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가의 가보」마사아키사마 성언 2025년 6월 15일 메시아 강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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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3회 작성일 25-09-03 19:04본문
「메시아 강탄제」마사아키사마 성언
2025년6월15일
「오카다 가의 가보」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에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어서 아침에 학교나 유치원에 차로 데려다 주곤 하는데, 딱 그때 쓰레기 수거차를 봅니다. 쓰레기 수거를 위해 아침에 쓰레기 수거차가 도는 시간과 딱 맞아서, 그 차 뒤에 붙거나 지나치거나 엇갈리거나 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쓰레기 수거차나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에 대해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최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이 이야기를 머릿속 한켠에 두고, 이 후의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달 월례제에서 저는 신도 여러분께 질문을 했지요. 그것은 만약 자신이 전능하신 신이라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지전능이 아니라 전능하신 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 왜 전지를 뺐느냐 하면, 만약 전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 결국 신과 같아지기 때문에, 그래서 만약 전능하신 신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것을 여러분께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신도 여러분의 감상문을 읽어보니 꽤 많았던 것이, 그 질문을 들었을 때 처음에 생각한 것은 세계평화였다 라든가, 세상이 평화로워지기를 바란다든가, 만약 내가 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전쟁을 멈추고 세계평화를 이루겠다는 그런 내용을 적으신 분들이 꽤 계셨고, 하지만 물론 감상문으로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날 제 이야기를 듣고 사실은 이런 것이구나, 라는 등의 감상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능한 힘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순간적으로 세계평화라고 생각하는 분이 꽤 계셨다는 사실을 보고, 제가 생각한 것은,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이란 등)이 설마 자신이 그 전쟁의 주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라는 것.
그것은, 만약 자신이 지금 전쟁의 주원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그런 식으로 자신은 객관자처럼 되어 세계평화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날의 마음이 설마 전쟁이나 살인 등 여러 사건의 직접적인 주원인이 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상관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있다, 나는 착실하고 전쟁같은 건 말도 안 된다는 시각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을 보면, 무슨 일인가 좀 있으면 저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푸념하거나, 자기 가족, 이웃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점원이 뭐라고 말하거나 하면, 바로「뭐야 이 사람」이라고 하게 되지요.
그것을 여러 형태로 표현하느냐 안 하느냐는 별개입니다. 잘 표현하지 않거나 마음 속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가까운 사람에게 조금 말하는 정도이지요. 하지만 그런 감정을 우리는 항상 안고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해주겠다든가, 이것을 말해주겠다든가, 타협하여 해결해 준다든가, 그런 것만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는게 아니라, 예외 없이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는 단지 권력과 돈이 없기 때문에 실행할 수 없을 뿐이며, 만약 절대적인 권력과 돈이 있다면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좋아 그럼 저 나라를 침략하자, 저 사람을 이제 없애자 라든가, 그런 일을 분명 합니다, 우리는요.
그러니까 규모가 다를 뿐인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일상을 보내고, 만약 그것이 커지면 형태로서는 개인적인 규모로 말하면 살인이며, 보다 규모가 커지면 전쟁입니다.
그럼 메-슈사마께서는 그런 전쟁이나 살인이 일어나고 있는 세상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오늘 메-슈사마 찬가의 첫 번째「온-세상에 불길한-일들이 많다는 것은 신을잊어버-린 죄로인한것이리」
세상에서 여러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언뜻 보면 인간끼리 싸우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신을 잊은 죄, 인류가 신을 잊은 죄라고 메-슈사마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잊어버렸다」라는 것입니다. 신을 잊어버렸습니다.
두 번째는「대신님 전에 머리숙여엎드린 나-이로다 신께등을돌-린 큰죄회개하면서」
신을 잊었다는 첫 번째. 이 두 번째는 신께 등을 돌렸다. 이것은 비슷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신을 잊었다는 건 편합니다. 그것은 그것을 지적당해도, 그러네요, 잊고 있었습니다,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깜빡 잊었습니다, 로 끝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슈사마께서는「신께 등을 돌린 큰 죄 회개하면서」입니다. 등을 들렸다는 것은「잊지 않았다」이지요. 잊기는커녕 오히려 기억하고 있었다, 신이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반항하고 거역했다, 이것이 신께 등 돌렸다는 것. 그래서 이 두 표현에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상사로부터 무슨 말을 듣고, 아 상사의 지시를 잊고 있었습니다 라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는 상사에게 무슨 말을 들으면 그것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상사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반항한다, 상사를 인식하고 있지만 상사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주체성으로 반항한다 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첫 번째 신을 잊은 죄조차도 이 세상이 힘들어지는데, 메-슈사마께서 자신은 더 심한 존재였다고 인정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메-슈사마라는 존재를 생각했을 때, 메-슈사마께서 신께 바로 향하고 계신 모습을 이미지했다고 해서, 메-슈사마께서 신께 대해 저는 당신께 등 돌린 존재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것으로 신께 바로 향하고 계셨다고는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왠지, 메-슈사마께서는 대단하다, 메-슈사마께서는 신과 한몸이다 정도의 것밖에 생각해 오지 않았으며,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 두 번째, 메-슈사마께서는 첫 번째보다 훨씬 무거운 죄를 자백하십니다. 고백하십니다.
