려 주길 바란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이 무지개 계약이라는 것은, 노아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살아있는 존재와 세운 계약입니다, 동물도 포함해서. 그렇다면 2020년 3월 11일의 무지개는, 유족을 향해, 또 뉴스를 통해서 이 일을 알게 된 우리에게, 해일로 죽었다고 하는 1만 5,6천명의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 라는, 그런 신의 강렬한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와, 무지개가 떴다」라고 기뻐할 일이긴 하지만 동시에「무지개를 보지 않으면 내 마음을 기억할 수 없는가?」라는 신으로부터의 경고인 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지개를 봤을 때 그저 기뻐할 것이 아니라,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은 살아 있다는, 그것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원래 노아의 홍수로 죽었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신께서 사랑하셔서 낳은 자식은 모두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기 위해 신께서 양육하고 계시기 때문에, 멸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죽었다든가 동일본 대지진의 위령제라든가 그럴 때, 그런 분들에게 편히 쉬세요 라든가 편히 잠드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쳐야 할 마음은「당신들은 살아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유대인과 전혀 관계없는 일본인에게, 게다가 쓰나미로 사망한 유족들이 모여 있는 곳에,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적어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무지개의 의미를. 일본에서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이 무지개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의 입장에서는 무지개를 띄움으로써「아무도 멸하지 않았다」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시는데, 잡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앞으로 무지개를 봤을 때, 전 세계 사람들이「와, 예쁘다」「아름답다」라고 하는 중에 기뻐함과 동시에「모든 존재는 신과의 무지개 계약으로 살려지고 있네요. 우리는 애초에 멸해질 존재였는데 노아의 중재의 기도와 예수님의 피에 의해 이미 영원한 생명을 받고 있네요. 신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깨닫기를 바라시네요」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엄청납니다. 왜냐하면 무지개 계약이라는 것은 우리와 신 사이의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멸하지 않겠다,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는 계약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면「새롭게 태어난다」라는 테마가 들어옵니다.
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입춘제 때에, 말하자면 교회 안에 목사님이 있고, 이 세상에서 여성이라면 그 교회에 남성의 반쪽이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남성이라면 그 천국이라는 교회에 여성의 반쪽이 기다리고 있다고(「새롭게 태어난다」의 진실」2025년 2월 3일), 그런 비유를 써서 이야기했습니다만, 하지만 여러분 중에는 이 이야기가 어렵다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아니, 이해하기 쉽다고 느낀 분도 계시겠지만, 어렵다고 느끼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왜 어렵다고 느낄까? 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남녀가 하나가 되어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인데, 그런 언뜻 보기에 단순한 이야기를 어렵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가「가르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뭐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일동웃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냐면, 사랑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러브스토리. 사랑이야기.
하지만 세계메시아교라고 하면「가르침(敎)」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요. 종교. 가르침. 그래서「가르침」이라고 하면, 이래 이래서 이런 것이다 라는 막대기 같은 우리의 고정관념이 들어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유같은 건 없습니다. 「왜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을 선택했어?」라고 추궁당해도,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은 좀처럼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뭐 설명을 들으면 상처받을지도 모르겠지만(일동웃음).
나는 왜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 라는 것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 그것은,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과 사랑의 마음이 서로 통한다는 것은 말을 넘어선 연결이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연결이.
이렇듯「새롭게 태어난다」라는 것은 사랑 이야기인데, 그것을 가르침(이타애의 가르침이나 조레이에 대한 가르침, 조령님에 대한 가르침, 일일일선 등) 그런 것으로 파악하려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어렵다, 모른다 라고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사랑이시니까요. 자식에 대한 신의 사랑. 그래서 가르침이 아니라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신으로서는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데, 그것을「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가르침일까요?」「어떻게 실천하면 될까요?」「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당신의 사랑에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까요?」라고 하게 되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이치를 초월하는 것이며, 사랑 그 자체가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달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안쪽에 존재하는 교회에는 우리의 사랑하는 반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성이라면 남성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신과는 다릅니다. 신 그 자체가 아닙니다. 남녀가 하나가 되어 신 앞에 나와 아이가 태어난다는, 결혼식에서도 그렇지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신입니다.