그런 메-슈사마이시기에, 세 번째「죄-많-은 제몸과제집안을 용서하소서 대-자-대비의 크신그마음으로」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 많은 제 몸입니다. 이것, 메-슈사마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메-슈사마께서 제 몸과 제 조상은 죄가 많다, 그래서 신의 절대적인 관대함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라는 찬가입니다. 메-슈사마께서는 신께 용서를 빌고 또 빌고 계십니다.
오늘 배독한 성서(「로마서」제3장 9절~31절)에도「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라고 있지요. 신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그리고「선을 행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입니다. 신의 눈으로 보면 선을 행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신께서 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신을 찾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신을 찾지 않습니다, 전 인류 예외 없이. 타인에게 뭔가 자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뭔가 나은 부분이 있는가, 절대 없다고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입을 사용한다 해도 남을 욕하거나 불쾌한 말밖에 하지 않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말밖에 하지 않습니다. 또 발은 피를 흘리는데 빠르다는 것처럼, 금방 누군가를 죽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께 받은 영광의 몸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것.
또 평화의 길도 모른다, 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성서에 적혀 있습니다만, 본래 평화의 길을 모르면서 세계평화를 바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그리는 세계평화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래 인간으로서는 평화의 길을 모릅니다.
이렇듯, 의인은 한 사람도 없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라고 들어버린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했냐면, 행위에 의한 의(義)를 구한 것입니다. 행위에 의한 의(義).
요점은, 옛날로 말하자면 조레이, 참배, 봉사, 이타애입니다. 이것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하고 있습니다, 신혼닦이 하고 있습니다, 매일 조레이하고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참배하고 있습니다, 헌금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며,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 같은 마음이 바로 되었습니다.
게다가 내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저 사람은 매일 조레이를 해서 대단하다든가, 저 사람은 매일 참배하니 대단하다든가 하며, 행위에 의한 의(義)의 세계 한가운데였습니다. 요점은 그런 활동을 통해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으로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행위에 의해서는 신 앞에서는 의로는 여겨지지 않는다(「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로마서」제3장 20절)라는 것.
의(義)라는 것은 신으로부터「좋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지요. 우리는 신 앞에 갔을 때 신으로부터「좋다」라는 말을 듣는 것을 행위에 의한 의(義)로 하려 했던 것입니다.
나는 나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일일일선(一日一善),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사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저 아이는 바르게 인사를 하니 훌륭하다 라는, 바로 그런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 행위에 의한 의(義)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행위로는 신 앞에서는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신의 의(義)라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에 의한 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애초에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신의 용서를 받지 않으면 신 앞에서「좋다」라는 말을 들을 일은 없다, 너희는 행위를 한 것으로 무엇을 자랑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은 평등하지 않은가,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았는가 하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슈사마조차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하시기 때문에.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율법은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인가? 심판하지 마라, 좋은 일 해라, 인사해라, 남에게 친절해라 - 그런 규칙이나 율법은 이제 소용없는 것인가, 무효한 것인가 하고 그렇게 바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느냐?」「로마서」제3장 31절).
그러나 바울은, 아니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수의 피를 받아들임으로써 율법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제3장 31절).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율법을 굳게 세운다. 무슨 의미일까요? 어차피 죄인이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지 않느냐가 됩니다만, 바울은 오히려 우리는 율법을 굳게 세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그것은「율법을 주셨지만「하지 못했습니다.」라는 것이 확정되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할 수 없었습니다.」라는 것이 확정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율법에 의해서는 죄의 자각이 생길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율법을, 자신의 마음이나 도덕을 조금이라도 향상시키기 위해 사용한다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율법으로는 죄의 자각이 생길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그렇습니다. 「나는 할 수 없었습니다」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심판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심판하지 않습니까? 이 안에서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인류 중에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저는 사람을 심판한 적이 절대 없다고 신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신의 의가 되기 위해 신 앞에「저는 어쩔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드러낼 것인가 말 것인가 입니다. 저는 세계평화를 기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 입은 불쾌한 말밖에 하지 않으며, 제 발도 피를 흘리는 데만 사용하는 저였습니다, 제 마음은 이제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신을 구하지 않는 저입니다 라고, 그런 자신을 신 앞에 바칠지 말지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께서는.
거기서 메-슈사마 찬가 네 번째.「부평초처럼 정착하지못하는 나의마음을 가엾이여기시어 구원하시는주여」.
이것도 메-슈사마 찬가이지요. 신도 잘 모르는 부평초처럼 방황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신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구원해 주셨다는 찬가입니다.
신이라고 할까요,「주(主)」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슈사마입니다. 메-슈사마께서 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슈사마 자신을 신 앞에 바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여기, 메-슈사마께서는 행위로 인한 의로 인해 당신께서는 구원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부평초처럼 휘청거리고 안정되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주께서 가엾이 여겨주시고 구원해 주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는 것은 메-슈사마께서 주(主)로서 우러르는「당신」이 있다는 것. 그런데 이「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틀림없이. 인류의 죄를 속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틀림없이.
메-슈사마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으셨습니다. 받으셨다고 할까요, 메-슈사마의 이 네 번째 찬가에 쓰여진 것은, 신께서 일방적으로 구원해 주셨다는 그런 느낌입니다, 오히려.
메-슈사마 당신께서「받겠습니다」라는 의사표시를 하셨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조차도 불가능했지만, 신께서 그런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일방적으로 구원해 주셨다고 그렇게 메-슈사마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은총입니다. 은총. 「어메이징 그레이스」의「그레이스」. 은총.
「그레이스」라는 말의 의미는, 사실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인데, 신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어메이징 그레이스」이지요. 그래서 이 네 번째 찬가는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은총에 대해 노래한 찬가입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일방적으로 메-슈사마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메-슈사마라는 존재는 이미 신 앞에서는 의로 여겨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슈사마께서는 행위에 따른 의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너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였구나」라고 신께서 말씀하시고「그럼 구원해 주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신 앞에 의로 여겨질까,「좋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는 여러 가지이지요. 그것은 이 세상은 행위에 의한 의를 매우 강조한 형태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신으로부터「좋다」라고 좀처럼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서 아직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메-슈사마께서는 당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신께 명확히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시고, 그리고 이미 죄를 용서받은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그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로 자신을 객관자의 입장에 두고, 세상이 좋아졌으면 좋겠다, 세계평화가 왔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저런 일을 한다 라고 하게 됩니다.
확실히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이지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것을 넘어「저의 죄는 이미 용서되었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할까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정한 뒤에「이미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해야만 합니다.
삶의 모습을 주체로 하고 있으면, 일생 어중간한 채로 됩니다. 나는 좋은 점도 있고 죄인적인 부분도 있구나 하는 느낌으로 계속 가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했을 때「세상이 평화로워지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세계평화는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입니다. 「세계는 이미 평화로워졌습니다」, 이것입니다.
자주「세계 인류가 평화로워지길」같은 현수막을 거리에 붙이거나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우리는「세계평화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록 나의 삶의 모습이 여러 가지일지라도「나의 죄는 용서되었습니다」라고 신께 선언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언젠가 내 죄를 제거해 받을 수 있을까 의 세계에서 살아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계평화는 오지 않는 것인가, 평화 활동을 해야만 하는구나 라는 것만의 세계.
하지만 메-슈사마의 발상은「감사가 감사를 낳고 불평이 불평을 부른다는 것은 실로 진리이다」이것입니다. 감사가 감사를 낳는 것입니다. 메-슈사마 성언「인간은 상념나름」(1949년 9월 3일).