이런 말 듣는 순간, 또 어렵다고 생각하지요(일동웃음).
하지만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큽니다. 이 세상에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슬픕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반쪽이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안쪽에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 반쪽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장 사랑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해 주고 있는 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 표현하자면,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 결혼한다고 하는 그런 형태가 될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완성된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우리를 사랑해 주는 이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도 상상이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설렘이 있습니다. 설렘이.
이 세상에서의 연애에도 설렘이 있지요. 그러니까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습니다. 몇 살이 되어도 이 설렘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여러 러브스토리 영화에서 해피엔딩인 것이 있지요. 그래서 그런 것을 보고「앗」하고 뭔가 느끼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헤어져 버리고 끝인 슬픈 엔딩의 영화보다 좋습니다. 뭐 그런 영화는 적지만, 조금 예술적인 영화라면 가끔 있습니다. 뭔가 깊은 메시지라고 할까요,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그런 종류의 것도 확실히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왕도(王道)의 러브스토리 영화입니다. 그런 것을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이야기. 그것을 보면 더 외로워진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일동웃음), 그것은 제쳐두고 그런 영화를 그냥 이 세상의 이야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는 이런 해피엔딩의 러브스토리를 나를 위해서도 준비해 주셨다 라는 것을 기억해 내기 위해서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고의 러브스토리가 뭐냐고, 그것은 메-슈사마입니다. 메-슈사마의 존재. 메-슈사마가 나타내려 하셨던 것.
이것을 우리는「가르침」이나「사적」이라 부릅니다만, 말이 뭔가 어렵지요. 본래 이것은 러브스토리입니다. 메-슈사마께서 남기신 것은 최고의 러브스토리.
왜냐하면 메-슈사마께서는 최종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셨지요. 남성과 여성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생명은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메-슈사마께서 새롭게 태어나신 것을 선언하셨다는 것은, 메-슈사마께서는 러브스토리를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메-슈사마께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셨냐면, 사랑 이야기를 당신의 성언이나 사적으로 나타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세계메시아교」라는 말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새롭게 법인등록을 하려 하는 중에 있습니다만(일동웃음). 하지만, 이 교단명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이해하는 걸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요인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세계메시아교에서「가르침」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메-슈사마께서 전하고 싶으셨던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것은 실은 사랑의 사업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그다지 생각 안하지 않나요?
오히려 실천한다,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한다, 폐를 끼치지 않는다, 죄, 용서, 회개, 그런 말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 얽매여 있기 때문에.
또 하나의 멋진 러브스토리는 예수님의 러브스토리입니다. 신에 대한 사랑을 관철하셨습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신을 끝까지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애타는 사랑을 하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메-슈사마께서 나타내고 계신 것은, 인류 누구나 새롭게 태어나 신의 자식이 될 수 있다, 러브스토리에는 해피엔딩이 있다 라는 것.
그래서 메시아성당이라 해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진짜 러브스토리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그다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메시아성당이 러브스토리의 상징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메시아성당은 러브스토리의 상징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러브스토리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그다지 그렇게 파악하지 않지요.
하지만 우리의 바람은, 메시아 성당을 건설하고 진정한 러브스토리를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메시아 성당이라는 것에 관해, 어느 신도분의 입춘제 감상문을 읽고, 아 그렇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 있는데, 저는 입춘제에서 우리는 지난 3대 쿄-슈사마 때의 교단 정화로부터 40년이 지나서야 간신히(실제로는 40년 이상이지만)화해하고, 이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것입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신도 분께서 쓰신 것은, 이 40년이라는 것이 성서에서 유대인이 광야를 40년간 떠돌아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과 일치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는 감상이었습니다만, 과연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이 이집트 쪽으로 갔고, 그 후 이집트에서 차츰 노예처럼 되어가던 차에, 모세가 와서 이집트에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있는 곳까지 데리고 돌아오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모세의 십계명도 그때의 일입니다. 유대인이 도망치려는데 이집트인이 쫓아오고, 눈 앞이 바다(홍해이지요)여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바다 사이가 열려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점점 이스라엘쪽을 향해 나아가는 중에, 신께서 유대인에게 너희들에게 멋진 장소를 준비했다 라고 말씀하셔서 그 장소를 보러 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장소를 보러 간 사람들이, 여기는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과 싸우면 우리는 지고 만다, 그래서 이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 라고 하게 됩니다.