그리고 메-슈사마께서는「기뻐하면 기쁜 일이 온다」 이것입니다. 「기뻐하면 기쁜일이 온다」 기쁜 일이 오면 기뻐해라 가 아닙니다. 세계평화가 실제로 오고, 와 세계평화가 왔다, 그러니까 기쁘다 가 아닙니다. 기뻐하면 이기 때문에, 세계평화가 이루어지기 전 단계에서 「세계평화는 이루어졌습니다」라고 기뻐하면, 실제로 세계평화라는 진정한 기쁜 일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과 씨를 뿌리면 사과 열매가 생깁니다. 당근 씨를 뿌리면 당근 열매가 생깁니다. 감사의 씨앗을 뿌리면 감사의 열매가 됩니다. 세계 평화는 이루어졌습니다 라는 기쁨의 씨앗을 뿌리면 세계평화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과 씨는 먹으면 맛있지 않습니다. 씨는 맛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지 않습니까? 「기뻐하면 기쁜 일이 온다」라고 할 때, 우선 기뻐하고 있을 때는 아직 기쁜 일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맛보지 않은 것입니다. 맛있다는 맛은 맛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메-슈사마께서는「먼저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가 평화로워지기를 바라는 기도로는 평생 세계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세계평화는 이미 왔습니다」의 씨앗을 뿌리지 않는 한, 평생 세계평화의 열매로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 입장에서는, 너는 인정하지 않는구나, 내가 절대적인 힘으로 완벽한 세계를 이미 2천년 전에 확립했다는 것을 너는 인정하지 않는구나 라고 하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기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신을 잊은 모습이지 않습니까? 세계평화가 오길 바라는 것은 신께서 주무시고 계시다는 관점입니다.
신이시여 일어나주십시오, 일어나 개입하셔서 이 세상을 멋진 세상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라는 관점. 이 자세는 신을 잊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자세라면, 계속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에 불길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신 입장에서는 너는 나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구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세계평화의 씨앗을 뿌린다고 해서 세계평화 실현을 위해 일일일선, 이타애, 이웃과 평화로운 상황을 만들어 가자 등, 그것이 세계평화의 씨앗을 뿌리게 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다시 행위의 의의 세계로 돌아가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하는 것은 행위에 의한 의가 아니라 신앙에 의한 의이기 때문에,「믿는다」는 것,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그러니까 세계평화의 씨앗을 뿌린다는 게 어떤 것이냐면「신께서는 세계평화를 이미 이루셨네요. 그것을 믿습니다」라는 씨앗입니다. 세계평화는 실현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뻐하면 기쁜 일이 옵니다. 기뻐하면, 입니다.
사실 신께서는 오래 전 천상 때 완벽한 것을 준비하셨고, 이미 우리죄를 용서하시는 것도 결정하셨습니다. 신께서는 제일 처음부터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자식이기 때문에.
그리고 세계평화라는 말에도 있듯이, 멋진 이상세계를 이 지상에 만드는 것도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의 신업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전부 완결됐습니다. 오래 전에 신께서 천상에서 정하신 일은, 이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와 오순절 성령이 내리신 것으로, 벌써 승부가 났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야주전환입니다. 야주전환. 메-슈사마께서는 2천년의 시간을 거쳐 그것을 감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세상은「기뻐하면 기쁜 일이 오는 세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법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기뻐하지 않으면 기쁨의 인생은 평생 오지 않습니다. 이미 이루셨습니다. 기뻐하면 그 법칙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기뻐할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상당히 어렵지요. 그것은 우리는 경과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 사람 뭐라는 거야, 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착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세상에 전쟁이 있으니 외교 노력하자든가, 저 사람들은 세계평화를 위해 활동하니 대단하다든가,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다른 신의 상식이 있습니다. 신의 상식이.
저는「사랑의 날개」가사에서「몇 번이고 넘어지더라도 몇 번이라도 일어서리라」라고 썼습니다. 또한 다른 것에서도 저는, 쓰러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오히려 일어설 수 없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 쓰러져 주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쓰러져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까「몇 번이고 넘어지더라고 몇 번이고 일어서시라」라는 것은, 확실히 뭔가, 그런 말로 자신을 고무해서 인생의 여러 역경에 맞서 나가자는 그런 취지도 있습니다. 그런 표면적인 의미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가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넘어져 주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일어서 주신 분이 계신다, 그 분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냐 하면 당연히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왜냐하면 예수님은 쓰러지시고, 죽고, 결국 그대로 맨 아래의 죽음의 세계까지 가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위해 쓰러져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갈 때도, 문자 그대로 쓰러져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하나하나의 예수의 사적은 신비롭지요. 신비롭지만 예수께서는 쓰러지셔서 황천 세계인 가장 아래 세계까지 가주셨습니다. 하지만 쓰러지신 것만으로 끝이 아니라 일어서시지 않았습니까? 죽은 지 3일째에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는.
이렇게 우리를 위해 쓰러지시고 일어나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지요. 쓰러지고, 어떻게든 열심히 해야한다 하고 자신을 분발시켜 일어서고 하듯이, 하루하루가 전쟁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울 때도 많이 있지요.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을까 할 정도의 때도 있고, 결과적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자살해 버리는 분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자신만의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싸우고 싸우고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완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실은.
인생에 있어서 고난을 만납니다. 넘어지거나 일어서야만 한다 라고 생각하거나, 어쨌든 여러 일이 닥칩니다. 그럴 때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신께서 우리가 무엇을 깨닫길 바라시냐면「너를 위해 쓰러지신 분을 떠올려라」라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쓰러졌다, 고생하고 있다, 일어설 수 없다, 그때 신께서는 너를 위해 쓰러지신 분이 있지 않은가, 그분을 기억해 내길 바란다 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여러 고생을 했지만 역경을 이겨내고 일어섰습니다 와 같이 되면, 보통 이것이 인생의 후반부가 되면 점점 그 삶을 자랑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이런 사업을 해서 성공한 것은, 그때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며, 이것은 세상에서는 이미 보통의 사고방식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도, 우리가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위해서 일어서 주신 분이 계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 인생의 모든 활동은, 비록 그것이 어떤 활동이었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로 집약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서.
예수 한 분께 집약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든, 우리를 위해 쓰러지시고 그리고 일어나주신 분을 받아들일 것인가 어떤가를 항상 질문받고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의 모든 것, 매일의 활동 모든 것, 종교적 맥락과 관계가 있든 없든, 모든 일어나는 일이 그 한 점에 집약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 메-슈사마 찬가의 여섯 번째, 메-슈사마는「맑히다」라는 똑같은 말을 두 번 사용하고 계십니다. 「고귀하도다 마음을-맑혀서 추한세상을 맑혀가는신업의 일꾼으로되리라」
자신의 마음을 맑히고, 거기에서 더 이 추한 세상을 맑히는 신업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첫째, 둘째 구절만 잘 알고 있지요. 마음을 맑혀야만 한다, 마음을 맑혀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행해야 한다, 일일일선(一日一善), 남에게 좋은 일을 했다, 좀처럼 하지 못했다, 열심히 하자 - 계속 이것을 해왔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맑히는 일에만 의식이 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 자신, 자신입니다. 자신, 자신, 자신.
하지만 메-슈사마께서는 이미 그것은 끝내시고 다음 단계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마음은 맑게하고 그리고 그 위에, 추악한 세상을 맑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원하고 있나요? 우리는 계속 첫째, 둘째 구절만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맑아지고 싶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지은 사람을 보고, 저 사람 저런 짓을 해버렸구나,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며 살아가자고 하며 선악의 우열의 세계를 자신 안에 만들고, 그리고 자신은 저 사람보다는 조금은 낫다고 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슈사마께서 말씀하신 것은, 너희는 이미 맑혀 주었으니, 추악한 세상을 맑게하는 일에 쓰임받으라는 것입니다. 맑혀가는 이라는 것은 청소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슈사마께서는 씻어 맑히는 때가 왔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인간세상의 티끌도-먼지도 남김없-이 씻어서-맑히는 때가온-것이리」씻어서 맑혀라 입니다. 티끌과 먼지는 쓰레기라는 뜻인데, 그것들을 남김없이 씻어 맑혀라, 티끌과 먼지 같은 것을 남김없이 씻어 맑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청소해라」입니다. 메-슈사마께서는 너희들은 이 세상을 청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만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명은 남김 없이 청소하는 것. 남김없이 이기 때문에, 그 근처를 잠깐 가볍게 닦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겉면을 청소기로 잠깐 돌리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남김없이 깨끗한 상황은 되지 않습니다.
남김없이 맑혀라, 청소하라는 것은, 마지막 남은 것은 오랫동안 손대지 않은, 끈적끈적해서 어떤 세제를 사용해도 빠지지 않는, 그런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여러 곳에 보내지는 것입니다. 엄청난 질투심 등입니다. 신께서는「너희는 그런, 아무도 청소하고 싶지 않은 곳에 가서 청소해라」라고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아무도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데려가 주시고, 그래서 우리는 여러 마음이 듭니다.