그러자 유대인 전체가 이제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라고 합니다.
이에 신께서 노하셔서, 지금 살아 있는 유대인의 성인 세대가 모두 죽을 때까지 이 약속의 땅에 너희들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너희들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뭐, 벌을 받은 셈이지요.
그 후 40년이 지나서야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데, 결국 모세는 그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신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그 약속의 땅을 볼 수는 있지만 들어갈 수는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유대인들은 모세의 다음 지도자 여호수아의 때에 지금의 이스라엘에 겨우 다다른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이 신도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교단 정화의 처음시작부터 40년 동안, 뭐 결국은 쿄-슈사마라는 존재이지요, 그 존재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차이가 있어서 40년간 방황하고 떠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40년이 지난 후인 얼마 전 2월 3일 입춘의 날에, 메시아 성당 건설예정지의 장소를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바로 니시노미야(西宮)라는 장소. 메-슈사마께서는 예루살렘을 서쪽의 도시라고 부르시는데,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40년 동안 고통받고 최종적으로 지금의 이스라엘에 도달한 것처럼, 우리도 40년간 고통받고 니시노미야(⻄宮), 즉 이스라엘에 있는 서쪽의 도시인 예루살렘에 도달하는 허락을 간신히 받았다는,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또 놀란 신도분의 감상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성지가 될 니시노미야(西宮)시의 시의 마크는 다윗의 문장(紋章)을 기본으로 한 디자인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문장은 이스라엘 국가의 국기에 있는 마크입니다.
아타미시의 마크는 뭔가 온천모양 같은 것이지요(일동웃음). 그러니까 각각의 시의 마크는 다릅니다. 하지만 우연히(우연일지 우연이 아닐지) 니시노미야시의 시의 마크가 이 다윗의 문장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12월 24일이라는 날짜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성지 예정지가 니시노미야가 된 것이나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역시 신께서 우리를 하나의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신, 신과 메-슈사마가 영의 세계에서 쿄-슈사마를 통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에게 있어서의 진정한 희망의 장소, 그것을 어떻게든 우리 손으로 짓고 싶지 않으신가요?
왜냐하면, 오늘 성서에서도 분명히 하고 있듯이,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 가장 나쁜 일인데, 그 죽음이 더 이상 없으니까요. 노아 때에, 이제 두 번 다시 너희들을 멸하지 않겠다고 신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는 것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확실히 나쁜 일처럼 보이는 것은 많이 있지만, 그러나 신께서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 하냐면「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메-슈사마의 정화의 성언도 그런 것이며, 예수님께서 전하시려 했던 메시지도 그렇습니다. 노아 때의 신의 메시지도 간단히 말하면, 인류 너희들에게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대단한 희망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것을 호소하는 사람들 없지 않습니까? 진정한 러브 스토리가 있다,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호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뉴스 같은 것을 보면, 세상이 이렇게 돼 버렸다 저렇게 돼 버렸다, 전쟁이 어떻다, 이 대통령이 어떻다, 이 이웃이 어떻다, 학교에서 이렇다, 유치원에서 이렇다, 내 가족이 이렇다, 그런 것들 뿐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오늘 이야기한 진정한 러브스토리를 가지게 된 것이며, 게다가 우리는 그 상징이 되는 메시아 성당을 건설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 성당을 작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구해 마지않는 것의 상징이 되는 것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고, 유대인도, 유대교 신도도, 그리스도교 신도도, 모든 사람이 진정한 구원에 참여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이 러브스토리를 전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12월 24일부터 다시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지금까지 뭔가 희미하게 보였지만 분명하지 않았던 메-슈사마 마음의 전체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너무 어렵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만들고 있는 여러 노래나 가사, 대단히 간단하지요. 하지만 간단한 가사 같지만 그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슈사마의 메시지가.
그러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메-슈사마의 러브스토리를 이어받아 이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확대시키고, 그리고 희망과 기쁨과 사랑을 가지고 함께 걸어갑시다. 감사합니다.
이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