우월감이라든가 열등감, 분노, 불안, 초조하다든가 그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남아있는 것은 정말로 가장 더러운 쓰레기입니다. 가장 더러운 쓰레기가 남아 있는 곳을 메시아교 사람들은 청소하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을 자신 마음의 문제라고 한다면 추악한 세상을 맑히는 쪽으로는 전혀 안 되지 않습니까? 청소해야 하는데, 계속 이것은 내 마음의 문제이다, 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로 끝나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길은 포기하고, 오히려 그런 자신을 신 앞에 완전히 내보이면, 그렇다면 너를 이 추악한 세상을 청소하는 역할에 써 주겠다 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보면 바로 알지 않습니까? 장밋빛 마음이 아닌 것은 금방 압니다. 아니, 확실히 장밋빛이 되는 것을 바랍니다. 장밋빛이 되는 것은 바라고 있습니다만, 역시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두에 말씀드린 쓰레기 수거차, 청소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없으면 거리는 쓰레기로 넘칩니다. 실제로 그러지 못해서 거리가 쓰레기투성이인 장소도 세상에는 있습니다.
이렇듯, 만약 우리가 자신의 마음만 보거나, 이런 생각을 하기 싫어서 청소의 신업에는 쓰임받고 싶지 않다면, 그 남은 쓰레기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당연히 영주체종의 법칙대로 지상에 나타나고, 그래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상은 계속 이어져 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 수거차, 더러워지는 일이지요. 근처를 지나가면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인류가 내는 쓰레기 냄새로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이 없으면 힘듭니다. 거리가 냄새가 나서.
그러니까 그런 일을 하시는 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일단 당연히 감사는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쓰레기가 넘치는 거리에서 생활하는 일이 없도록 쓰레기 수거하는 분들이 이런 일을 자초해서 해 주시고 매일, 매일, 매일, 매일 쓰레기수거와 청소를 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것에의 감사는 있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의 청소의 사명을 떠올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나는 저런 일을 안해서 다행이다 라든가 하며 바로 자신을 남의 위에 올려놓으려고 하고, 또 더러운 일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 비겁하지 않나요? 일부 사람에게 그런 더러운 일을 시키고, 게다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비겁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자랑할 수 있는 부분이 뭔가 있나요? 쓰레기 수거 일을 현실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랑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자신을 우월한 곳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쓰레기 수거를 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은 사실은「아 신께서는 나에게 쓰레기 수거라는, 이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청소의 신업을 바라고 계시는구나」라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고,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쓰레기를 수거하는 차와 스쳐 지나가는 것을 통해서.
그렇듯 청소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병이라는 형태도 있을 수 있습니다. 병. 오늘 메-슈사마 찬가 7번째「병이라는건 신혼을—맑히는 것이되기에 더없는-신—의 은혜인것이로다」
병에 걸리면 우리가 보통 받아들이는 방법은, 낫고 싶다, 병에 걸리고 싶지 않다 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병이라는 것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청소의 신업입니다.
병이라고 하는 것은, 신께서 우리의 몸을 통해서 맑힘의 신업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병이든입니다.
메-슈사마께서는 어떤 병이든 신의 맑힘의 신업이라는 신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으셨기 때문에, 그래서 의학에 의존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신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슈사마께서는 병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왜냐하면 병이라는 것은「더없는」신으로부터의 은혜입니다. 「더 없는」이기 때문에 병이라는 것은 이것 이상은 없는 신의 은혜입니다, 「더없는 신의 은혜인것이로다」이기 때문에. 신의 은혜의 최상급이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슈사마께서는 병에 걸려도 무조건 괜찮다는 신념으로 의학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받아들이셨습니다.
분명 서양 의학은 앞으로 점점 발전할 것입니다. 약도 점점 좋은 약이 생길 것이고, 점점 점점 발전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하지만 저는 동시에, 과학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도 증명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께서 창조하신 이 인간의 몸,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이것도 증명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약이나 백신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신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몸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도 반드시 증명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메-슈사마께서「인간의 몸은 신의 최고 예술품」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몸은 신의 최고 예술품. 그래서 그 시점(視點)으로 말하자면, 약도 백신도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인간 몸을 어떻게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그럴 정도로 인간의 신체가 대단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문제 발언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하지만 역시 인간의 몸을 만드신 신께 대한 신앙과, 그리고 의학과 단호하게 싸우신 메-슈사마의 인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학과 어떻게 관련할지, 약과 백신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그 선택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겨져 있기는 합니다만.
또 병이라고 해도, 이른바 암이나 그런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문제도 있지요. 특히 병에 걸린 후 계속되는 마음이지요. 낫고 싶다, 좋아지지 않는 것인가, 왜 나만 이런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개선의 전망이 없는 병이나 불치병이라면, 계속 그 마음을 안게 됩니다.
정말 그 신업을 떠맡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은 청소의 일환으로서 신께서 써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나 좋을대로 쭉 살아온 오랜 인류의 부조화의 상황을 신께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쓰셔서 모으고 계신 것입니다. 청소기로 쓰레기를 빨아들이듯이 모으고 계십니다. 청소기로 모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의 상황인 것입니다. 신께서 모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청소하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이것은, 사실 대단한 진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알았다고 해도 겉보기에는 똑같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변하느냐 하면, 변할 수도 있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서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 살았던 것이, 앞으로는 문자 그대로 신을 위해서 사느냐 마느냐 하는 그 차이입니다. 하지만 신을 위해 산다고 해서 실제로 자신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느껴진 것을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 쓸 것인가(더 좋아져야 하니까 신혼닦기를 하자든가 더 헌금을 하자든가) 아니면 나의 마음은, 신께서 사람의 마음을 모아서 세상을 맑히는 일을 하고 계신다고 받아들이는 것인지, 그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대단한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 진실이자 진리.
이번 교단 정화가 있어서, 사람에 따라서는 오카다 가의 가보라고 하면 미술품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국보 같은 것도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저는 오카다 가의 가보는「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메-슈사마로부터 교-슈사마께 전해지고 있는 진리.
그런데 이 진리라는 것은 아무리 돈이 쌓여 있어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아무리『성서』를 읽어도, 아무리 메-슈사마의 성언을 열심히 배독해도, 그리고 아무리 돈을 쌓아도 결코 신의 진리는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약 오카다 가에 가보가 있다면, 메-슈사마로부터 계승되고 있는 진리, 지금 제가 여러분께 이야기하고 있는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쿄-슈사마와 제가 대화를 나누었는데, 쿄-슈사마께서도 저를 교주대행으로 정하신 당신의 의사를 무겁게 생각하셔서(대행이라는 것은 대신 행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제전을 기하여 월례제와 마찬가지로 대제의 장에서도 신도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앞으로는 저뿐인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관계없습니다. 그것은 설령 쿄-슈사마와 제 표현이 달라도 줄기는 똑같기 때문에. 쿄-슈사마께서 표현하시는 방식과 제가 표현하는 방식(스타일이랄까)에 차이가 있어도 관계없습니다. 같은 하나의 줄기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메-슈사마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줄기, 신의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이 하나의 줄기에 의해 인도되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한 줄기 아래, 더러운 일을 하고 싶은가 아닌가 입니다. 나는 제대로 된 사람이기 때문에 청소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분이 깨어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비록 싫더라도 우리의 일은, 세상의 먼지와 쓰레기를 남김없이 씻어 맑히는 것입니다. 즉, 청소가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 메-슈사마 찬가「남김 없이」가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김 없이 청소한다는 것은「가장 더러운 장소로 가라」라는 것이지요. 가장 더러운 장소로 가라. 게다가 가장 더러운 장소가 가장 청소를 요구하지요. 청소되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메시아교 라는 것은 더러운 일을 하는 종교입니다. 가장 더러운 장소로 가는 것이 우리 세계메시아교. 가장 더러운 곳에 구원의 빛을 가져다 주는 것이 우리 세계메시아교입니다. 다른 표현을 하자면, 가장 낮은 곳까지 가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낮은 곳까지 간다는 것은, 그것은 구원의 못을 박는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가장 낮은 종교인 동시에 가장 낮은 곳까지 갈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은 세계 최고의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최고의 종교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곳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세계메시아교는 더러운 일을 사서 하고, 가장 낮은 곳까지 가는 종교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종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훌륭한 신업에 지금 쓰임받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그 더러운 것이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 구원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습니다.
괴롭지요, 괴롭지요 하고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그곳을 당신은 청소하러 와 있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신업인 것입니다, 쓰레기 수거하는 사람이 없으면 세상이 제대로 안 돌아가지 않습니까, 라고 그렇게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교 여러분이 이 신업을 포기하면, 전 세계가 큰일이 납니다. 사실은. 왜냐하면 쓰레기를 수거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세상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상세계 출현을 위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명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신업은 지금 바로, 훌륭하지 않아도, 돈이 없어도, 아무리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병을 앓고 있어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입니다.
아, 나의 지금의 마음의 괴로움, 이곳을 나는 청소하러 왔구나, 로 좋습니다.
게다가 어려운 말은 몰라도 됩니다. 「메시아」라는 말만 알고 있으면 그것에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쓰신 메시아라는 말, 유대인 계속 써왔던 메시아라는 말, 메-슈사마도 쓰셨던 메시아라는 말. 여기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것 몰라도 됩니다. 「메시아의 존명을 받겠습니다」로 끝입니다. 그러면 신께서는「메시아라는 존명을 받아들인다면 알겠다」「그럼 너를 청소하는 신업에 써 주겠다. 마음의 더러움을 청소해 주겠다」하시고, 이러한 활동이 영주체종의 법칙에 의해서 멋진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동을 신께서는 지금 하고 계십니다. 신께서는 지금 청소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요점은 부모이신 이 신을 돕고 싶은가 어떤가 뿐입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신께서 계속 청소하시는 것을 보고, 아 청소해 주시니 좋다 라고 하고 나는 계속 TV 보고 게임도 하면서 보내는 일생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나도 신을 돕고 싶습니다, 메시아라는 이름이 소중합니다, 지금 이웃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버렸네 라든가, 병으로 마음이 닫혀서 어쩔 수 없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여기를 청소하러 온 것이구나」라고 하며, 신께 대해「메시아의 존명으로 잘 부탁드립니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신께서는「그것이 가장 큰 효도이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 부모님이 집 청소 다 해 주셨지요. 해 주셨지 않습니까?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해 주셨듯이 씻고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계속 아이인 채로, 그럼 나는 자겠다, 어딘가 놀러가자 로 자신의 인생을 진행해 갈 것인지, 아니면, 지금 신께서 주시는 절대적인 구원(왜냐하면 부평초처럼 정착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가엾이 여겨주셨습니다. 신께서는, 이미 너를 구원해 주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이라는 생각으로「효도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뀝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구체적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간단하게는「이렇게 바뀌었습니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하지만 바뀝니다, 분명히. 여러 어려운 일이 영광의 길, 기쁨의 길로 반드시 바꿔갑니다. 효도를 하려고 하면. 왜냐하면 신께서는 우리의 부모이시며 부모는 자녀가 기뻐하는 일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도 평생, 아이인 채로 응석부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부모에게 효행하는 삶을 살 것인가, 그것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결단이 우리 인생의 행복에 크게 관여되어지는 것입니다. 행복. 부모의 행복 없이는 자식의 행복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최고의 구원을 맡고 있는 것이 이 세계메시아교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교에는 여러 활동이 있습니다. 노래를 부른다든가, 기도도 있고, 식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비건식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최후의 공양물이기 때문에.
오히려 반대로 아이들 세대 쪽이 사실은 앞서가고 있습니다. 저희 집도 비건이라는 것에 관해, 아이가 학교에서 부모보다 분명한 입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나 친구들이「아, 나도 하고 싶다」라고 하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미륵의 세상에는 인류는 채식을 하게 된다」라고 하는 메-슈사마의 성언을 대수롭지 않게 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은 2,300명 이상이 모여 있습니다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높지도 낮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 아래에 놓여있습니다, 지금. 사실은 절체절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쓰레기 수거차를 만났을 때만큼은 우리의 사명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쓰레기 수거라는 것은 가장 더러운,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틀림이 없지요. 쓰레기를 모으는 일은 아무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쓰레기는 냄새가 나고 자신의 옷과 피부에도 냄새가 배고,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남김없이 먼지와 쓰레기도 씻어 맑히는 것도 누구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을 하고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깨끗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종교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자긍심을 가지고 자랑해 주시길 바라며,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마음이 그런 곳에 보내질 때는 힘들기 때문에, 그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이렇게 많은 동료들이 있으니까, 함께 손을 잡고, 나눌 것은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하나의 가족으로서 세상을 청소하고 최고의 세상을 만드는 것에 함께 용기를 가지고 해 나가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사아키사마, 코러스가 끝난 후 갑자기 무대에 올라가셔서 성언을 말씀하심) 노래는 안 합니다.(일동 웃음, 일동 박수). 노래는 안 하지만 지금 밑에서「위를 보며 걷자」와「사랑은 이긴다」를 듣고 생각한 것은, 우리는 오랫동안 나의 인생이 외톨이다 라고 생각하고 위를 보면서 울면서 걸어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남자 보컬분이 불러주신 것처럼「최후에 사랑은 이긴다」라고 하여 이겨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이겨주시고, 그리고 그 기쁨을 노래한 것이 헨델의「메시아」입니다.
우리는 계속 혼자서 위를 보며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으며, 좋은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위」가 와 주셨습니다. 위가 내 안으로 와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더 이상 저 먼 위를 보며 걸을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함께 계셔 주시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사랑이 이겼습니다. 신의 사랑이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뭐랄까, 그 사랑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다는 걸 확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앞의 곡「(위를 향해 걷자)」 외톨이라는 부분에서 자신의 마음이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 말씀을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일동박수)
이 상